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시작’ 개념 : 『혁명론』을 중심으로 (2)
ハンナ・アーレントにおける「はじまり」の概念
― 著書『革命について』を中心に―
마츠모토 토모하루(松本 智治, 日本大学大学院総合社会情報研究科)
http://atlantic2.gssc.nihon-u.ac.jp/kiyou/pdf13/13-227-238-Matsumoto.pdf
Ⅱ. 『혁명론』의 성립과 주요 개념
1. 『혁명론』 집필의 경위
『혁명론』(On Revolution, 1963)의 영문 초판이 출판된 것은 1963년, 아렌트가 57살이었을 때다. 서두의 감사의 말(Acknowledgments)에 따르면, 이 ‘혁명에 대하여’라는 테마는 1959년 봄, 「미국 문명 특별 프로그램」이 주최하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행해진 “미국과 혁명 정신”에 관한 세미나에 의해 아렌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주1]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말해지고 있는 ‘혁명’, ‘자유의 창설’, ‘시작’과 같은 개념에 대한 관심은 이 책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게 아니다.
[주1] OR, Acknowledgments. 일본어판, 「감사의 말(感謝のことば」, 9쪽.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1년,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을 출판하고, 일약 학계와 언론계에 데뷔했던 아렌트는, 그 후에 나치즘과는 다른 전체주의의 해명에 매달린다.[주2] 그게 바로 스탈린주의를 산출한 맑스주의(특히 볼셰비즘)의 해명이다. “맑스주의의 전체주의적 요소(Totalitarian Elements of Marxism)”라고 명명된 그 연구는 9만개의 단어에 미치는 대작이 된다고 아렌트는 생각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당초에 구상했던 것처럼 하나로 정리되지는 못했다.[주3] 왜냐하면 헤겔 및 맑스의 ‘노동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당연하게도 유럽에서의 인간관 전체의 회복을 달성해야만 하는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주2] 이른바 ‘스탈린비판’(1956년) 이전에, 소비에트 맑스주의, 특히 볼셰비즘과 전체주의 사이의 문제점을 아렌트가 충분히 의식했는가는 필자도 일정한 의문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아렌트는 1952년 겨울 무렵에 제출한 구겐하임재단연구소 조성금에 대한 신청서에서, 이 ‘맑스주의의 전체주의적 요소Project : Totalitarian Elements of Marxism’라고 명명한 연구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체주의의 기원』의 가장 중대한 결함은, 볼셰비즘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에 관한 충분한 역사적 및 개념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누락은 숙려deliberate 위의 것이었다. 결국 전체주의적 형태의 운동이나 정체(政体)로 결정화하는 그 밖의 모든 요소는 유럽의 전통적인 사회적 정치적 틀이 붕괴되었던 때와 장소에서만 출현하는 서구의 역사의 지하의 조류subterranean currents로 그 근원을 더듬어갈 수 있다.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범민족운동(汎化運動, pan-movements)의 종족적 내셔널리즘과 반유대주의는 서구의 위대한 정치적 철학적 전통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전체주의의 충격적 신기함, 즉 그 통치의 이데올로기와 방법이 전혀 선례가 없고, 또한 그 주의신조가 통상의 역사적 용어에 의한 적절한 설명을 넘어선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요소에만 너무 무게를 두면 쉽게 간과된다. 그 요소란 배후에 뛰어난 전통을 갖고, 그 비판적 검토는 서구의 정치철학의 주요한 교의the chief tenets의 비판을 요구하는 요소 ― 맑스주의이다.”(Elisabeth Young-Bruehl, HANNAH ARENDT For Love of the World,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and London. 1982, p.276, p.516(Note 26). 일본어판 : 荒川幾男·原一子·本間直子·宮内寿子 옮김, 『한나 아렌트 전(ハンナ・アーレント伝)』, 晶文社, 1999년, 374-375쪽, 657쪽 주 26).
즉, 전체주의적 운동의 모든 요소는 유럽의 전통적인 사회적 정치적 틀이 붕괴한 곳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배후에 뛰어난 전통을 갖고, 그 비판적 검토는 서구의 정치철학의 주요한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는 볼셰비즘 및 맑스주의의 역사적 고찰에 관해 과감히 ‘결락’시켰던 것이며, 이제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맑스주의의 연구에 달려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서술, 그리고 아렌트의 맑스주의 연구로부터 결과적으로 생겨나게 됐던 주저인 『인간의 조건』에서의, ‘노동하는 인간상’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여러 모로 생각해 보면, 아렌트는 ‘스탈린비판’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의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는 다른, 보다 깊은 수준에서, 스탈린 비판 이전부터 볼셰비즘의 문제점에 관해 고찰을 심화시켰다고 생각된다.
