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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멀티튜드

월간 멀티튜드 2024년 2월호 / 공동토론 : 카트린 말라부의 가소성의 철학 < Limitrophe(リミトロフ)No. 1, 2022 >

by 상겔스 2024. 2. 11.

* 아래 번역한 글은 < Limitrophe(リミトロフ)No. 1, 2022 >에 수록된 것이다. 

* 아래의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카트린 말라부의 『말소된 쾌락』의 일역본과 관련된 토론회의 번역이다. 


共同討論「カトリーヌ・マラブーの可塑性の哲学」
カトリーヌ・マラブー、星野太、佐藤朋子、宮﨑裕助
小川歩人、藤本一勇、増田一夫、鵜飼哲

https://tokyo-metro-u.repo.nii.ac.jp/record/9369/files/20037-001-01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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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말라부와의 토론 - Limitrophe N1 200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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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創刊の辞 西山雄二

巻頭言 西山雄二

特集 カトリーヌ・マラブー『抹消された快楽』 
郷原佳以「非性器的なセンシュアリティのために」
中村彩「フェミニズムと精神分析、およびスピヴァクにおける女性器切除について」
カトリーヌ・マラブーの応答(西山雄二、渡名喜庸哲、馬場智一 訳)
古怒田望人「『抹消された快楽』において抹消されるトランスの快楽」
浜崎史菜「「哲学」を可能にする「外部」──クリトリスを父権的言説内に包摂し特権化するリスクの再考」
杉浦鈴「本質主義への危険な接近」
丸山美佳「抵抗と消費とアスタリスク」

特集 カトリーヌ・マラブーの可塑性の哲学
星野太「「生」の概念」
佐藤朋子「トラウマとは何の名か──『新たなる傷つきし者』」
宮﨑裕助「理性の後成説と統制的理念──『明日の前に』」
小川歩人「セクシュアリティの他者、アナーキズムの対抗概念」
藤本一勇「クリトリスのノミネート(命名・指名)──『抹消された快楽 クリトリスと思考』」
増田一夫「人新世における可塑性」
鵜飼哲「喪の可塑性と来たるべき世界史」
カトリーヌ・マラブーの応答(西山雄二、渡名喜庸哲、馬場智一 訳)
  
特集 フランスにおけるインターセクショナリティ批判
ファヨル入江容子「フランスにおけるインターセクショナリティ(交差性)の受容と新たな社会運動としての発展」
エリック・ファッサン「レイシズムとは何か──係争中の定義」(ファヨル入江容子 訳)
西山雄二「無条件の自由のために」

翻訳
カトリーヌ・パンゲ「束の間の時で死すこと、あるいは不滅のために唄うこと
(ジャン・ジュネとパレスチナの抵抗)」(西山雄二、佐藤勇輝 訳・解説)
デヴィッド・L・クラーク「翻訳における遺失物取扱所──ロマン主義とジャック・デリダの遺産」(森脇透青 訳・解説)
ブリジット・ウェルトマン=アーロン「政治的な裏切り──エレーヌ・シクスー『偽証の都市』」(北川光恵、西山雄二 訳・解説)

論考
八木悠允「ミシェル・ウエルベックの散文におけるポワン・ヴィルギュル」
志村響「「以外」のフランス語」
高波力生哉「署名の謎についての一考察──『シニェポンジュ』におけるépongeを手がかりに」


'삶' 개념 

星野太(東京大学)

당신의 지금까지의 작업에는 생명과학과 관련된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그 논의가 한층 더 래디컬한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논문 「단 하나의 삶」(2015)[주1]에서는 "상징적인 삶"과 "생물학적인 삶"을 준별하는 푸코나 아감벤을 비판하면서, "상징적 삶 > 생물학적 삶"이라는 계층관계[위계질서]와는 무관한 "단 하나의 삶"(une seule vie)"이 있다는 인상적인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 이후에 거론된 후성유전학이나 배아복제 등의 과학기술은 『가운데 방』에 수록된 「재생되는 것들」(2006)[주2]에서도 이미 논의된 바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후성유전학이나 배아복제를 비롯한 생명과학이 '미래', 즉 우리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미래와 '과거', 즉 우리가 잃어버린 원시생물의 무성생식과 자기 재생이라는 두 가지 벡터를 가진 것임이 시사되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삶」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분명하게, 그리고 놀라운 방식으로 다시 제기되고 있습니다. 놀랍다는 것은 세대와 유전을 비롯한 과거와 미래의 반전, 더 나아가 죽음과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새로운 관계 등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삶」의 결론 부분을 조금 길게 인용하겠습니다.

생물학적 잠재력은 전대미문의 변용의 양상을 드러낸다. 즉, 유전적 프로그램을 변이시키지 않고 게놈을 재프로그래밍하는 것, 이식이나 인공장기 없이 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대체하는 것, 자기를 재생의 기점으로서 착상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조작이야말로 프로그램, 가족, 자기 동일성 등의 탈구축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또한 이 탈구축을 통해서만 정치적 주체로 상정되는 것의 통일성이 깨지고, 그 '생물학적 삶'이 지닌 복수적인, 그래서 쉽게 길들여지기 어려운 성격이 드러날 것이다.
정치적 담론에서 신체의 분절화는 항상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고, 거기에는 생물의 구조에서 기인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되지/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생물의 구조가 드러내는 다양한 가능성 ── 거기에는 세대 간의 순서의 전복, 유산 상속이라는 개념의 복잡화, 혈통의 재물음/재조명, 죽음과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새로운 관계 등이 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 새로운 유한성의 경험이 초래되는 것이다. 


[주1] Catherine Malabou, « Une seule vie : résistance biologique, résistance politique », Esprit, janvier 2015, pp. 30-40. 「ただひとつの生──生物学的抵抗、政治的抵抗」星野太訳、『表象』第11号、2017年。
[주2] Catherine Malabou, « Les régénérés. Cellules souches, thérapie génique, clonage » [2006], La chambre du milieu, Hermann, 2009. 「再生されるものたち――幹細胞、遺伝子治療、クローニング」, 『真ん中の部屋』, 西山雄二・星野太・吉松覚訳、月曜社、2021年。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물이 원래 과거에 가지고 있던 ── 혹은 지금도 도롱뇽등에서 볼 수 있는 ── 자기 재생 능력과 그것을 보조하는 과학 기술이 아닐까요? 그러나 여기까지 래디컬한 차원에서의 '탈구축'이, 생명과 기술에 의한 그 보철에 의해서 가능하다면, 거기서 철학이 개입해야 할/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쯤 있을까요? 이미 지금까지의 저서 속에서도 쓰여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그것이 첫 번째 질문입니다.

또, 당신의 '가소성'은 정말 다양한 수준·대상을 가지는 개념입니다만, 그 다양한 '가소성' 사이에 뭔가 정도의 차이 같은 것이 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당신이 『가운데 방』 14장에서 논하고 있는 펠릭스 라베송의 '습관'이라는 것도 하나의 가소성의 발현[현시]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예를 들어 이것을 더 온당[온건]한 '가소성'으로, 그리고 자기 재생이나 유전자 재프로그램을 더 과격한 '가소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과연 타당할까요? 이것이 두 번째 질문입니다.

