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集「バタイユからナンシーへ」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 聞き手:澤田直
블랑쇼, 푸코, 데리다 같은 20세기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랑스의 사상가・작가 조르주 바타유.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열린 국제 심포지엄 「신화・공동체・허구 : 바타유에서 낭시로(神話・共同体・虚構 バタイユからナンシーへ)」에서 일본에 초대된,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 씨의 인터뷰(인터뷰어 : 澤田直)를 전해드립니다.( 『ふらんす』 , 2017년 8월호 초출)
사와다 나오(澤田直):장-뤽 낭시 씨는 이번[2017년]에 게이오대학의 초대로 「 신화・공동체・허구 : 바타유에서 낭시로(神話・共同体・虚構 バタイユからナンシーへ)」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이 기획과 관련된 질문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유는 칸트나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의 사유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서, 또 필립 라쿠-라바르트나 데리다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전개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러한 사상적인 스승이나 우정의 성좌 속에서 조르주 바타유는 어떤 의미와 위치를 차지할까요?
낭시:지금 몇몇 사상가의 이름을 거론했지만, 바타유에 관해서는 칸트나 헤겔, 하이데거의 경우처럼 중심적으로 논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단행본monographic 작업은 하지 않았고, 이번 강연은 이른바 예외입니다. 하지만 바타유에 대한 관심은 항상 있었습니다. 1982년도 수업에서 바타유에게서의 공동체의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택스트를 분석하고 바타유가 어떤 형태로 공동성이나 공동체라는 것에 환멸을 느껴왔고, '연인들의 공동체'라는 생각을 제외하면 이 주제에서 떨어져 나가는지를 추적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무위의 공동체』에서는, 바타유에 대해 언급하고는 있지만, 오히려 블랑쇼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에게 문제는 공동체이지 바타유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 훨씬 전인 69년부터 70년대에 걸쳐, 라쿠-라바르트와 세미나를 했을 때 ---- 그것은 정말로 68년의 정신에 준거한=입각한 것으로, 아카데믹과는 거리가 먼, 학제적인 세미나였습니다 --- 가장 먼저 다룬 것이 바타유였습니다. 우리의 공통 관심사에 하이데거, 데리다, 그리고 바타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바타유는, 고전적인 의미의 철학자도 작가도 아니고, 동시에 그 둘 다였기 때문에 테마로서는 적합했습니다. 바타유의 『불가능한 것들』에서 「쥐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그 중 저를 강하게 쏘아붙인,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제 안에 남아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갑자기 B의 마음[심장]이 내 마음[심장] 안에 있었다'는 한 문장입니다.
B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그 뒤를 쫓고 있는 여성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타유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내 마음속에 바타유의 마음이 들어왔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말은 이른바 퍼포먼스적인 방식으로 제 인생에 작용했습니다. 저는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는데, 그것은 마치 이 말을 실행한 것 같았습니다.
사와다:확실히 이 문구는 당신이 심장 이식에 대해 말한 『침입자』에서 인용해도 좋을 것 같네요. 실제로는,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은데….
낭시:확실히 그렇습니다만,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침입자』에서는 오히려 임상적 차원에 머물고 싶었던, 그런 망상이나 사변과는 다른 수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타유의 문장 중 또 하나, « À la vérité, nous accédons »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에 우리는 도달한다"라는 의미이기도, "진실로, 우리는 도달한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후자의 경우에는 무엇에 도달하는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문구 모두 pénétration(침입)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첫 번째의 "갑자기, B의 마음[심장]이 내 마음[심장] 안에 있었다"는, 심장 이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장 이식은 다른 장기로 대체하는 것입니다만, 바타유의 글에서는, 어떤 마음에 다른 마음이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가장 친밀한 부분에 다른 것이 들어가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유명한 interior intime meo(나 자신보다도 나에게 더 친밀한)를 생각나게 합니다. 어느 쪽이 어느 쪽에 침입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갑작스런 침입 pénétration이 있을 수 있습니다.여기에 바로 sujet(주체) 문제의 근본이 있습니다. sujet 문제를 결코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곤란하게도 푸코가 subjectivation(주체화/예속화)이라는 것을 지적한 이래, sujet의 형성이나 정치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주체의 문제는 후퇴했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타유는 sujet에 대해 매우 예리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주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타유가 je '나'라고 하고 je '나'라고 쓸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바타유는 그것을 개념화, 주제화, 이론화하지 않고, 오히려 강렬한 감각으로 풀어냅니다.
사와다:바로 그것이 바타유가 말하는 expérience(체험/경험)의 지평입니다.
