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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적 사고, 정세적 발언

유럽 문제로서의 팔레스타인 문제 : 가자의 제노사이드와 근대 500년의 식민주의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 오카 마리)

by 상겔스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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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제로서의 팔레스타인 문제 : 가자의 제노사이드와 근대 500년의 식민지주의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 오카 마리)

ヨーロッパ問題としてのパレスチナ問題――ガザのジェノサイドと近代500年の植民地主義 早稲田大学文学学術院教授・岡真理

2024年2月22日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 4개월 이상 계속된 공격으로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3만 명을 넘었다.

 교토 대학에서 13일, 자유와 평화를 위한 교토대의 뜻 있는 사람들의 모임( 京大有志の会) 등의 주최로 공개 세미나 「인문학의 죽음 : 가자의 제노사이드와 근대 500년의 유럽의 식민지주의( 人文学の死――ガザのジェノサイドと近代500年のヨーロッパの植民地主義)」가 개최되었다. 지난해 10월 7일부터 시작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파괴와 살육이 갈수록 격렬해지면서, 인문학의 시각에서 이 폭력의 역사적 근원에 접근했다. 온라인을 포함해 600여 명이 참여했다. 이번 호에서는, 오카 마리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에 의한 기조 강연 「유럽 문제로서의 팔레스타인 문제(ヨーロッパ問題としてのパレスチナ問題)」의 내용을 소개한다.

 

◇      ◇

 

오카 마리( 岡真理) 씨

 이 세미나는 최근 4개월 동안, 지금도 여전히 가자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스라엘에 의한 제노사이드(대량 살육), 도미사이드(대량 파괴)를, 이 폭력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해하는 것을 꾀한다.
 작년[2023년] 10월 7일, 가자 지구――대중매체에서는 '이슬람 조직 하마스' 혹은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 하마스'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가자 지구라고 설명하지만, 가자 지구는 1967년 이래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하에 있으며 2007년부터 16년 이상에 걸쳐 이스라엘에 의한 군사 봉쇄 아래에 놓여 있다――의 팔레스타인인 커맨더(전투원)에 의한 이스라엘 영내로의 월경[분리 장벽을 넘어선] 기습 공격이 있었고, 그 직후부터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끔찍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시작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제노사이드 연구 전문가가 "교과서에 실릴 만한", 즉 그림에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제노사이드라고 말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비롯해 수많은 제노사이드를 체험해 온 유엔 전문가들도 "전대미문"이라고 할 정도로 차원이 다른 가자에 대한 제노사이드 공격이 자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의 주류 언론, 기업 언론의 보도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문학 연구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하는 '커버링 이슬람', 즉 중동과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도함으로써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내용과 본질을 은폐하는 사례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전형적인 것은 '증오의 연쇄'라든가 '폭력의 연쇄'라는 말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문제의 기원――이스라엘의 폭력의 역사적 기원을 묻지 않고 넘어가기 위한 사기술이다.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는 복잡한, 매우 뒤얽혀 있는 역사가 있다"며 물을 흐리는[논점을 흐리는, 물타기하는] 것 역시 역사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한 방편이다.
 이스라엘의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인 유대인들..."이라는 주장도 이스라엘 국가에서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돼 왔는지에 대해 무지한 채 이스라엘의 주장이 그대로 유포되고 있으며, 심지어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적 사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을 추방한 것"을 분쟁의 역사로 설명하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무지에 기반한 보도가 이뤄지고 있다.
 보도하기 전에 문고판으로 600페이지에 달하는 슐로모 샌드(Shlomo Sand)의 저서 『유대인의 기원(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을 읽어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위키피디아에도 "4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주민의 마조리티(다수파)는 유대교도였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기독교인이 다수파가 되고, 아랍・이슬람에 정복된 후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의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진행되고, 10세기를 지날 무렵부터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지만, 역사를 통해 팔레스타인에는 유대교도가 줄곧 존재했다.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은 금지됐을 수도 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모든 유대인 주민이 추방됐다는 사실은 없다. 이런 초보적인 사실 확인조차 소홀히 한 채 TV나 신문 보도가 이뤄지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인이 불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2000년 전 이 열도에 거주했던 조몬인의 후예인 것처럼, 혹은 그 후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의 후예인 것처럼, 팔레스타인인들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있던 유대교도의 후예이다.