또한 서구에서의 최신의 아렌트 연구집성인 『아렌트 길라잡이 : 생애·저작·영향』(Arendt Handbuch: Leben-Werk-Wirkung, herausgegeben von Wolfgang Heuer, Bernd Heiter und Stefanie Rosenmüller, Metzler, Stuttgart/Weimar, 2011, S.44-45.)에서도 제롬 콘(Jerome Kohn)이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다.
[주3] 미국의 의회도서관에 소장된 이 연구의 단편은 사후에 세계로 나와 일본에서 佐藤和夫 편, 아렌트 연구회 옮김, 『칼 맑스와 서구정치사상의 전통(カール・マルクスと西欧政治思想の伝統)』(大月書店, 2002년)으로 출판됐다.
그렇지만 그 문제의식 위에 그녀의 빼어난 정치사상의 저작이 차례차례 생겨나게 되었다. ‘노동하는 동물’이라는 맑스주의 인간관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토대로 한 주저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 맑스와 유럽의 위대한 전통과의 관계를 논의에 집어넣은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 1961, 확장판은 1968), 그리고 맑스주의의 역사적 분석을 위해 모아둔 자료는 이 『혁명론』의 저술이 사용되었던 것이다.[주4]
[주4] Elisabeth Young-Bruehl, HANNAH ARENDT For Love of the World, pp.276-279. 일본어판 374-378쪽.
나아가 『혁명론』은 이런 아렌트의 일련의 서구정치사상 연구, 그리고 전체주의 연구로부터 생겨난 작품인 동시에, 아이히만 재판의 방청(그 성과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 확장판 1965)으로 결실을 맺었다)이나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유대인 지식인으로서 취했던 자세와도 그 문제의식은 공통되어 있다. 아렌트는 이 재판의 평가를 둘러싸고 대립했던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에게 보낸 편지에서 “… 이 문제에 관한 제 생각을 표명했던, 혁명에 관한 제 책의 2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주5]라고 말했다. 시오니스트인 쿠르트 블루멘펠트(Kurt Blumenfeld)를 젊었을 적부터 존경했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시오니즘에 대한 공감은 충분히 가지면서도 반유대주의를 뒤집은 것에 불과한 무리가 많은 이스라엘 건국이나 아이히만 재판의 행방은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주5] 야노 쿠미코(矢野久美子), 「정치적 사고‘의 <시작>을 둘러싸고(「政治的思考」の<始まり>をめぐって」, 『현대사상(現代思想)』, 제25권 제8호, 1997년, 214쪽.
여기서 근대에서 이상적인 공화정의 수립에 성공한 미국 혁명 ― 그것은 유럽으로부터 목숨 때문에 탈출하여 10년 동안 국적이 없는 ‘부평초’ 상태였던 아렌트 자신을 시민으로서 받아들였던 미국이라는 사회가 성립했던 뿌리이기도 하다 ― 의 실상을 분명히 하는 것은, 전후 유대인 사회가 새로운 공적 영역과 새로운 시작을 형성하는 것에 공헌했다는 의도, 그리고 후술하는 ‘공적 정신’이라는 혁명의 보물을 잃은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도도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추측된다. 『혁명론』은 이런 배경 아래에서 성립한 저작이다.
2. 전체의 개괄
『혁명론』은 서두의 “감사의 말”에서 시작해, 「서장 : 전쟁과 혁명」부터 「6장. 혁명적 전통과 잃어버린 보물」까지 총 7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서장. 전쟁과 혁명War and Revolution
1장. 혁명의 의미The Meaning of Revolution
2장. 사회문제The Social Question
3장. 행복의 추구The Pursuit of Happiness
4장. 창설(1) : 자유의 구성Foundation I: Constitutio Libertatis
5장. 창설(2) : 시대의 신질서Foundation II: Novus Ordo Saeclorum
6장. 혁명적 전통과 그 잃어버린 보물The Revolutionary Tradition and Its Lost Treasure
그렇다면 이 책의 논점을 논하기 전에 여기서 각 장의 내용을 먼저 확인해 두자.