카트린 말라부의 답변

아주 심오한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상당히 난해하기 때문에, 제가 지금 철학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철학사에서 중요한 시대는 항상 존재와 삶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의해 추동되었습니다. 철학사를 그 단초端緒부터 되돌아보면, 존재와 삶의 관계에 대한 사고방식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 혁명적인 대격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충격은 종종 과학의 진보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 당신은 존재의 문제를 정의했는데, 삶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 영혼과 신체 등 삶 일반에 관한 논고들을 썼고, 당시 과학의 발전을 활용했습니다. 삶이라는 관점에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 것이죠.

두 번째 사례는 우리와 가까운 시대인데, 데리다입니다. 그는 에크리튀르로부터 하이데거의 존재를 물었습니다. 데리다에게 에크리튀르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는 유전 프로그램 사례를 참조되고 있습니다.

『내일 전에』에서 제가 보여준 것은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고, 삶에 의해 존재가 다시 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유전자 치료법, 줄기세포의 가소성의 발견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철학사의 길목에 있으며, 삶이 항상 존재를 도발하고, 철학은 이 충격에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인데, 가소성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소성은 역사적인 것이며,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그 형태도 국가와 언어에 따라 다릅니다. 다만 어떤 가소성만이 다른 가소성에 비해 더 급진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라베송을 언급하셨는데, 그의 습관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은 정말로 래디컬합니다 ── 습관의 가소성에 의해 개인 전체가 변모한다고 하니까요. 이 가소성은 반복과 실천을 통해 개인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일거에 바꿀 수 있습니다. 그들의 습관론은 모두 래디컬하며, 현재의 줄기세포 논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래디컬합니다. 삶은 존재를 전면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고, 존재는 이 변형에 응해야 합니다. 가소성은 시대와 언어에 따라 다르고 다양하지만, 질문은 항상 동일합니다. 즉, 자기 정체성의 래디컬한 변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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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무엇의 이름인가 : 『새로운 상처받은 자들』[주3]

佐藤朋子(金沢大学)

"또한 유아기에서의 유혹〔=성 학대〕은 그 정도는 눈에 띄지 않지만, 병인론의 한 축을 계속 차지하고 있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기 자신을 말하다』, 1925년.

"실제로 ── '내인성의' 강제든, '외인성의' 강제든 ── 국소론적 수정을 가하는 방식으로 심적 사태에 작용하는 모든 것을 (단어의 메타심리학적 의미에서) '현실'이라고 부른다면 ・・・・・・" / 니콜라 아브라함, 마리아 토록, 「애도 혹은 멜랑콜리 : 내투사하는 것-육체화하는 것」, 1972년

 

1.

트라우마와 그 '파괴적 가소성' —— 형태의 파괴를 통해 창조하는 능력 —— 은 프로이트의 저작 전체를 통해 〈사고되지 않은 것〉일까요?

『새로운 상처받은 자들』은 이 질문에 긍정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 당신은 트라우마와 파괴에 관한 정신분석적 사고에 대해 물으면서 이렇게 총괄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에서 트라우마는 어디까지나 '분리'라는 측면에서만, 마음이 경험하는 '자기와의 분리'로서만 검토되며(p.197sq., et p.206sq./ 186頁 이하 및 196頁 이하), 그 분리는 종국적으로는 거세, 처벌(사랑의 인상愛の引き上げ), 출생 때의 위험 같은 위협 중 어느 하나든(p.200sq./189頁 이후), 불안 발전에서 선취되거나, 혹은 예상될 것(p.206sq./196頁 이하)이라고. 이리하여 프로이트는 "규정적인 인과적 가치"(p.41/42頁)를 인정하는 것도, "트라우마,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 고려치 못한 파국"에 "마음을 규정하는 힘"(p.195/184頁)을 인정하는 것도 거부할 것입니다. 

[주3] Catherine Malabou, Les nouveaux blessés. De Freud à la neurologie : penser les traumatismes contemporains, PUF, 2017 [2007]〔『新たなる傷つきし者 : フロイトから神経学へ 現代の心的外傷を考える』, 平野徹 訳, 河出書房新社, 2016年. 이 발표에서는 2판을 참조하며, 인용 때에는 본문 속에 쪽수를 '2판 원본/일역본'의 순서로 제시한다. 다만 일역본은 초판에 근거하며, 2판의 가필 수정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또 이 책을 포함한 각 텍스트를 인용할 때는 기존의 번역본을 참조하면서 적절하게 바꾸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당신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파괴적 가소성, 즉 마음의 파괴를 출발점으로 하여 새로운 동일성이 형성된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p.260/249쪽)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건성의 구조라는 관점에서도 그의 거부의 함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따르면, 프로이트적 자아에 고유한 "모든 형태의 불안과 위험에 공통된 선취의 구조"(p.208/198頁)는 "모든 유형의 사건과 사건사고accident를 심적인 수용 장치"(p.208/198頁)로서 기능하며, "프로이트에게서 모든 사건의 수용의 지평은 위협의 선취이지만, 그 지평 자체를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p.212/202頁)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당신의 분석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도, "프로이트의 사고에는 처음부터 명확하게, 불쾌에 대한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고통의 이론이 존재한다"[주4]는 장 라플랑쉬의 지적에 동의하면서, 다른 독해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저의 독해는 트라우마를 둘러싼 프로이트의 사색에서 불안과 함께 고려된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프로이트는 코카인의 마취 작용과 히스테리 환자의 명백한 손상을 동반하지 않는 통증을 지적한 1880년대의 연구를 통해 통증의 수수께끼에 접근하려 했습니다. 「심리학 초안」(1895년)에서는 만족체험(쾌락원리에 따른 체험)과 고통체험을 두 가지의 기원적 체험으로 정식화하여 규정합니다. J.-B. 퐁탈리스는 이를 주석하면서 고통체험 속에 쾌락원리의 '저편'을 슬며시 인정하고 있습니다. 『쾌락원리를 넘어서』(1920년)에 의한 간략한 고찰 후, 「제지, 증상, 불안」에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고통은 대상의 상실〔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에 대한 진정한 반응이며, 불안은 그 상실이 야기하는 위험에 대한 반응이다"[주5]. 여기서 말하는 '대상 상실'은 대상의 창조와 같은 계기에 위치하는 한, "자기로부터의 분리"와는 구별됩니다. 이 대상상실을 표식하는 고통은 준(準)메타심리학적이라고도 형언할 수 있는 지위와 함께,[주6] 특히 국소론의 수준에서 메타심리학의 재정식화를 요구하는 수수께끼로서 나타납니다. 고통스러운 감정 및 감각에 대응하는 "강렬한 동경 투여"는 만족 상황의 반복에 따라 구성된 힘 X와 유사 갈등 상태에 있으며, 육체적 고통과 "동일한 경제론적 조건"을 만들어냄으로써 정신과 육체의 구별에까지 이르는 국소론적 혼돈을 야기합니다.[주7]

[주4] ジャン・ラプランシュ, 『精神分析における生と死』, 十川幸司, 堀川聡司, 佐藤朋子 訳, 金剛出版, 2018年, 157頁.
[주5] ジークムント・フロイト, 「制止、症状、不安」, 大宮勘一郎, 加藤敏 訳, 『フロイト全集』19, 岩波書店, 2010年, 99頁.
[주6] 프로이트의 담론 속에서 고통이 차지하는 장소를 명확히 하려고 시도한 논고로 다음의 내 글을 참조. 佐藤朋子, 「「痛み」のフロイト的表象」, 『思想』, no. 1167, p. 7-22.
[주7] ジークムント・フロイト, 前掲, 100-101頁. 