 

공격 시작으로부터 4개월 문제의 근원에 주목하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 남부 '한 유니스' 시가지(12일)

'한 유니스'의 위치

 지금, 가자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은 제노사이드나 다름없다. 공격 개시 129일째인 현재,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한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2만8340명이 넘는다. 이것은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이다. 실종자, 즉 시신이 아직 잔해 밑에 묻혀 있는 이들은 8000여 명이다. 실질적 사망자는 3만5,000명을 넘어섰다. 부상자는 6만7984명이다. 이 사상자들의 40%가 14세 이하 어린이들이다.
 230만 명이 있는 가자 주민 중 80%인 190만 명이 집을 잃고, 북부에서 쫓겨나고, 중부에서 쫓겨난 피난민들이 지금 이집트 국경의 도시 라파에 몰려들어 기아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이 이른바 '공격 관련 사망'에 의한 사망자들은 앞의 사망자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가자 주택의 60%가 완전히 잔해가 되거나 파손되었다. 현 단계에서 60만 명이 더는 돌아갈 집이 없다.
 지금, 가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그것은 인간 존재를 둘러싸고 우리가 길러온 모든 보편적 가치관에 반하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유린하는 것이다. 이 제노사이드를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그만두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제노사이드 자체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제노사이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미나는 이를 제기하고 널리 공유하여 우리 행동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기획되었다.
 지금, 일본의 각지에서 '지금 바로 정전을" "제노사이드 그만두라"라고 호소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교토에서도 매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시청 앞에 모여 부코지(仏光寺) 공원까지 시위를 벌이고 있다. 광역지방자치단체(都道府県)나 시읍면의 의회에서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하는 결의가 이루어졌고, 다양한 단체가 즉각적인 정전을 위해 일본 정부에 "헌법 전문의 이념에 입각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라"라고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매일 100여 명에서 2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자에서 살해되고 있다. 10분에 1명꼴로 아이가 살해되고 있다고도 한다. 한시라도 빨리 이 제노사이드를 그만두게 해야 한다. 그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지금 당장 정전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 중에는 "하마스의 테러는 용납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행위는 너무 지나치다", "제노사이드다", "발단이 무엇이든, 이런 짓은 당장 멈춰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참여하는 분들도 많지 않을까 싶다.
 한시라도 빨리 멈추기 위해, 이유야 어떻든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지금 당장 규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제노사이드 공격이 끝나더라도 문제의 근원이 해결되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 땅에는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즉각적인 정전, 제노사이드를 그만하라고 외치면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무엇을 실현하려는 것일까?
 그들의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노사이드가 끝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고, 그러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은 것은 팔레스타인이 평화로워지는 것,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과 자신들의 존재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고 인간답게, 자유롭게, 평등하게,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단순히 제노사이드를 끝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문제의 근원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이스라엘의 건국 인종청소와 살육 위에서 

 

가자의 주민을 남부로 몰아내면서 군사적 침공을 계속하는 이스라엘 군(9일)