서론에서는 “전쟁과 혁명이 20세기의 양상을 모양지었다”[주6]고 하는, 유명한 레닌의 지적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둘의 공통분모인 ‘폭력(violence)’의 문제를 논하면서 그로부터 전쟁과 혁명이 ‘정치의 영역 바깥’에서 일어났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자연상태’라고 명명된 전-정치상태”[주7]를 상기시키는 것인데, 여기서 혁명이 “그 후에 이어진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전혀 메울 수 없는 균열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시작(a beginning)의 존재”[주8]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즉, 혁명은 폭력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는 전쟁과 마찬가지로 자연상태, 전-정치상태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후에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시간을 나누는 ‘시작’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전쟁보다도 한층 더 깊은 문제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주6] OR, p.1. 일본어판 11쪽.
[주7] OR, p.9. 일본어판 23쪽.
[주8] OR, p.10. 일본어판 24쪽.
나아가 아렌트는 『구약성서』에서의 ‘아벨의 카인 살해’와 로마 창설 신화에 있는 ‘로물루스(Romulus)의 레무스(Remus) 살해’를 다룬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의 시작과 폭력의 문제(그것은 전-정치상태로서의 자연상태이다)를 “시작[태초]에 범죄가 있으니”라고 하는, 완전히 부정적인 말로 표현한다. 이것은 역사상 시작을 가져오는 것이 폭력이나 범죄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독자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이 책의 나중 부분에서 이 “시작의 아포리아(the perplexities of beginning)”를 어떻게 미국 혁명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해결했는가를 고찰하기 위한 중요한 복선이 되고 있다.
1장에서는 혁명이 근대에 고유한 현상이며, 또한 “직접적이고 필연적으로 우리를 시작의 문제에 직면하게 만드는 유일한 정치적 사건”[주9]이라고 기술한다. 즉, 혁명이란 포퓰리즘적 정치순화사관에서의 정변이나, 사물의 유전과 같은 단순한 ‘변화’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렌트는 근대적 혁명 개념이 ‘자유의 관념’과 떼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고 밝힌다. “(19세기 말의 두 개의 대혁명의) 줄거리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자유의 출현이었다.”고 말하며, “‘혁명적’이라는 말은 자유를 목적으로 한 혁명에만 사용할 수 있다”는 콩도르세의 말을 인용하고, 또한 프랑스 혁명이 공화정을 선언한 해를 첫해로 하는 혁명력(革命暦)을 제정했음을 거론하고,[주10] “근대의 혁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자유의 관념과 새로운 시작의 경험이 일치한다(coincide)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주11]
[주9] OR, p.11. 일본어판 27쪽.
[주10] 즉, 왕정이 폐지된 다음날 그레고리력 1792년 9월 22일이 프랑스 혁명력 원년(1년) 원일(1일)이 됐다.
[주11] OR, p.19. 일본어판 38쪽. 또한 필자가 ‘일치하다’고 번역한 coincide는 志水訳에서는 ‘동시적이다’고 번역되어 있다. 그렇지만 coincide의 두 가지 의미(동시에 일어나다; 일치하다) 및 『혁명론』 독일어판(Über die Revolution, 1965)에서는 ‘miteinander verkoppelt, 서로 결합’이라고 번역되어 있다(ÜR, S.34.). 이런 것을 보면, 이것은 단순히 시계열적으로 그 발생이 ‘동시’로 될 뿐만이 아니라, 자유의 관념과 시작의 경험이 서로 불가분한 것(그 때문에 ‘동시적’이기도 하다)라는 이해 하에, 필자는 오해가 없고 간단한 표현인 ‘일치하다’를 채용했다.
Hannah Arendt Newsletter의 편집 책임자인 볼프강 호이야(Wolfgang Heuer)에 따르면, 아렌트는 OR의 집필(1963년) 후에, 그 독일어판으로서 ÜR을 출판(1965년)했지만, ÜR의 문체와 내용은 단순한 OR의 번역에 비해서는 훨씬 자유로우며, 또한 OR이 간략하고 정확하게 기술한 반면에, ÜR은 정교하고 교묘한 수사가 특징적이라고 말한다(Arendt Handbuch, S.89-90.). 또한 아렌트는 1964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Zur Person’에서의 귄터 가우스와의 대담 ‘무엇이 남았는가? 모아가 남았다Was bleibt? Es bleibt die Muttersprache.’에서 “나는 늘 의식하고, 모어를 잃는 것을 거부해 왔습니다. 영어에 대해서도, 나는 어느 정도 거리를 지켜왔습니다. … 독일어는 남겨진 본질적인 것이며, 저는 의식하면서도 보존해 왔던 것입니다”(EU, pp.12-13.일본어판『アーレント政治思想集成 1』19쪽)고 말한다.