「방어과정에서의 자아분열」(1938년)이라는 프로이트의 말년의 논문 제목을 여기서 환기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입니다. 프로이트에게서 자아는 항상 신체적 자아였다는 점이 상기됩니다. 그런 점에서 자아로부터의 초자아의 분리에 이 자아 분열을 빗대는 유비(p.208/198頁)는 한정적인 것에 머물게 됩니다. 이 '분열'과 더불어, 자아에 고유한, 사건의 수용 장치를 침범하는 상처가 문제가 되는 것 아닐까요? 즉, 더 넓은 맥락에서 말한다면, 프로이트는 『새로운 상처입은 자들』에서 당신이 그려내고 있는 것보다 '파괴적 가소성'의 문제군에 가까이 있는 것 아닐까요?

2.

트라우마의 현실성을, 또한 미지의 사건에 의해 사건 수용의 지평이 파괴될 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해 실증적 증거가 필요할까요?

당신은 『새로운 상처받은 자들』에서 "도래할 정신병리학에서는 뇌의 사건성이 성의 사건성을 대체할 것"(p.12-13/18頁)임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당신은 신경학적 담론과 정신분석적 담론의 분석을 통해 뇌손상을 트라우마 증상의 병인론에서의 "모범"(p.248/239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모범적 가치를 근거짓는 것은 신경학이 가져다 준 수많은 실증적 증거들입니다. 다른 한편, 프로이트는 외상적 반복을 설명하기 위해 '죽음 충동'을 가정했습니다. 이때 그는 당시의 생물학에 의존하지 않고, 이 실증적 과학에 의해 그의 가설이 현재로서는 부정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데 그쳤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실증과학과 그 성과에 대한 단절을 출현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과학적 언어도 뒤흔들 수 있는 미지의 사건을 향한 사고의 공간을 열어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카트린 말라부의 답변

감사합니다, 당신의 비판적 독해로 제 사색이 더욱 전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질문인데요, 물론 프로이트에서 사고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트라우마가 정신병리학에 중요한 개념이라고 보여주었으니까요. 자, 프로이트에서의 고통에 대해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고통과 쾌락은 다릅니다. 고통은 대상의 상실에서 생기니까요. 하지만 제 논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프로이트의 트라우마의 위상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프로이트를 신경과학에 연관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저의 문제 관심은 프로이트에게서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는 것도, 고통의 중요한 이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질문은 사건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트라우마의 그리스 어원은 '찌르다'이기 때문에 트라우마란 마음을 찌르는 무언가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프로이트에게서 마음을 찌르는 사건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진전함에 따라 알게 되는 것입니다만, 이 찌르는 사건은 항상 마음의 안쪽에서 생깁니다. 폭행이나 폭력, 대상 상실 같은 외적 사건조차 마음을 찌르는 경우, 그 내부의 사건으로 반드시 번역됩니다. 제 질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정신분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외부에서 발생하는 사고accident, 마음의 내부로 번역할 수 없는 사고 accident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뇌의 사고 accident입니다. 뇌손상이나 알츠하이머·····마음을 밖에서, 완전히 불확정한 형태로 공격하는 것의 사례입니다. 완전히 밖에서 생기는 사건, 우연적으로 마음을 찌르는 사건을 프로이트는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의 적절한 지적처럼, 저는 과학의 지식을 얻어서 이러한 사고accident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저는 뇌과학 책을 읽고 밖으로부터의 트라우마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과학만의 문제 설정이 아닙니다. 프로이트 이론을 과학에 의해 다시 묻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뇌 과학은 정신분석에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해줍니다 ── 뇌의 사고accident를 받아들이는 심적 구조란 어떤 것인가? 뇌 손상을 입었을 경우, 심적인 것에 의한 트라우마의 기질적・신체적 수용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프로이트가 묻지 않은 사상事象, 그가 거칠게 묘사했지만 포기한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파리의 생탄느 병원에 가면 마음의 병은 뇌신경과와 정신과로 완전히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구별이 왜 그런지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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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후성설과 규제적 이념 : 『내일 전에』

宮﨑裕助(専修大学)

저는 2014년에 당신이 출판한 『내일 전에』에 대해 질문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이 책의 대담한 시도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우선 『순수이성비판』 27절에 무심코 나오는 epigenesis라는 말로부터, 현대 생물학으로 이어지는 광대한 사정거리를 개척하려고 하고 있는 점, 또 이 말이, 하이데거 이후의 "초월론적인 것의 포기"라는 현대 철학의 중요한 논점과 관련되어 있는 점, 특히 21세기 이후, 메이야수를 중심으로 한 사변적 실재론에 의한 칸트주의 비판에 대한 응답이 된다는 점, 거기서부터, 현대의 뇌신경 과학이나 생물학과의 대화가 철학의 과제가 된다는 점 등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책의 과제는 초월론적인 것을 단순하게 포기하지 않고, 그러나 현대 생물학의 지식을 활용하면서, 에피제네틱스[후성유전학]의 철학을 수립하는 것에 있습니다. 즉, 그것에 의해, 사변적 실재론이 제기하고 있던, 자연 법칙의 우연성이나 세계의 불안정성이라는 문제를, 칸트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성의 후성설이라는 관점에서 일정한 해결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이 반복해서 언급하듯이, 이 책의 최대 문제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물학화라는 난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입니다. 한편으로 이 책은 초월론적인 것의 포기를 단순히 지지하고, 그 대신 이성이나 합리성의 작동을 현대의 뇌과학이나 진화론적인 설명에 의해 대체[치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물학의 지식을 경시하고 초월론적인 것의 전통적인 입장에 갇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후성설이라는 단어의 사용이며, 더구나 이것은 이 책의 결론 부분이 밝히고 있듯이, 『판단력비판』의 물음을 고려하지 않고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판단력비판』이 해명하고 있는 것은, 아프리오리한 개념이나 카테고리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자연이 통일적으로 스스로 조직화하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즉, 이성은 오히려 그러한 자기 조직적인 생명의 작용에서 자신의 후성적인 발생을 찾아낸는다는 의미에서, 칸트는 이른바 초월론적인 생물학의 패러다임을 소묘했다고 이 책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현대 생물학과의 접속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의를 읽으면서, 칸트를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성의 규제적 사용이라는 비판 철학의 기본적인 논의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성은 개념이나 범주를 통해 경험을 구성적으로만 규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념이나 체계를 통해 규제적으로도 작용하는 것이고, 이는 『판단력 비판』에서도 목적론적 판단력의 원리 속에서 발견되는 작용이며, 비판철학의 일관된 논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성의 후성설에 대해서는 칸트가 당시 생물학의 함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일종의 유비analogy로서 규제적인 작용 하에서 파악한다면, 저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생물학의 고유한논점으로 돌려보내지 않고서도, 초월론적 원리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아프리오리한 이념으로서 초월론적이지만, 규제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하면, 후성설로서 얘기되는 것 같은 시행착오를 포함한, 발생적인 논점과 양립 가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성은 시행착오나 수정을 거듭하면서도 엔트로피 증가가 아니라 일정한 이념적 지평에 수렴하는 생명[삶]을 규정[규율, 規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한에서, 칸트의 목적론을, 현대 생물학과 직접 접속하는 것이나, 메이야수가 제기했던 것처럼 자연 법칙의 우연성이나 세계의 불안정성에 대답하는 것으로 읽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책 또는 이 책이 생각하는 에피제네틱스의 철학은 어떤 자연을 상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자연관이 전제되어 있는 것일까요? 칸트에서는 natura naturata와 natura naturans라는 전통적인 구별을 따라 자연은 자연법칙을 따르는 객체적 자연과 자연법칙 자체를 만들어내는 능산적 자연이라는 이중체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후자의 능산적 자연이고 칸트는 이것을 초감성적인 이념적 자연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자연은 초월론 철학에 있어서의 이념으로서 규제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자기 조직화합니다.이러한 이념적 자연을 텔로스로 삼음으로써 칸트의 자연철학이 이성의 목적론으로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이 메이야수에 맞서면서, 현대의 생물학을 통해서, 자연법칙의 우연성이나 세계의 불안정성을 설명해주는 후성설은, 칸트의 자연철학에서 도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이 책의 기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념 없는 자연, 혹은 지평 없는 자연주의 같은 관점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 자신은 칸트의 『판단력비판』에는 그러한 논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목적론적 판단력이 아니라 미적 판단력의 물음을 통해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는 살로몬 마이몬Salomon Maimon의 논의를 확장해 칸트의 숭고론 속에서 발생의 논점을 찾아냈습니다(「칸트 미학에서의 발생의 이념」). 데리다도 같은 숭고론 속에 괴물적인 것의 장소(das Ungeheure)를 지적했습니다(「거대한 것」, 『회화에서의 진리』 수록). 사변적 실재론의 문제제기에 팽팽하게 대립하는 형태로 칸트를 다시 읽기 위해서는 괴물적인 자연, 이른바 돌연변이에 놓인 기형적인 자연을 『판단력비판』에 읽어낼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카트린 말라부의 답변