 그렇다면 이 폭력의 기원,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를 생각하려 할 때, 기본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스라엘 국가가 정착민들에 의한 식민주의적 침략으로 원주민을 인종청소함으로써 건국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즉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국가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이 지배하는 전 영역――즉 1948년에 점령하여 현재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지역 및 1967년에 점령한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 및 가자지구에서 유대인 지상주의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식민지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주도하는 가자의 팔레스타인인 사령부에 의한 이스라엘 공격은 탈식민지화를 요구하는 이들의 저항으로 자리매김된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 라시드 할리디(콜롬비아대 교수)는 10월 7일 직후의 강연회에서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역사적인 탈식민지화를 요구하는 해방군도 폭력을 행사해 왔다는 점이다. 알제리, 아일랜드, 베트남의 민족해방투쟁도 마찬가지다.
 다른 하나는, 이 식민지 전쟁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뿐만 아니라, 세계의 메트로폴(대도시)도 역시 전장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공격 직후에 행한 것이다.
 즉, 10월 7일에 일어난 일에 대해, 없는 일도 꾸며내어 세계를 향해 선전해 댄다. 10월 7일의 기습공격에서 팔레스타인 전투원들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을 수도 있으나, 셰계 대도시를 무대로 전개되는 이 정보전에서는 이스라엘 정부의 발표가 검증되지 않은 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공유됐고, 이후의 논의도 "하마스에 의한 잔인한 테러 운운"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는 언론 상황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가자의 제노사이드, 도미사이드라는 형태로 현상하고 있는 폭력을, 올바르고 적절히 이해하기――즉,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해법"을 도출하기――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가자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착민 식민주의에 의해 건국되어 유대인 지상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아파르트헤이트를 구축한 국가에 대해 선주민들이 그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는 탈식민지화의 싸움이자 식민지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행사하고 있는 폭력은 일본도 포함한 세계의 식민주의 국가가 그 식민지 지배의 역사에서 자유나 독립을 요구하는 피식민자의 저항에 대해 행사해 온 섬멸의 폭력이라는 것이다.
 또 가자에 대한 제노사이드와 병행해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대해서도 지금 제2차 인티파다 시기를 상회하는 규모의 공격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도, 이스라엘 국가와 그 국가national 이데올로기인 시오니즘 그 자체의 기획――요르단강부터 지중해까지의 땅을 점유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인종청소한다――라는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폭력을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정부의 발표, 미국 주류 언론의 보도, 그리고 일본 언론의 보도는 전적으로 이 제노사이드가 식민주의의 폭력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억압하고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10월 7일 이후 가자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정당화하기 위해 "10월 7일, 하마스가 아기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오븐에 태워 죽였다", "야외 음악제에서 집단 강간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미 이스라엘의 신문에서도 [날조라고] 보도된 바 있다. 하지만 이 날조된 거짓말로 인해 "하마스의 잔인한 테러"라는 허위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팔레스타인 측 전투원의 공격으로 민간인이 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 전쟁범죄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스라엘 정부가 발표하는 내용과는 크게 다르다. 그리고 지금 당초 1,400명으로 알려졌던 이스라엘 측 희생자가 1147명으로 하향 조정되었는데, 거기서 희생된 이스라엘 시민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는 조사하여 발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미 증언 등으로 밝혀졌지만, 현장에 출동한 이스라엘 치안부대가 인질과 자국 군인까지 모두 포격하거나 아파치 헬기에서 발사한 헬파이어 미사일로 차량이 통째로 파괴되어 죽는 등, 상당수의 유대계 시민들이 자국군의 공격으로 죽임을 당했다. 
 10월 7일 팔레스타인측의 공격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유대계 시민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하마스가 잔인한 방식으로 죽였다"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팔레스타인 측 전투원들이 죽인 실제 숫자도 이스라엘 정부가 밝히려 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 현재 실정이다. 
 이러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면서 이스라엘은 "이 테러에 대한 자위적인 싸움이다"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이는 실제로는 1948년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점진적 제노사이드――의 완수에 다름 아니다. 
 자세한 것은 『현대사상(現代思想)』 [2024년] 2월호의 팔레스타인 특집을 읽어보기 바란다. 이것이 필자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중동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기본 인식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한 연구 교육인가 : 인문학의 진가를 묻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앞두고 어떻게 이런 잔학한 짓을 할 수 있느냐고 인간에게  묻는 것은 위선적이다"라고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말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오히려, 그것이 도대체 어떤 시스템에 의해 가능해졌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이 세미나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시스템'이란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엔의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이 거부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수많은 국제법 위반도, 전쟁범죄도, 반인도적 범죄도 단 한 번도 심판받지 못했다. 이 "이스라엘 불처벌"이라는 국제사회의 '전통'이 21세기의 지금, 제노사이드를 가능케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80년 전의 전쟁의 전승국들이 이런 형태로 거부권을 갖고, 그래서 세계 대부분 국가의 의향을 무마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불의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이 세미나에서는 가자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무엇이 가능하게 하고 있는가를, 그러한 국제정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필자가 전공으로 하는 '인문학의 학지学知'라는 영역에서 생각하고 문제제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봉쇄된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규모 군사 공격은 과거 4차례 있었다. 2008년부터 09년에 걸친 최초의 공격, 세 번째인 2014년의 '51일간 전쟁'에서는, 나도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한 사람으로서 가자에서 일방적인 살육과 파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각지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정보를 발신해 왔는데, 이번에는, 시작부터 시간을 두지 않고, 그것이 과거의 공격과는 다른 차원의 제노사이드 공격이라는 사태를 앞에 두고, 내 안에 있던 것은,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아랍어 수업에서도 문학 수업에서도 지금 가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인문학적 의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랍어 수업이기 때문에, 또는 중동 문학 수업이기 때문에 아랍・중동 세계의 일부인 팔레스타인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왜 대학에서 영어 이외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필수적인지, 왜 문학이 세계에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배우는 것에 가치가 있는지, 그 '인문학'이라는 것의 의미를 감안할 때, 지금 가자,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전해야 한다. 그것의 의미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쓰든, 무엇을 말하든, 그런 인간의 말은 신용할 수 없다. 문학을 통해 교육과 연구를 하는 휴머니티를 자기 자신이 배신하게 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었다.
 어느 언어의 어느 나라의 문학이든, 어느 나라의 역사든, 철학이든, 인문학(휴머니티스)와 관련된다는 것은 그 전공 지역이나 언어를 넘어서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심 영역'의 바깥에서 : 현재도 계속되는 식민주의