이상을 토대로 이 글에서는 아렌트가 최초로 집필했던 판이자, 또한 ‘간략하고 정확’한 기술인 OR과 그 일본어 번역판을 기본적으로 참조하면서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문장에 관해서는 이렇게 ÜR도 참고하여 문장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자유의 관념의 내용으로서, 여기서 아렌트는 유명한 ‘자유(freedom)’와 ‘해방(liberation)’의 차이를 제기한다. ‘해방’, 그리고 해방 속에 포함된 ‘liberty’로서의 자유(그것은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이며, ‘부정의한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이다)는 본질적으로 소극적인(negative) 것이며, 본래의 자유(freedom)와는 다른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본래의 ‘자유’란 “공적 영역에의 가입[참여]”이라고 한다.[주12] 혁명이 해방과 자유의 둘 모두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귀찮은 것이다. 실제로 해방은 자유의 조건이며 경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여기에 덧붙여 아렌트는 “새로움의 파토스(pathos of novelty)가 존재하며, 새로움이 자유의 관념과 결합될 경우에만 혁명에 관해 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주13] 혁명은 단순한 변화도, 단순한 폭력도 아니다. “어떤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폭력이 완전히 상이한 통치형태를 수립하고 새로운 정치체를 형성하기 위해 이용되며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적어도 자유의 구성을 목표로 하는 경우에만, 우리는 혁명에 관해 말할 수 있다”[주14]고 한다.
[주12] ‘공적 영역으로의 참여’에 관해서는 이 장의 3절 “기본개념 : ‘혁명’과 ‘자유’ (2) ‘자유’”에서 상술한다.
[주13] OR, p.24. 일본어판 46쪽.
[주14] OR, p.25. 일본어판 47쪽.
더 나아가 아렌트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마키아벨리의 예, 그리고 영국에서의 크롬웰 이후의 왕정복고 당시의 사례를 들면서, 혁명(revolution)이라는 말의 어원을 탐색한다. 즉, 혁명은 원래 ‘복고(restoration)’, ‘복구(renovation)’를 의미했다는 것, 혁명가들이 “시대의 새로운 질서(novus ordo saeclorum)를 열망도 없이, 새로움에 대해 열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체의 회전에도 비해야 할 이 혁명의 흐름이 시대의 흐름으로서 돌아올 수 없는 지점으로까지 가버린 후가 돼서야, 우리가 보통 ‘혁명’으로서 이미지하고 있는 바의 ‘신시대의 파토스’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사람들을 반항으로 추동하는 권력의 남용이나 잔학행위나 자유의 박탈과는 완전히 별개로, 혁명이 그 전모를 드러내고 일종의 명백한 모습을 취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그 마력을 던지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바꿔 말하면,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주15]는 것이다.
[주15] OR, p.34. 일본어판 60쪽.
2장에서는 주로 루소의 유명한 ‘일반의지(general will)’ 개념을 “다수자를 하나로 묶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주16]라고 비판하며, 프랑스 혁명이 ‘자유의 창설’이 아니라 ‘빈곤과 부의 문제’라는 ‘사회문제의 해결’에 발을 담금으로써 최종적으로는 “혁명의 기세를 촉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이용되었던”[주17] 테러에 의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사회문제를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코자 하는 시도는 모두 테러를 끌어들이며, 돌이켜보면 그 테러야말로 혁명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주18]라고 서술된다. 프랑스 혁명을 기인으로 하는 개념, 즉 루소의 일반의지, 헤겔의 “자유는 필연의 과실(freedom is the fruit of necessity)”,[주19] 그리고 맑스의 “역사적 필연성(historical necessity)”[주20]의 공통점은 “모두 군중 ― 국민, 인민, 사회의 사실상의 다수 ― 를 하나의 초인간적인 저항하기 어려운 ‘일반의지’에 의해 자극을 받는 초자연적인 육체의 이미지로 보았다는 점”[주21]에 있었다. 그에 반해 미국 혁명가들은 혁명의 진로가 “자유의 창설과 영속적인 제도의 수립”에 있음을 알았다. 그들에게 인민이란 “다수(manyness)”이며, 사람들의 “복수성(plurality)”, “다중(multitude)”[주22]은 자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공화정에서의 공적 영역은 “대등한 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의견(opinion)의 교환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 “여론(public opinion)의 지배는 전제(専制)의 한 형태”[주23]라는 것을 알았다.
[주16] OR, p.67. 일본어판 116쪽.
[주17] OR, p.90. 일본어판 148쪽.
[주18] OR, p.102. 일본어판 166쪽.
[주19] OR, p.45. 일본어판 76쪽.
[주20] OR, p.52. 일본어판 94쪽.