낭시:맞아요. 제가 바타유에 매력을 느낀 다른 측면은 에로티시즘이었는데요, 그건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바타유의 에로틱한 소설 자체에는 그다지 마음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웃음). 오히려 « je pense comme une fille enlève sa robe. (나는 창녀가 드레스를 벗듯이 생각한다) »(『내적 체험』)라는 말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나의 Une pensée dérobée( 「탈의하는 사고=옷을 벗는 사고」)라는 책의 제목은 거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너무 강렬했어요. 타자 앞에 놓인다는 의미에서, 벌거벗는다. 몸을 씻을 때도 알몸이 되는 것인데요, 그것은 도구적인 관계로, 목적이나 수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에서의 알몸임은 그러한 용구성=도구성과는 무관합니다. 사고가 탈의하고 벌거벗게 된다는 것은 주관적이지 않은 상태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타유와 저의 관계는 대략 이상과 같습니다.
사와다: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낭시 씨는 매우 다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나는 2013년에 출간한 『장-뤽 낭시 분유를 위한 에뛰드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 分有のためのエチュード』를 쓸 때 세 가지 기둥을 만들어 당신의 사상을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신화나 공동체 같은 독자적인 문제 설정에 의한 작업으로, 『나치 신화』와 『무위의 공동체』 등입니다. 둘째는 『이미지의 심층에서』 등의 예술론, 셋째는 기독교의 탈구축입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출판되고 있습니다. 최신간 Sexistence(2017)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요? sexe(성)와 existence(존재)로 이루어진 합성어이기 때문에 '성존(性存)'이라고나 할까요? 그 밖에도 문학론과 시적 택스트를 모은 Demande(「요청」, 2015), 『하이데거의 평범함』(2014) 등이 있습니다만, 현재 관심의 중심은 어떤 것인지, 요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낭시:Sexistence에 관해 말하면, 우선은 pulsion(충동·욕동)이라는 말이 중심에 있습니다. 에로스적인 것에 접근할 때,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큰 문제로서 부상했습니다. 전에 신체론을 [논]할 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는,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향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요, 섹스의 경우도, 지금까지의 담론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담론을 사용할 필요성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약간 미봉책이긴 하지만 문학작품에서 많은 인용을 했습니다. 더 많이 인용했더라면 거의 에로틱 문학 총서가 되어버렸을 정도입니다(웃음). 하지만 목적은 그런 선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 사고가 작가들, 예를 들면 헨리 밀러나 한스 지슐러의 작품 속으로 침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충동・욕동이라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무엇인가에 이끌려가는[추동되는] 것인데요,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도 나왔던 바타유적인 의미의 '체험, 경험'입니다. 사고의 경험, 사고로서의 경험입니다. 요즘 하이데거가 말하는 '철학의 종언', '세계에 관한 구상'이라는 의미의 '철학의 종언', 혹은 '사유의 사명', 이런 것이 점점 더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이데거의 『검은 노트』를 읽으면서 철학이 더 강하고 활발한 다양한 사고에 둘러싸여 있음을 새삼 느끼고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바타유가 생각한 것처럼 담론에 의해서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로부터 곧바로 알 수 있는 귀결이 무엇인가 하면, 현재로서는 도덕을 넘어선 정치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이를 파고들면 결국 가능한 철학은 거의 분석 철학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언어나 표현의 유효성만을 묻는 그런 철학만이 가능한 것인데, 그것은 현황에 대한 유효한 반응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접근법에 의해 시작했습니다만, 그러나 포에지poesie에는 우리를 사로잡는 위험한 측면도 있습니다. 분석해야 할 부분을 형식의 쾌락이나 유혹으로 바꿔버립니다. 실제로 우리 세대, 라쿠-라바르트나 장-크리스토프 바이이는 이런 문학의 유혹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으며, 바타유의 '포에지의(에 대한) 증오'라는 말이 바로 포에지의 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이이가 최근 발표한 『포에지의 확장ポエジーの拡張』은 바로 포에지이 필요성과 포에지에 몸을 맡겨서는[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양의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다른 모티프는 앞서도 말했듯이 '욕동・충동'입니다. 저는 섹스에 대해 생각하면서, 종종 프로이트를 생각했습니다. 왜 프로이트가 있었을까를 여러 번 자문했습니다. 프로이트가 '성'의 문제를 발견했다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19세기 전체가 그 문제에 씨름해 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것은 '성'의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욕동'입니다.
책 속에서는 이 문제를 더 이상 전개하지 못했지만, pulsion이라는 모티프는 칸트 이래, 항상 철학의 중요한 복류[伏流 , 지하수맥]였습니다. 칸트에서도 « Trieb »라는 것이 중요한 단어로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 봐서 잘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이 독일어의 « Trieb »라는 단어는 그 동사형 « treiben »도 포함해 다른 언어에는 볼 수 없는 진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활용되지 않았고 의식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을 종횡으로 활용한 것이 프로이트입니다. 프로이트에 관해서는 무의식이 특히 평가받는데요, 충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주목한 것은 『정신분석의 계보학』을 쓴 미셸 앙리인데요, 그의 경우는 이론적인 평면에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제가 Sexistence에서 하려고 한 것은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프랑스어에는 라틴어의 impetus(돌진, 충동)에서 유래한 impétueux(격렬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것에 가까운 것으로, 사고란 바로 이런 충동・욕동 같은 것입니다.