 2021년 6월, 나는 나고야의 출입국관리소에서 강제 수용 중 사망한 위슈마 산다마리Wishma Sandamali  씨의 고별식에 참석했다. 우리 사회가 죽인――그런 의미에서 나 또한 그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위슈마 씨의 모습을 나 자신의 기억에 새기기 위해서다. 유럽에서 유대인의 죽음과 위슈마 씨의 죽음은 연결돼 있다.
 나치 독일 시절, 나치 지배 지역에서 유대인이라는 딱지는 그렇게 불린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 100년 전 일본에서의 그것은 '조선인'이었다. 누군가를 조선인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그것은 살인의 라이선스[면죄부]가 됐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그것은 '테러리스트'였다.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는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국제법도 국내법도 적용되지 않는 초법적인 장소에 놓였다.
 지금 가자와 관련해서 그것은 '하마스'다. '하마스가...'라고만 하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그리고 지금, 일본에서는 비정규 체류 외국인이 이에 해당한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된 사들이다.
 나에게 인문학이란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이런 시각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나 문학, 철학이나 인류학, 기타 인문학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그런 관점으로 이 세계의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다.
 참정권을 가진 일본 국가의 구성원인 나는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의 제노사이드와, 그 그늘에서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진행되는 끔찍한 인종청소의 폭력에 대해 비판할 때, 이 일본이란 나라가 식민지 전쟁 속에서 중국에서, 조선에서, 대만에서 탈식민지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끔찍한 폭력으로 섬멸해 왔다는 것에 대한 비판 없이, 혹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피식민자의 감시 관리에서 기원한 출입국관리법에 의해 지금 비정규 체류자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매년처럼 출입국관리소의 수용시설에서 사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 없이 이스라엘을 비판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 폭격을 상회한다고 일컬어지는 가자에 대한 폭격을 앞두고 일본인들이 상기하는 것이 게르니카나 히로시마・나가사키, 혹은 도쿄 대공습뿐이라면, 우리는 이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에 의한 대량 살육, 하룻밤 사이에 히로시마의 1945년 12월 말까지의 피폭사망에 필적하는[버금가는] 시민을 죽인 도쿄 대공습에 앞서 일본이 패전까지 중국의 충칭에 대한 전략적 도시폭격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역사 수업에서 배우고 있을까? '식민주의'라는 말도, 일본이 과거 대만과 조선을 식민지배했다는 것도 분명 역사 수업에서 배우지만, 그것은 단순한 '말'에 불과한 것 아닐까. 식민지 지배의 폭력이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폭력이었는지를 우리는 배우고 있을까? 게르니카는 알고 있어도, 충칭의 폭격에 대해 알고 있을까?
 10월 7일의 팔레스타인 측 공격에서 민간인 살해와 납치라는 게 얘기되지만, 팔레스타인을 인종청소하여 난민이 된 사람들을 가자에 가두고, 그들이 살던 마을을 파괴하고, 그 터에 만든 키부츠(생활 공동체)――그 실체는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 군의 지상 공격에 대비한 전초 기지로 사용되는 준군사시설이며, 주민 남성들은 군사 훈련을 받고 무장하며, 언제라도 전화 한 통이면 1시간 후에는 예비역으로 전투에 종사한다는 전제 하에 생활하고 있다――의 식민자를, 전투원과 구별되는 민간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해, 예를 들어 과거에 만주에 정착한 일본인이 만주에서 수행한 침략적 역할을 생각한다면, 나는 윤리적인 주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을 주는 것이 인문학이고, 대학에서 인문학 연구・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은 그런 을 세계를 바라보는 그런 역사적, 동시대적 관점를 젊은이들에게 길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역사적 관점 없이는 아시아의 평화도, 세계의 평화도 없다.
 가자의 제노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이나 중동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연구나 국제정치 전문가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와나미 서점의 『세계(世界)』 신년호에서 고마고메 다케시(駒込武) 씨가 대만과 팔레스타인을 연결한 논문을 썼는데, 그러한 관점을 제시해 주었기에, 나도 같은 호에 기고한 논고에서, 일본의 대만 지배가 없었다면 '기리샤 사건(霧社事件, 우서사건)'이 없었을 것이듯이, 이스라엘의 점령・봉쇄가 없었다면 10월 7일의 하마스 주도의 공격도 없고, 원래 하마스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영화 『관심영역』(조너선 글레이저 Jonathan Glazer  감독)