굉장히 심오하고 도발적인 질문이었어요. 저도 도발적으로 대답해 보겠습니다. 칸트에게서 이성의 후성설은, 제가 보기에는 규제적이지 않고 구성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도발입니다만, 제3비판이 전개하는 목적론, 즉, 자연이 목적에 따른다는 후성설적인 생각이야말로 규제적이며, 제1비판에서 후성설의 구성적 기능의 유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1비판에서 칸트가 말하고 있지만, 범주의 산출은 후성설적인 운동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유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의 후성설과의 유비로 후성설적인 산출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면, 배아의 성장과정처럼요. 제1비판에서 칸트는 은유나 유비를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일 전에』에서의 제 주장이지만, 은유도 유비도 아니고 칸트 자신, 이성이 구성적으로 후성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후성적라고요. 

『순수이성비판』 의 21절에서 묻고 있는 것은, 아프리오리한 것, 초월론적인 것과 선천[생득]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 정신에서 범주의 형성은 선천[생득]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성이 구성적인 방식으로 후성적이지 않으면, 이성의 생득적인 이론과 초월론적인 이론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제3비판에서는 후성설이 규제적인 판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규제적 판단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후성설 때문입니다. 칸트는 구성적인 방식으로 이성에 있어서 후성설의 중요성을 적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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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의 타자, 아나키즘의 대항 개념

小川歩人(大阪大学)

1. '성적인 것의 타자'에 대해 

먼저 '세레브랄리테cerebralité'와 '섹슈얼리티'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신간 『말소된 쾌락 : 클리토리스와 사유』(2020)를 읽고, 페미니즘에서 도래할 연대의 형태를 모색하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서 당신은 폴 B. 프레시아도Paul B. Preciado, 게일 살라몬Gayle Salamon, 잭 할버스탬Jack Halberstam 등의 이름과 함께 트랜스페미니즘을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생물학적, 사회적 구축에 대해 언급하고, 복수의 목소리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분열이나 차이화보다는 권위주의적인 팔루스 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연대를 지향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의 차이화를 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디스 버틀러도 당신과의 대화(『내 신체여』(2010)에서 "분열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키아즘"에 대해 말하려 했습니다. 잘 알고 있지만, 당신의 이론적 분절articulation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새로운 상처받은 자들』(2007)에서 볼 수 있듯이, 2000년대 당신의 논의는 "정신분석적 섹슈얼리티"의 "타자"를 겨냥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저는 어-섹슈얼[무성애]를 둘러싼 이론과의 관계에서 당신의 저작을 읽기도 했습니다. 섹슈얼리티와는 다른 것이었던 셀러브리티는 지금 당신의 페미니즘 프로젝트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주디스 버틀러 같은 이론가나 '새로운 유물론'과 같은 영미권의 동향과 크게 보면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신의 이론적 관점은 여전히 이질적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가운데 방』(2009) 10장에서는 버틀러의 멜랑콜리적 주체화 이론과는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 자신은 이러한 여러 목소리 속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조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아나키즘의 대항 개념'에 대해 

다음으로 아나키즘에 관한 프로젝트에 대해 가소성과의 관계에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가소성은 스스로를 글로벌 자본주의로부터 차이화하기 위해 유연성 같은 대항 개념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나키즘이 수직적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해도, 거기서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수평적 대항 개념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당신은 올해[2021년] 7월에 있었던 강연[주8]에서도 아나키즘이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는 것이라고 논의한 다음, 정치적 아나키즘과 아나코-자본주의를 차이화하는 것이 단순[간단]하지 않다고 논했습니다. "예를 들어 『말소된 쾌락』에서도 당신은 "미국의 클리토리스"라는 폴 B. 프레시아도의 샌프란시스코에 대한 표현에 다소 당황하면서도, 우뚝 선 팔루스와 초강력한 클리토리스의 구별이 어렵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주9] 『조종』이라는 책이 우뚝 선[발기한] 팔루스와 그 시뮬라크르에 관한 책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 우뚝 서지는 않더라도 꼿꼿하게 선[발기한] 팔루스와 혼동될 정도로 초강력하고 아나키한 클리토리스가 어떤 것일까요? 에코노미[경제] 중에서 다른 에코노미[경제]를 구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그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요? 당신은 이것을 "수평적인 것의 정치적 결정 불가능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부적절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팔루스 중심주의적 체제를 질문에 부치기 전에 연대 안의 위험을 미리 지적해버리는 억압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기경영"이나 "생명권력적 통치"로부터 아나키적 "자주관리",[주10] "생명정치에 대한 생물학적 저항"[주11]을 구분한다는 의미에서도 아나키즘 속의 대항 개념이 무엇인지는 과제인 것 같습니다.