[주21] OR, p.50. 일본어판 90쪽.
[주22] OR, p.83. 일본어판 138쪽.
[주23] OR, p.83. 일본어판 139쪽.
3장에서는 프랑스 혁명가들이 혁명의 목적을 자유가 아니라 ‘빈곤’(즉, 생명의 ‘필연성’)의 해결, 사회문제의 해결로서의 행복에서 찾았던 반면에, 미국 혁명가들은 행복이라는 것을 ‘공적 문제에 대한 참여’로 파악했다는 점이 서술된다.[주24] 미국 혁명가들에게 행복이란 “공적 행복”이었다. “공적 자유”, 즉 “공적 영역에 들어갈 권리, 공적 권력에 참가할 시민의 권리”, “‘통치 참여자’가 될 권리”[주25]야말로 ‘자유’이며 ‘공적 행복’임을 그들은 알았다. 미국 혁명가들은 “혁명이란 자유의 창설(foundation of freedom)이며 자유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보증하는 정치체의 창설”임을 알았던 것이다.
[주24] OR, p.118. 일본어판 194-195쪽.
[주25] OR, p.118. 일본어판 195쪽.
4장에서는 2장과 3장에서 서술되었던 “혁명이란 자유의 창설이다”의 의미가 깊이 있게 서술된다. 즉, 자유의 창설이란 “공화정을 수립하는 것(foundation of a republic)”(republic의 어원은 라틴어에서의 res publica, 즉 ‘공적인 것, 공공의 것’을 나타낸다)[주26]이며, 미국 혁명가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권력을 수립하는가”, “어떻게 새로운 정부를 창설하는가”에 있었다.[주27] 미국 혁명의 성공이라는 행운은 미국 혁명이 계승했던 역사적 유산이 “제한군주정”이었음에 덧붙여,[주28] “식민지인들이 이미 영국과 투쟁하기 전에, 자치체로 조직되었던”,[주29] 즉 공화정의 원초형태가 이미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말했던 ‘활동/행위(action)’의 중요성,[주30] 즉 인간의 복수성에 기초하여 약속을 맺고 약속을 지키는 인간의 능력이야말로 창설의 능력이며, 권력의 원천임을 알고 있었다.
[주26] OR, p.132. 일본어판 221쪽.
[주27] OR, p.139. 일본어판 231쪽.
[주28] 그에 반해 프랑스 혁명의 그것은 ‘절대주의’였다. 즉, “혁명은 그것이 타도하는 통치형태에 의해 전부터 결정되어 있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 아닌 듯이 생각된다”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OR, p.146. 일본어판 242쪽.
[주29] OR, p.156. 일본어판 255쪽.
[주30] ‘활동’에 관해서는 HC, pp.7-9. 일본어판 19-21쪽에서 간략하게, 또한 HC, pp.175-247. 일본어판 285-402쪽에서 상세하게 논의되고 있다.
5장에서는 “시작의 당혹스러움”이라고 해야 할 문제, 즉 혁명의 창설 시에서의 ‘권위’의 창설과 역사의 ‘시작’의 연관이 논해진다. 로마의 권위(auctoritas)[주31]는 로마의 창설과 ‘묶는다(religare)’[주32](이것은 종교religion의 어원이기도 하다)에 의해서 성립하는데, 미국혁명에서는 바로 “창설의 행위 그 자체가 포함한 권위”[주33]로서, 즉 시작(principium)과 원리(principle)는 동시적(coeval)인 것이라는 진실이 역사적으로 현전했던 것이다. 이 “혁명이란 시작이다”라는 것은 혁명이 “역사적 시간의 연속적인 연쇄 속에 파고들어온 비연속적인 새로운 사건”[주34]이며, “시간의 간극의 날짜를 연대기의 방식으로, 즉 역사적 시간의 관점에서 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아렌트는 “시작에는 (신과 같은) 절대자를 필요로 하다”는 히브리-그리스도교적 전통 속에서,[주35] 고대 로마적인 해결, 즉 “창설의 행위” 그리고 창설자야말로 시작의 절대자이자 권위라는 해결을 이루었던 것이다.
[주31] ‘권위’를 의미하는 라틴어 auctoritas는 ‘증대하는 것, 증가하는 것’을 의미하는 augere를 어원으로 한다. 또한 영어 authority(권위)는 author(~를 산출하다, 쓰다. 작가)에서 파생된 말이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 라틴어(auctoritas, augere)와의 유사한 관계를 보여준다.