 거꾸로 말하면, 일본의 인문학에 종사하는 머조리티[다수자]에게 가자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신의 '관심 영역'과 어디까지나 접속되지 않은 채로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자 스스로가 자신의 학문에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관심영역'이란 올해 5월 하순 일본에서도 개봉 예정인 영화의 제목이다.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저택에서 살고 있는 소장 일가의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가자의 제노사이드가 진행 중인 지금,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그것을 목격하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이 있다. 그 당시 아우슈비츠의 대량살육에 희생된 사람들의 재산과 금니, 머리카락 등이 자원으로 활용되었던 것처럼, 예를 들면 도쿄 올림픽에서는 점령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권 박탈과 억압 위에 축적된 이스라엘의 보안 기술이 활용되었다.
 이토추(伊藤忠)사와 일본 에어크래프트사의 이스라엘 군사기업인 엘비트 시스템즈사와의 계약이 그 동안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여 활동함으로써 정지에 몰렸지만, 지금까지는 그러한 비즈니스를 통해 일본 기업이 수익을 올리고, 그 혜택을 일본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적지 않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 피수용자들이 처한――프리모 레비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이 인간인가"라는――상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치 그런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안락과 인권을 누리는 사람들. 이 '관심 영역'이라는 영화에서 독일인 가족과 가자의 제노사이드를 '먼 중동의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들을 아무래도 겹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연해서 생각하면, 이것은 과거 식민지배를 하던 시대, 나아가 현재의 세계적인 노예제 시스템 아래에서, 그것은 비유적으로 '벽 하나'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보고 싶지 않은 사실을 보지 않음으로써 안전과 평화와 물질적 풍요와 인권을 누리고 있는, 이 글로벌 노스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는 벽 하나,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편 가자 지구에서 76년 전 자신들이 인종청소를 하고 몰아넣은 사람들이 16년 이상 계속되는 봉쇄 속에서 "이것은 살아 있는 죽음" 같은 삶을 강요당하고, 10월 7일 이후에는 4개월 만에 1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완전 봉쇄로 인해 라파에서는 기아와 전염병으로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는 그야말로 '멸절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 있다는, 보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현실에 눈을 기울이지 않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 아닐까.