[주8] Lecture ”Why the Need for a Philosophical Exploration of Anarchism Today?” , ICI Berlin Institute for Cultural
Inqualy, 8 July 2021 https://www.ici-berlin.org/events/catherine-malabou/.
[주9] Malabou, Catherine (2020). Le plaisir effacé: Clitoris et pensée, p. 117.(日本語訳、158頁)

 

카트린 말라부의 답변

매우 훌륭한 질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점 난이도가 높아지네요.

두 가지 질문을 하나로 묶어서 한 가지 논의로 답하겠습니다. 『새로운 상처받은 자들』에서 저는 확실히 뇌의 사태와 섹슈얼리티를 대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섹슈얼리티의 저편에서 뇌의 사태를 고찰한 것은 아닙니다. 리비도의 질문을 비껴가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쾌락의 행위이지 섹슈얼리티의 타자가 아닙니다. 리비도의 물음이 바뀐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나키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오늘날 서로 뒤섞인 형태로 두 가지 유형의 아나키즘이 있습니다. 혁명적 아나키즘과 자본주의적 아나키즘입니다. 그 배경에는 "삶의 일반적 수평화(우버화)"가 있습니다. 삶을 관리하는 지배적인 거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수평적입니다. 저는 삶의 수평화와 기술의 수평화, 그리고 뇌의 리비도에는 강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뇌는 특정한 중심이 없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나키한 상태(교환의 수평화)에서 살아가는 것과 뇌 리비도의 비중심적 상태는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특정한 탁월한 주도적 기관, 즉 팔루스나 바기나가 지배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중심이 없는 아나키 상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확실히 데리다가 『조종』에서 논한 초팔루스와 프레시아도의 저술에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최근 젠더론에는 팔루스의 권력적 중심을 재구축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는 권력의 아나키 상태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권력인 한에서 매우 위험한 상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의 거점을 분산시키고 모든 것을 평평하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씨름하고 있는 철학적 난제는 모든 입장을 분쇄하는 자본주의적 아나키로부터 자유롭고 해방적인 정치적 아나키의 차이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주10] Flores Peña, G. (2016). “Interview with Catherine Malabou,” Figure/Ground. May 12th, https://figureground.org/interview-with-catherine-malabou/
[주11] Malabou, Catherine(2020), “Rethinking mutual aid Kropotkin and Singer in Debate”, Fall semester, April
10 2020, https://fallsemester.org/2020-1/2020/4/8/catherine-malabou-rethinking-mutual-aid-kropotkin-and-singer-in-deb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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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토리스의 노미네이트(명명・지명) : 『말소된 쾌락 : 클리토리스와 사고』

藤本一勇(早稲田大学)

『말소된 쾌락 : 클리토리스와 사고』에서 클리토리스의 이름의 지목과 발명은 정치・사회・문화・철학 등 다양한 남성 권력 체제 하에서 여성들의 '사실성'에, 그 '목소리 없는 목소리'에 빛을 주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명명행위에도 비유할 수 있는 거대한 시도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의 전략과 투쟁에서, 단순히 '여성'의 (생물학적, 사회적) '사실성'을 넘어, 클리토리스와 여성적인 것의 이름은, 타성他性의 힘, 존재들의 가소성, 자기와 타자의 가소성을 말하고자 하는 환유일까요? '여성적인 것'이라는 이름(이 형용사의 명명은 실사화実詞化와 간극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은 일종의 가명으로 보입니다. 타성이라는 다른 이름에 의해 치환되어 대체보충될 수 있는 가명입니다.

클리토리스와 여성적인 것의 가명은 참으로 흥미롭고 자극적입니다. 남성권력 체제(전지전능, 만능감, 최종 해결에 발기하는 팔루스체제)의 '급소(le vif)'를, 민감한 부위(le point sensible)를, 말 그대로 '성감대(lazone sexuelle)'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명古名의 전략(paléonymie)'으로 잘기능하며, 남근체제의 체계적 폭력을 둘러싼 역사적 '현실'과 기억이 떠오릅니다. 클리토리스라는 '전략소'(단순한 개념이 아니다)의 발명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말라부 씨의 『말소된 쾌락』으로부터 제가 촉발된[영감을 받은] 클리토리스의 이름의 문제에만 국한된 즉흥적인 사고(부제인 '클리토리스와 사고'의 조잡한 일부분)입니다만(그것이 바흐의 '인벤션'적인 발명력을 가지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로부터 이것 또한 즉흥적인 질문을 몇 개 하고 싶습니다(이 책이 말하고, 잠복시키고 있는 기타 다수 다양한, 다수 다양성 그 자체인 테마, 논제, 투석으로서의 클리토리스 -- 대치석(포석, pierre d'attente), 보석(pierre précieuse), 모퉁이 돌(요석, pierre angulaire), 시금석(pierre de touchche) 등, 클리토리스는 다수 다양합니다 -- 에 대해서는 청중 여러분들이 개별적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대치석에서 대치(待齒)란 '장래에 건물을 이어붙이기 위해 건축 중에 건물의 일부분에 돌, 철, 벽돌 등을 남겨두는 것'이다. 따라서 대체석이란 이를 위한 돌을 뜻한다. 


1. 만약 제가 이해한(들은 entendre) 것처럼 클리토리스와 여성적인 것이, 말라부 씨도 확실히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여성'에 닫히지 않는, '여성' 너머의 '여성적인 것', 즉 가소성을 위한 '환유'라고 한다면('환유'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가 읽은 것이고, 제가 틀렸다면 그 책임은 말라부 씨에게는 없습니다), 이러한 이름은, 남성적인 이름, 예를 들면 팔루스와 '연대'할 가능성(그러한 가소성)을 가질까요? 남성적인 것이란 지배권력, 전지전능에 대한 욕망, 여성과 아이를 길들여 자기의 소유 재산으로 만드는(전유하는) 소유권 체제로 귀결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남성권력 체제의 자기 규정을 내면화하고 거기에 묶여 있는 사고방식일 것입니다(안티의 한계). 팔루스가 다르게(다른 방식으로) 변신하는(이것도 일종의 '성-전환', 본성=개성의 전환일까요?) 가능성을 거절하는 것은 가소성의 사상에 반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팔루스의 클리토리스화가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어떤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2. 오나니즘[자위행위]의 문제. 클리토리스의 사상의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로, 생식(재생산)으로 연결되지 않는 불모의 (불임적인) 행위는 '악(mal)'이며 '병(maladie)'이라는 가치체제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이 체제 하에서 여성은 순전한 쾌락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아이의 탄생과 양육에 급급하는 가정 내 존재(자궁, 모성, 주부, 현모양처)로 축소되어 쾌락의 주체성을 (남편이나 아이에 대한 '배신'의 가능성과 함께) 빼앗깁니다. 이 자궁 시스템(팔루스/바기나 체제)에서 클리토리스의 독립을 승인할 때, 클리토리스의 순수 향락을 긍정하는 것은, 일면에서는 단순한 오나니즘의 긍정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팔로-바기[팔루스-바기나] 체제에 있어서는, 클리토리스 향락=악(병)이라는 발상은, 오나니즘=악(병)이라는 발상과 세트일 것입니다. 둘 다 (재)생산성이 없고, 사회성이 없는 것으로서 지탄・단죄됩니다. 클리토리스 향락의 긍정과 오나니즘의 긍정은 같은가 다른가. 클리토리스 문제와 관련하여 오나니 메커니즘을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긍정해야 할까요? 쾌락 관리의 필요성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쾌락 관리 체제를 계속 비판하면서도, 쾌락 긍정에 의한 다른 억압(다른 부정성의 발동)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3. 클리토리스 향락을 향락 주체로서의 여성의 재주체화(종속 주체를 탈피하는 주체화)의 열쇠로 삼은 경우, 일종의 향락 중심주의에 빠져 향락하지 못하는 자의 실존을 폄훼하거나 억압・배제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불감증(frigidité)'(이 책에서는 마리 보나파르트의 예가 나옵니다)은 보통 심적 원인에 의한 것이 많다고 합니다만, 육체적, 신경계적인 원인으로 생기기도 합니다. 느끼지 못하는 클리토리스는 '악(병)'일까요? '석녀(石女, femme stérile)'는 결함품, 결여태일까요(사라 문제입니다)? 최근에는 향락주체의 탈환이라는 것이 현대사상이나 정신분석이론에서 자주 주장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일종의 향락우위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재생산주의(유용주의)의 안티로서의 또 다른 억압의 온상이 되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재생산주의와 향락주의는 어디선가 은밀하게, 당사자들도 눈치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클리토리스는 '돌'이자 '석녀'입니다. 이 석녀는 아이를 낳지 못할 뿐만 아니라 향락도 느끼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 래디컬한 '석녀'를 어떻게 긍정해야 할까요? 이것은 존재론적 아나키즘의 근본 문제 중 하나가 아닐까요?