[주32] OR, p.190. 일본어판 317-318쪽. 또한 religare(묶다)는 ‘종교(religion)’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 OR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다. “혁명가ㅗ 헌법에 대한 그들(미국혁명가들)의 태도가 어느 정도 종교적이라고 불린다고 하다면, ‘종교’(religion)라는 말을, 그 원래적인 로마적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즉, … 미국인의 경신(敬神, piety)은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에 묶는 것(religare)에 있었다.”(OR, p. 190. 일본어판 317-318쪽)
[주33] OR, p.191. 일본어판 319쪽.
[주34] OR, p.197. 일본어판 327쪽.
[주35] OR, p.198. 일본어판 329쪽.
마지막 장인 6장에서는 “공적 자유(public freedom)”,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 “공적 정신(public spirit)”과 같은 혁명정신과 혁명적 전통이, 지금 미국에서도 상실되어 버렸음을 한탄한다. 그 혁명의 상실된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대립과 모순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사항을 묶어서 생각하고, 유의미하게 결합”하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한다. 즉, “좌파와 우파(the right and the left), 반동과 진보(reactionary and progressive), 보수[보존]주의와 자유주의(conservatism and liberalism)”와 같은 “한 쌍의 대립물(pairs of opposites)”이 정치에 들여오게 된 것은 혁명 이후의 일인 것이다.[주36] 혁명이라는 “창설의 행위 속에서 그것은 서로 배타적인 대립물(mutually exclusive opposites)이 아니라 동일한 사항의 두 측면(two sides of the same event)이었”으며, 원래 혁명이라는 새로운 정치체의 창설이라는 시작의 행위에는 “보수[보존]주의(conservatism)”라는 “안정성에 관한 관심(the concern with stability)”과 “진보적 자유주의(progressive liberalism)”라는 “새로운 것의 정신(the spirit of the new)” 둘 다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주7]
[주36] OR, pp.215-216. 일본어판 362-363쪽.
[주37] OR, pp.214-216. 일본어판 361-363쪽.
이 분리되어 버린 대립을 묶으려면 다시 한 번 “공적 정신”이라는 것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렌트는 2장에서 말했던 ‘다수성’, ‘복수성’의 논의를 토대로 그 공적 정신이 발휘되어 형성되는 바의 공화정에 있어서 만장일치의 의견이라고도 해야 할 ‘여론’이 지배하는 것의 위험성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이한 ‘의견’의 중요성을 호소한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구성원이 일치하여 품고 있는 ‘여론’의 지배(the rule of a unanimously held ‘public opinion’)와 의견의 자유(freedom of opinion)는 결정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의견이 같아진 곳에서는 의견의 형성이 불가능하다.”[주38] 더욱이 아렌트는 여론의 지배를 막고 의견의 자유를 보증하는 상원(the Senate)과 최고재판소(the Supreme Court, 연방대법원)이라는 제도적 장치의, 미국 공화정에서의 절대적 새로움(absolutely new)과 보수적(conservative) 성격을 논한다.[주39] 나아가 “군·구와 시민집회(the township and the town-hall meeting)”, “공화정과 구의 제도(ward system)”[주40]를 검토하고, “평의회(council)는 분명히 자유의 공간이었다”고 말하며,[주41] 대의제보다도 참여적 민주주의적 요소를 지닌 평의회의 구조를 높이 평가한다.
[주38] OR, pp.217. 일본어판 366쪽.
[주39] OR, pp.217-223. 일본어판 365-374쪽.
[주40] OR, pp.227-228, 240-241. 일본어판 379-381, 398-399쪽.
[주41] OR, p.256. 일본어판 420쪽.
마지막으로, “새로운 정신, 어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정신”[주42]이라는 혁명적 정신이 상실된 지금, “이 실패를 갚을 수 있는 것”은 “기억(memory)”과 “회상(recollection)”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진다.[주43] 마지막을 아렌트는 “우리의 유산은 유언장 없이 우리에게 남겨졌다(Notre héritage n’est précédé d’aucun testament)”라는 프랑스 시인 르네 샤르의 말(즉, 우리는 미국 혁명의 제도적 유산은 계승하고 있지만 공화정을 창설했을 때의 ‘혁명적 정신’은 상실해 버렸다는 것)과 “태어나면서부터는 차선인 것은/태어난 원래의 곳으로 신속하게 돌아가는 것이다/일단 태어나면 삶의 차선책은 온 곳으로 가능한 한 신속하게 가는 것이다”라는 소포클레스의 시(이것은 시작의 ‘기억’을 ‘회상’시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를 소개하면서 이 책을 끝맺는다.
[주42] OR, p.272. 일본어판 441쪽.