사와다:이것도 또한 아까 말씀드린 사고의 알몸성과 관련되어 있네요.
낭시:사고는 사고의 한계가지 가야 합니다. 그리고 사고의 한계를 절달하는 것인데요, 그것은 위험인 동시에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거기서 무엇인가가 만들어지는 순간, 그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와다:세 번째 질문입니다. 바타유에게 종교나 증여는 낭시 씨의 사유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타유에게 모스나 뒤르켐이라는 프랑스 사회 사상의 배경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낭시 씨의 경우, 종교의 문제는 다른 형태로 접근되고 있으며, 오히려 하이데거나 데리다 노선의 속에서 mondialatinisation(세계 라틴화)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종교의 문제는 프랑스 공화국의 특성으로서 종종 '라이시테' laïcité라는 것이 강조되는데, 이 특수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 공동체의 문제는 프랑스 국내에서의 communautarisme (공동체지상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배외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한 닫힌 공동체라는, 이중의 배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낭시:확실히 최근의 정체성 문제가 거의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전지구화에 의해 야기된 정체성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에 관해서 말하자면 공화국이라는 관념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를 대체하는 것, 그 자신이 종교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미국의 예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조직할 것을 신에게 맹세하는 형태의 국가입니다. 실제로 독립선언은 특수한 형태로 표명되어 있지만, 거기서 미국 국민은 이른바 신권의 주권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아직도 영토가 문제가 되었을 때의 모습일 것입니다.
종교의 문제로 돌아가면, 요즘 종교의 반동성이라는 것은, 정말로 동정해야 할 것이며, 어떠한 혁신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예를 들어 가톨릭 단체가 시위 등의 행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의 재래입니다.
제가 종교계의 리더로 조금은 현황[현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은 달라이 라마와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뿐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사회에서 기성 종교 조직이 존속하고 의미를 계속 갖기 위해서는 세속화를 더욱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이 점은 사실 이미 꽤 오래 전에 개신교가 이해한 것이기도 합니다. 독일의 대학에는 신학부가 있습니다만, 거기서 연구되고 있는 것은 신의 본성 등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기독교적 메시지, 휴머니즘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그래도 무언가, 아마 esprit(정신)적인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esprit라는 말을 사용하기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데리다는 『정신에 대하여』라는 훌륭한 책을 썼고, 정신이나 그것과 관련된 말들이 많은 것을 추동해 왔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데리다는 마치 정신이라는 것을 정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 안에서, 더욱이 정신을 넘어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sprit라는 말은 초월이라고 할 경우 그것은 극복을 의미하지만, 또 초월자를 생각나게 합니다. esprit는 원래 souffle(숨)과 관련된 말입니다만, esprit라는 것도 결국 pénétration(침입), passage(통과)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이 물질과의 차이점입니다. 물질은 통과할 수 없고, 침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무엇인가에 의해 침입당하는 체험을 가집니다. 여기가 중요한 포인트죠.
위대한 종교에서는, 어떤 종류의 행동의 형식, 이 침입・통과할 수 없는 것의 침입・통과가 항상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신비주의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가 반드시 아편으로만 기능했던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역경에 시달리는 자의 한숨이요, 마음 없는 세계의 심정인 동시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다]"(『헤겔 법철학 비판 서론』)라고 말하고, 이것이 도처에서 인용되어 왔는데, 이 경우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정신이란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인간의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간의 가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종교적인 것의 회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떤 것도 회귀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무엇인가에 접근=도달합니다. 다만 접근함으로써 무언가를 획득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새로운 천국이나 새로운 구제를 가지고 있는[구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 혁신 등에 의해서,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이 바뀌어 갈 때에, 그 변화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고대에서, 매우 집권적인 새로운 조직이고, 유일한 법이 있고, 새로운 기술을 제어하고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 발전 속에서 사람들의 불안과 기대에 부응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입니다. 우리도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술성이 어디로 나아가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에 한계를 두어야 하는지 자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아복제 기술의 문제 등이 그렇습니다. 라이시테의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의는 결국 듣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끼리의 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공화국이라는 종교를 확립할 수 없었습니다. 시민 종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pulsion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같은 점을 마음에 그린 적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보통 사람'과는 달리 오성[지성]의 세계를 살고 있고, 자신들은 사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악순환이 있고, 라이시테의 문제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에서 누구나 철학을 배우는데, 거기에는 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비관주의자나 엘리트주의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회에는 어떤 종류의 담론이 있는데, 그것이 반드시 만인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도 살아 있어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합니다. 무엇이 철학자를 움직이게 하는지,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음악일 수도 있고 기술일 수도 있는데요, 무언가를 움직이게 하는 것, 바로 충동・욕동이 있다, 그러한 것을 깊이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17.04.14 게이오 인터내셔널 레지던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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