4. 마지막으로 정보공학이나 생명의료가 발전하는 미래에는 '성'의 문제가 어떻게 변형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유전자공학에 의해 (이미 오늘날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이른바 섹스 없이도 재생산이 가능해지는 환경에서 성과 생식행위는 점점 분리되고 있습니다(지금까지도 어느 정도는 그랬습니다만). 즉, 오늘날과 미래에 팔루스 -- 정확하게 말하면, 이 경우는 페니스입니다만 -- 는 더 이상 사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사정하더라도 '헛발질'로 OK이며, 이미 일종의 클리토리스처럼 되어 있는 것 아닐까요(이것도 '산종'의 한 형태일 것입니다)? 남성성은 이미 테크놀로지로 대체되고 있습니다(기술 개발자에 남성이 많은 것은 단순히 남녀의 교육 차이의 문제일까요?). 최종적으로 생식과 성이 분리되었을 때 '성' 문제는 존속할까요? 생식으로부터 해방되는 날, '성'의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성' 문제의 '끝의 시작'에 와 있는 것일까요?

 

카트린 말라부의 답변

감사합니다, 이 또한 도발적인 질문으로 훌륭한 텍스트입니다. 네 가지 질문에 짧게 대답하겠습니다. 당신에게 질문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대답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 '팔루스의 클리토리스화는 가능할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그러나 클리토리스화된 팔루스는 여전히 팔루스가 아닐까? 팔루스 본체를 파괴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문제는 이렇습니다 ── 오늘날 팔루스 같은 것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팔루스의 관념을 근절할 필요가 있을까?

두 번째인 오나니즘의 물음입니다. 물론 오나니즘을 옹호해야 합니다. 제가 『말소된 쾌락』에서 비판한 것은 종교・심리학・정신분석 등의 전통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입니다. 클리토리스는 자위행위에만 도움이 된다, 자위행위 전용 기관이다. 그래서 여자들끼리의 관계는 진정한 성관계가 아니다. 제가 이 책에서 질문한 것은 이런 생각입니다. 클리토리스도 타자와의 진정한 성관계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클리토리스는 자기 에로티시즘의 전용 기관이 아닙니다. 당신의 주장에 찬성합니다.


세 번째 질문, '석녀'는 매우 훌륭한 예로, 향락주의를 옹호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다만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쾌락의 최고 형태 아닌가? 마지막 질문인데요, 섹스 로봇의 진화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종류의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확실히, 그것은 섹스의 종언일지도 모릅니다만, 그러나 섹스 로봇의 진화를 통해서, 똑같은 구조, 똑같은 팔루스 중심주의가 존속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기술이 전통적인 섹슈얼리티를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강화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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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에서의 가소성 

増田一夫(東京大学名誉教授)

카트린 말라부의 박사학위 논문 『헤겔의 미래』[주12]에 대해 지도교수였던 자크 데리다는 「아듀의 시간 : 하이데거(헤겔이 읽은), 헤겔(말라부가 읽은), 말라부」[주13]를 헌정하고 있습니다. 헤겔이 말라부에 의해 읽히는 것은 좋은데, 왜 하이데거가 헤겔에 의해 읽히는 것일까? 그 기묘한 아나크로니즘은 제쳐두고, 데리다가 『헤겔의 미래』를 '천재적인 일격' 혹은 '역작'이라고 평가한 점에 주목해봅시다. 그는 말라부는 발명가다, 그녀는 voir-venir와 plasticité(가소성)을 발명했고, 이 두 가지가 철학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춰 사유를 전개했다고 합니다.


12 Catherine Malabou, L’avenir de Hegel : Plasticité, temporalité, dialectique, Paris, Vrin, 1994.『ヘーゲルの未来――可塑性・時間性・弁証法』西山雄二訳、未来社、2005年。

13 Jacques Derrida, « Le temps des adieux Heidegger (lu par) Hegel (lu par) Malabou »,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de l’Étranger, vol. 188, no 1, Mars 1998, p. 3-47. 니시야마에 의한 초역본은 다음을 참조. https://researchmap.jp/yujinishiyama/misc/33428443/attachment_file.pdf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보는 동시에 완전히 예상치 못한 것에 뒤통수를 맞는 것을 의미하는 voir venir는 예견하는 것의 가능성과 동시에 그 불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plasticité는 가소성인 동시에 플라스틱 폭탄의 폭발성이기도 합니다. 예견할 수 없는 대규모 폭발 같은 사건을 목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내일 "9・11"의 20주년을 맞이하는 이 날에 특히 고찰할 만합니다. 또한 다른 폭발, 혹은 붕괴를 앞두고 있는 "인류세"의 시대에 voir-venir와 plasticité는 매우 유효한 형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명"으로 돌아갑시다. 철학적 발명은 우화나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데리다를 인용합니다. "발명한다는 것, 그리고 발명을 사건으로 만든다는 것은 가족, 계보, 어휘적 자원 속에 존재하던 것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 실증하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짓을 통해, 말소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단어가 개념으로 생성하는 것을 확립하고, 그 이론적 정당성을 확인하고, 그 자리를 만들어, 앞으로 경유해야 할 철학적 토포스로 만드는 것이다"[주14] voir-venir, plasticité뿐만 아니라 '뇌'나 '클리토리스'도 이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철학적 토포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들에 대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철학과 생물학 또는 신경생물학 사이에 안정적인 경계선이 있을까요? 또한 생물학이나 신경과학, 그리고 딥 히스토리를 언급하면서 뇌나 클리토리스에 대해 인간의 기관으로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또한, 인간/동물의 경계를 명기한다는, 고전적으로도 비치는 몸짓은 가능한가, 아니 필요한가? 그리고 그 몸짓은 '여성과 자연'이라는 문제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또한, 사유가 어느 정도나 데리다가 말한 '언어의 기회chance'라는 행운에 힘입은 것인지를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영어로 클리토리스(clitoris)는 female genital organs[여성 생식기]의 일부이고, 프랑스어로는 organes génitaux féminins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female/ woman과 féminin/femme의 관계는 전혀 동일하지 않습니다. female에서 동물성을 배제하는 것은 어렵고, 영어에서 female과 woman의 의미론적 범위는 같지 않습니다. 이 지적에 질문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woman에 대한 female의 과잉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여성(femme)에 대한 여성적인 것(féminin)의 과잉"[주15]과는 다른 의미에서?