[주43] OR, p.272. 일본어판 442쪽.
또 덧붙인다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아렌트는 “서론 : 과거와 미래 사이의 간극”의 서두를 위에서 언급한 “우리의 유산은 유언 하나 없이 남겨진다”는 르네 샤르의 말로부터 시작한다.[주44] 『과거와 미래 사이』는 『혁명론』과 같은 시기에 집필·출판되었긴 하지만, 『혁명론』의 속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간극”, “혁명의 상실된 보물”, “시작”,[주45] ‘전통’, ‘권위’, ‘자유’ 등과 같은, 『혁명론』에서 다뤄진 모티프가 재차 등장한다. 이 글에서도 적당히 『과거와 미래 사이』를 참조하자.
[주44] BPF, p.3. 일본어판 1쪽.
[주45] 『과거와 미래 사이』의 커다란 테마로서 ‘시작’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은 이 책 PENGUIN CLASSICS 판의 Introduction에서 제롬 콘이 ‘시작의 신(the god of beginnings)’인 야누스Janus 신(PENGUIN CLASSICS판의 표지에 디자인된 신이며, 그의 두 얼굴은 한편은 과거를, 다른 한편은 미래를 향한다)에 관한 기술에서 개시된다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BFP, pp.vii-viii.
3. 기본 개념 : ‘혁명’과 ‘자유’
이상으로 『혁명론』의 각 장을 따라 내용을 개괄했다. 지금부터 해방과 사회문제의 해결에 시종일관 공적 영역으로서의 자유의 창설을 행하지 않고, 테러에 의해 시작과 더불어 떠내려가 혁명정신을 상실해 버린 프랑스 혁명보다도 공화정과 공적 공간의 수립에 성공하고 새로운 시작을 창설하는 데 성공한 미국 혁명을 아렌트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혁명이란 ‘자유의 창설’이며 또한 역사상 현전했던 ‘시작’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혁명론』의 키워드인 ‘혁명(revolution)’, ‘자유(freedom / liberty)’, ‘시작(beginning)’ 개념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
(1) ‘혁명’
이제 『혁명론』 전체가 물론 ‘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논하는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다시 좁게, 이 책에서 아렌트가 ‘혁명’이라는 말을 어떻게 의미규정하고 있는가를 서술하고 싶다.
아렌트는 「서론 : 전쟁과 혁명」 및 「1장 : 혁명의 의미」에서 혁명이란 크게 두 개의 의미를 내포하는 사태라고 정의한다. 그 하나가 ‘시작’이며, 다른 하나는 ‘자유’이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근대의 혁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자유의 관념과 새로운 시작의 경험이 일치한다(coincide)는 것이다.”[주46] “혁명이 전면에 가져왔던 것은 이 자유라는 것의 경험이었다. … 이 경험은 동시에 어떤 새로운 사항을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의 경험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의 일치, 즉 새로움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새롭게 경험했다는 것이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 둘 다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파토스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다. … 이러한 새로움의 파토스가 존재하고, 새로움이 자유의 관념과 묶이는 경우에만, 혁명에 관해 말할 수 있다.”[주47]
[주46] OR, p.19. 일본어판 38쪽.
[주47] OR, p.24. 일본어판 45-46쪽.
“어떤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변화가 일어나며, 폭력이 완전히 상이한 통치형태를 수립하고 새로운 정치체를 형성하기 위해 이용되며, 압제로부터의 해방이 적어도 자유의 구성을 목표로 하는 경우에만 우리는 혁명에 관해 말할 수 있다.”[주48]
[주48] OR, p.25. 일본어판 47쪽.
그렇지만 아렌트는 이상과 같은 단순한 정의를 모든 곳에서 밀고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혁명(revolution)’이라는 말은 그 말의 원래 의미로서도, 또한 근대의 헤겔·맑스의 철학에 있어서도 위의 정의와는 정반대의 의미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첫째로 ‘혁명’이라는 말은 원래 ‘복고(restoration)’를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언급된다. ‘혁명’이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것 같은 시대로 아렌트는 우선 초기 르네상스의 이탈리아를 든다. 거기서 마키아벨리[주49]가 지배자의 폭력적 타도나 통치형태의 전환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말은 ‘상태의 변동(mutazioni del stato)’이며, 그것은 키케로가 말하는 ‘사물의 변화(mutatio rerum)’를 가리켰다.[주50] 나아가 그는 통일 이탈리아 국민국가의 창설을 ‘복구(rinovazione)’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주51]
[주49]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마키아벨리를 “근대의 입구에 서서, 혁명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지만, 최초로 혁명에 관해 생각했던” 정치사상가라고 말하며, “마키아벨리가 근대의 혁명들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점, 즉 창설의 경험을 재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지고의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적) 수단은 정당화된다는 것의 경험을 재해석했다는 점에 의한다”고 높이 평가한다. BPF, p.136, 139. 일본어판 185, 190쪽.