 

팔레스타인 문제 : 그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가자의 제노사이드라는 형태로 발생하고 있는 폭력은 팔레스타인 문제라고 일컬어지는 문제의 현상적 양상 중 하나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은 앞서 언급했듯이 1948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표방하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인종청소하는 형태로 건국된 데 있다. 이 난민화와 고국 상실을 아랍어로 '나크바(대파국)'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만들게 된 것일까? 그것은 19세기 말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만들자는 운동――정치적 시오니즘――이 유럽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반유대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란 무엇인가? 영어로는 Antisemitism이라고 한다. "유대교도는 유럽・아라비아 인종이 아니라 중동에 있는 아랍인과 같은 셈족이다"라고 하는 인종주의다. 유럽인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것이고,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셈족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인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이비과학이고, 게다가 '샘족'이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에 유대교도를 다른 인종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인종주의다.
 그렇다면 유럽에서의 '반셈주의'의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먼저 역사적인 유럽・기독교 사회에서의 유대인 차별이 있다. 그것이 근대에 와서 인종, 즉 '피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 인종이라는 개념은 유럽의 식민주의가 발명한 것이며, 식민주의의 폭력을 뒷받침하는 이론의 핵심이 되었다.
 근대에서의 반샘주의는 그 역사적 연원을 유럽・기독교 사회에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근대 유럽의 글로벌 식민주의가 만들어낸 인종 개념과 결부되어 탄생한 것이다. 그 근대의 반샘주의에 대한 리액션(반응)으로 시오니즘 운동이 생겨났다.
 이 시오니즘을 지원한 것이 대영제국이다. 거기에는 대영제국의 제국주의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동시에 대영제국의 반유대주의가 있다. 왜냐하면 국내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나라를 갖게 되고. [대영제국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7년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하고 그곳에 유럽에서 난민이 되어 있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대인 국가를 만들기로 결의한다. 왜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하여 그곳에 유대인의 나라를 만드는가? 그것도 유럽의 유대인 나라를.
 예를 들어 알제리 독립 당시에도 8년에 걸친 가열찬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양측에서 집단학살이 발생했다. 이때 알제리를 둘로 쪼개 프랑스인의 나라와 알제리인의 나라를 만드는 해결책이 가능했을까? 왜 팔레스타인에 관해 그런 해결책이 유엔에서 제시되었는가 하면, 당시 분할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반샘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들은 유럽인이 아니라 원래 팔레스타인에 있던 자들이다"라는 인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는 철두철미하게 유럽에 그 문제의 기원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유럽・기독교 사회의 문제이며, 근현대에서는 글로벌하게 식민주의를 전개한 유럽의 문제이다. 그 식민주의가 인간을 인종으로 나누고 거기에 우열을 붙여 차별을 합리화하는 인종주의를 낳았고, 그것이 팔레스타인의 식민지 지배를 낳았고,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국가 건설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전후, 특히 1970년대 이후, 유대인의 비극으로서의 홀로코스트가 특권화, 예외화되어, 오로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그것을 청산하여 팔레스타인 점령의 고정화, 영속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전후에도 여전히 탈식민지화가 완료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식민주의의 폭력이 계속 행사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가자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G7의 대응을 보더라도 이들 국가가 식민주의 카르텔이라는 것을 이번 가자의 제노사이드는 밝히고 있다.
 서양이란, 한편으로 보편적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계를 식민지 지배하고, 지금도 그 구조에 입각한 차별, 수탈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 모순을 모순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인종주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아도르노(독일 철학자)의 말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이 야만인가 아닌가라는 틀에서만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 이전에는 어떠한가? 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도르노도 묻지 않았고, 아도르노의 말을 접한 사람들도 묻지 않았다.
 근대의 학지学知 속에 이 인종주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가자의 제노사이드가 일본의 인문학 연구자에게 남의 일이라면, 그것은 이 인종주의 때문이 아닐까. 역사적, 동시대적 식민주의의 폭력을 '남의 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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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카 마리(岡真理)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 교토대학 명예교수. 1960년 생. 도쿄외국어대학 아랍어과 졸업, 동대학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이집트 카이로대학 유학, 모로코주재 일본대사관 전문조사관, 교토대학대학원 인간・환경학 연구과 교소를 거쳐 현직. 전공은 현대아랍문학, 팔레스타인문제. 저서로 『대추야자나무 그늘에서(棗椰子の木陰で)』(青土社), 『아랍, 기도로서의 문학(アラブ、祈りとしての文学)』, 『가자에 지하철이 달리는 날(ガザに地下鉄が走る日)』(이상, みすず書房), 『가자란 무엇인가(ガザとは何か)』(大和書房), 공역서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슬람 보도(イスラム報道)』(みすず書房), 사라 로이의 『홀로코스트에서 가자로(ホロコーストからガザへ)』(青土社)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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