생물학자 피에르-앙리 귀용(Pierre-Henri Guillo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과 대형 유인원은 다른 포유류들보다 유전적으로 훨씬 더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인간만 생각한다"[주16]라고. 이 탄식에 대해 철학자로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주14] Ibid., p. 14.
[주15] Catherine Malabou, Le plaisir effacé: Clitoris et pensée, Paris, Payot & Rivages, 2020.『抹消された快楽̶  ̶クリトリスと思考』西山雄二・横田祐美子訳、法政大学出版局、2021年。
[주16] Pierre-Henri Guyon, « La théorie de l’évolution et la génétique humaine ». https://youtu.be/UrdPaxfrbqs

뇌도 철학에서는 다뤄지지 않았다는 말라부 씨의 지적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주17]에서의 서술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력을 행동(action), 작업(work), 노동(labor)으로 구별하고, 앞의 두 가지가 인간적인 반면, 노동은 자연과의 물질대사이며 동물적 생명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brain power에는 인간 고유의 복수성이 인정되지 않고, 동물 종으로서 주어진 능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말라부 씨에게서 뇌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뇌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아렌트 역시 인간과 동물, 인간적 삶인 bios와 동물적 생명인 zoè를 엄격하게 구별하려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연주의, 생물학주의를 피하려고 하는데, 두 사람에게 공통적인 이 배려는 뇌에 대한 대극적인 자리매김을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시냅스가 인격을 만든다"[주18]고 말씀하셨습니다. 뇌는 아렌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논리적 추리력으로 환원될 수 없고, 오히려 감정과 정서의 기관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영문 논문 「역사의 뇌 또는 인류세의 멘탈리티」[주19]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인류세' 담론을 인구에 회자시키는 데 있어서 디페쉬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의 공로가 크다는 점, 그리고 그가 인간을 '종'으로서의 지질학적 힘으로 파악한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로 다니엘 L. 스마일Daniel Lord Smail의 『딥 히스토리와 뇌』[주20]에서의 어딕션addiction 이론에 근거하여 차크라바르티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어딕션도 뇌와 관련된 작용이며, 오늘날 만연한, 책임을 회피하고 상황과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나 중립성 역시 멘탈의 문제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인류세의 위기적 상황은 신석기 시대부터 쌓여온 어딕션에 의해 초래되었습니다. 환경에 대한 오늘날의 공식적인 담론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의식의 담론'이며, 그 담론에서 책임을 역설한다고 해서 그 주장이 공유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의 대답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요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어딕션을 획득하는 것만이 오래된 어딕션을 무찌를 수 있다. 에콜로지[생태학]는 새로운 리비도적 에코노미[경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아요. 환경 보전을 가능하게 하는 어딕션을 획득하면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이해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감히 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현재의 어딕션을 버리고 어떻게 새로운 어딕션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2) 또한, 뇌는 자연과 역사를, 생물학적 것과 문화적인 것을 서로에게 적응시키는 것이며 매개자로서 작동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뇌가 항상 조화로운 매개자일 수 있을까요? 뇌의 가소성 또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폭발과 파괴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요? 술과 담배에 대한 어딕션뿐만 아니라 편리성이나 겉치레의 풍요로움, 속도에 대한 어딕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가소성은 유연성이나 적응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말라부 씨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제가 그녀와 공유하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나의 뇌가 자본주의를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라부 씨의 텍스트에서 읽을 수 있는 희망을 공유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묻고 싶습니다.

[주17] Hannah Arendt, Human Condi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人間の条件』志水速雄 訳, ちくま学芸文庫、1994年。
[주18] Joseph LeDoux, Synaptic Self: How Our Brains Become Who We Are, New York, NY, Penguin Books, 2003.
[주19] Catherine Malabou, « The Brain of History, or, The Mentality of the Anthropocene »,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16, no 1, January 2017, p. 39-53.
[주20] Daniel Lord Smail, On Deep History and the Brai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7.

 

카트린 말라부의 답변 

감사합니다, 발표는 눈부실 정도로 훌륭합니다. 어떻게든 대답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제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조금 우회해서 대답하겠습니다. 당신은 제 작업을 데리다와의 연속성에서 파악하려고 하십니다. 저와 데리다의 관계에 관한 질문으로 인식했습니다. 많은 동료와 친구들은 제가 데리다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어요. 2000년경부터 뇌의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제가 데리다의 탈구축의 계승을 '배신'했다고 간주되었습니다. 은혜를 망각한 불성실한 태도로 새로운 경작지를 개척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다시 읽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데리다가 푸코에게 바친 논고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의 첫머리에는 자신의 스승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언젠가 다시 읽어보고 싶은 글입니다.

확실히 저는 데리다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뇌과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데리다에 대한 배신이나 이별이 아니라 '차연'이 저에게 가져다 준 효과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제 작업은 차연의 탐구와 공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여준 것은 [데리다의] 차연과의 관계에서 [제 나름의] 차연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데리다의 독해를 통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입니다. 데리다에 대해 응답하는 동안 '차연' 개념 자체가 변했습니다. 제가 바뀐 것이 아니라 '차연' 개념이 바뀐 것입니다. 에크리튀르나 언어의 엄정한 사고에서 차연이 이동하여 ── 이것이 바로 '언어의 기회'라고 부를 수 있는 발명일 것입니다 ── 가소성의 물음으로 향했습니다. 즉, 형태의 변화, 뇌에서의 상징적인 것의 변화 쪽으로 차연은 언어와 형태를 변환한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인데, 제가 보기에 뇌는 아렌트가 말하는 논리성이나 인지가 아닙니다. 뇌과학 저술에서 배운 것인데, 뇌의 작용은 논리적 사고뿐만 아니라 차이를 산출하는 모든 패러다임과 작업에 관여합니다. 의미의 가소적인 산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미와 감각의 양면에 관련된 뇌는 인간적이고 동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뇌는 논리적 사고에 국한되지 않고 감정, 감각, 신체, 의미와 관련되어 있으며, 바로 실존의 총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뇌는 어딕션(중독)과 관련된 장[소]입니다. 뇌의 가소성에 대한 초기 연구 중 하나는 흡연 중독이었습니다. 장-피에르 샹주Jean‐Pierre Changeux는 니코틴에 관한 연구도 했습니다. 뇌가 중독을 일으키는 중추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문제는 에콜로지[생태학]와 관련이 있습니다. 에콜로지[생태학]의 중요한 쟁점은 오래된 중독을 어떻게 새로운 중독으로 치환할 것인가입니다. 새로운 중독에 대한 순응[적응]을 가져오는 것은 고압적이고 강제적인 방식도 아니고, 규범적인 방식도 아닙니다. 오늘날 새로운 중독을 발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에콜로지[생태학]의 관건입니다. 실현되기에는 거리가 먼 상황입니다. 프랑스의 에콜로지[생태주의] 운동은 이런 발명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강제적이고 규범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나키즘에 관한 다음 글에서는 에코노미(가정의 법)와 에콜로지[생태학]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에콜로지[생태학]는 더 열린 에코노미일 것입니다. 집의 관리라는 관념, 주인이나 통제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에콜로지[생태학]의 진정한 담론이 필요하고, 집의 관념을 넘어서는 담론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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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가소성과 도래할 세계사

鵜飼哲(一橋大学名誉教授)

기회인지 위협인지, 그리고 어떤 성질의 그것들인지 불분명한 채, 어쨌든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유형의 만남에 충분히 '적응'하고 있는 것, 이미 너무 습관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가능성의 경험(우리는 더 이상 그것 없이 살 수 없습니다···)이 우리를 어떤 고찰로 이끌든, 이 기술적 장치 덕분에, 이토록 오랫동안 서로 소식이 끊긴 후에, 당신을 재회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세계사와 애도의 가소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것은 2005년이었습니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출발한 훌륭한 고찰과 그에 이은 활발한 토론을 저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와 오늘이라는] 이 두 날짜 동안, 당신의 작업은 경이롭게 진척되었고, 국제적인 사상 교류에서 당신의 존재감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제가 읽을 수 있었던 당신의 최신 텍스트 중 하나는 자가격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르몽드』에 발표된 마지막 푸코에 대한 짧고 매우 인상적인 고찰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서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공통의 친한 친구들, 마르그리트 데리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그리고 최근에는 장-뤽 낭시가 연달아 세상을 떠난 뒤라 이야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큰 슬픔 속에서 저는 2005년 당신의 강연 제목을 넘어뜨리고 뒤집어 놓고 거기에 두 가지 단어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애도의 가소성과 도래할 세계사(la plasticité du deuil et une histoire du monde à venir)」라는 식으로요.

개인적 또는 집단적인,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 모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 우리의 세계를 뒤흔든 온갖 종류의 재앙에 직면해, 하나의 말이 우리 눈앞에서, 어떤 종류의 보편적인 명령어가 되었습니다. 저는 '레질리언스[Resilience, 회복탄력성]'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제가 알기로는 이 관념의 출현에, 그 적용 범위가 물리학에서 신경생리학을 거쳐 심리학까지 점차 넓어지는 과정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온 우리 시대의 드문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저는 『우리의 뇌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몇 가지 지적을, 그리고 특히 『새로운 상처입은 사람들』의 이 주제를 다룬 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자에서 당신은 아마도 처음으로, 주의 깊고 비판적이며 열린 레질리언스의 철학적 규정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쟁점은, 제 생각에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고유한 기능 양태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 단어는 우리에게 번역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레질리언스는 단순히 '유연성' '탄력성' '전성展性'(부러지지 않고 구부러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힘, 발달하는 힘, 역경에 맞서는 힘, 쇼크에서 회복하는 힘'(일종의 생존하는=살아남는=연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다의성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일본어 단어를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다의성이 아마도 그 용법의 거의 한계가 없는 확장을 조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특정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레질리언트'라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종종 찬사를 하는 이런 평가가 오리엔탈리즘의 색채를 띠지 않은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일본이 그 케이스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레질리언스의 지정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거의 도처에서, 거의 강박적으로, 특히 정치적 영역에서, 팬데믹이든, 기후변화든, '테러리즘'이든, 혹은 일본이라면 지진이나 원전 사고든, 이 관념에 대한 호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당신의 통찰력에 감탄해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감탄을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단순한 물음을 당신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행성[지구]적인 위생 위기 이후 형성된 새로운 조건들을 고려하면서 가소성의 사고를 이른바 레질리언스와 레지스탕스 사이에서(최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사 「어디에도 있는 레질리언스, 어디에도 없는 레지스탕스(Résilience partout, résistance nulle part)」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의 방향을 재조정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둡고 평평한 예측의 모든 저편[너머]에 하나의 지평을 우리에게 열어주는, 그리고 '도래할 세계사'를, 이제 지배적인, 동의를 강요하는, 패권적인 우화가 된 레질리언트적인 인류의 이야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지금까지 없었던 '애도의 가소성'을 어떻게 발견 내지 발명해야 할까요? 『헤겔의 미래』 이후 당신의 모든 작업은 우리를 이 작업에 초대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카트린 말라부의 답변

훌륭한 텍스트에 감사합니다, 매우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돌아가신 공통의 친구를 떠올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1년 전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부고를 들었을 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잘 일어서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래서 애도의 문제는 저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레질리언스(복원성) 비판을 떠올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상처입은 자』에서는 레질리언스 비판을 전개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개념은 물질의 물리학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탄력성 있는 물질, 복원성 있는 물질, 가소성 있는 물질, 유연한 물질・・・. 흥미롭게도 물리학은 다양한 유형의 반응을 웅변적으로 말해줍니다. 일본에서도 알려져 있겠지만, 프랑스에서 레질리언스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는 보리스 실뤼르니크Boris Cyrulnik입니다. 그는 실제로 적절하게 이 개념을 사용하여 일부 사람들, 예를 들어 고아나 불우한 체험을 한 아이가 트라우마에 잘 적응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자기 구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여 레질리언스 이론을 확립했습니다. 트라우마를 자신 안에 통합하여 인격의 일부로 만드는 힘입니다. 문제는 레질리언스가 규범성의 담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습득해야 할 자질인 것 같아요. 겪은 트라우마를 완전히 망각하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자질입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만, 레질리언스는 규범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거대한 물음을 던져 주셨습니다. 어떻게 애도의 이론을 발명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우리가 다양한 카타스트로프를 경험하고 있는 이 작금의 상황에서, 레질리언스에 회수되지 않는 애도의 가소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거대한 물음에 대해 제 가설을 제시하겠습니다. 아나키즘에 관한 차기작으로,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을 넘어서』를 독해하고 있습니다. "쾌락 원칙의 피안"이란 말 그대로 아나키인가? 프로이트는 권력의 피안을 보려 하지 않고 삶의 편에 머무른 것은 아닐까? 최근, 정신분석의 나탈리 잘츠만의 『아나키적 프쉬케』(Psyché anarchiste, dir. Nathalie Zaltzman, P.U.F., 2011)를 만났습니다. 잘츠만에 따르면, 애도의 작업이란 죽음의 욕동의 힘을 그 자신에게 대항시키는 것입니다. 그 권력에 대항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나키적인 죽음의 충동에는 지배나 권력의 메커니즘을 해체하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물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애도의 작업을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애도의 사유는 상실의 통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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