[주50] OR, p.26. 일본어판 48쪽. 또한 志水速雄訳에서의 “마키아벨리가 … 여전히 키케로가 말한 사물의 변화(mutatio rerum)라든가 정세의 변동(mutazioni delstato)을 사용한다…”고 하는 대목은 원문에서는 “…Machiavelli still uses Cicero’ mutatio rerum, his mutazioni del stato, …”로 되어 있다. 志水訳는 his를 Cicero’로 번역하고, mutatio rerum과 mutazioni del stato 둘 다의 의미가 마치 키케로의 말인 양 기술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주51] OR, p.27. 일본어판 49-50쪽.
사실 구체제를 타파하고 신체제를 희구했던 사람들이 그 운동을 복고적인 것, 또는 과거로부터 연속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결코 마키아벨리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혁명은 우선 복고 또는 복구로서 시작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시작의 혁명적 파토스가 생겨났던 것은 가까스로 사건 그 자체가 진행과정에 들어서고부터다.”[주52]
[주52] OR, p.27. 일본어판 50쪽.
“최초의 혁명가들, 즉 혁명을 완수할 뿐만 아니라 혁명을 정치의 무대에 도입했던 사람들은 결코 새로운 사태(new things)나 시대의 신질서(novus ordo saeclorum)를 열망하지는 않았다.”[주53]
[주53] OR, pp.31-32. 일본어판 56-57쪽.
“<혁명>이라는 말 그 자체 속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확실히 이 새로움에 대한 부주의/소홀함이다.”[주54]
[주54] OR, p.32. 일본어판 57쪽.
아렌트에 따르면 ‘혁명’이라는 말이 천체(天体)의 회전처럼 “예정된 질서의 지점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복고적인 의미로 정치상 최초로 사용되었던 것은 우리가 오늘날 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즉 크롬웰에 의한 유명한 청교도혁명(1641~1649년) 때가 아니라, 반대로 1660년에 “잔여 의회가 타도되고, 군주정이 복고했을 때였다”고 한다.[주55] 더욱이 1688년의 명예혁명(스튜어트가가 추방되고, 왕권이 윌리엄과 메어리로 옮겨갔다) 때에도 ‘혁명’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주55] OR, p.33. 일본어판 58-59쪽. 또한 아렌트는 OED(Oxford English Dictionary)의 기재를 토대로, 1660년의 정변시에 revolution이 사용되기 시작했지만(OR, p.278. Notes 26. 일본어판86쪽, 原注26), 일반적으로는 이 정변(왕정복고)는 restoration이라고 불린다. (일본의 메이지유신도 Meiji Restoration로 통상 번역된다.) Simpson, J. A. and Weiner, E. S. C., Oxford English Dictionary, 2nd edition, Clarendon Press, Oxford,1989, pp.754-755.(restoration의 항목2);pp.840-841. (revolution의 항목 8a, b).
즉, ‘혁명’이란 정확히 1년 후에 같은 장소에 되돌아오는 ‘천체의 회전’의 이미지처럼,[주56] 원래 (왕정으로의) ‘복고’를 의미했던 것인데, 이 사실은 “단순한 의미론의 유희/놀이”나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우리가 혁명이라고 이미지하고 있는 17, 18세기의 혁명이란 ― 일본인에게서는 정확히 메이지유신이 바로 왕정복고이며, ‘대신’은 고대 율령제 하의 여러 관직명이 근대적 치장을 하고 부활했던 것처럼 ― 원래 ‘복고’를 목표로 했다.[주57] “구질서에는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가져오는 한 과정의 대리인이라는 관념만큼, ‘혁명’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로부터 내기돈이 되었던 관념은 없다.”[주58] “(혁명가들이) 바라는 것은 사물이 본래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던 고대 시대로 회전하여 돌아가는(revolve back) 것이라고 아주 진지하게 변명했다”고 하는 역설이 ‘혁명’이라는 말에는 감춰져 있는 것이다.
[주56] ‘혁명revolution’이라는 말은 코페르니쿠스의 주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에도 있듯이, 원래 천문학의 용어이며, 주기적 순환 운동을 나타냈다. OR, p.32.일본어판57쪽.
[주57] OR, p.33. 일본어판 58-59쪽.
[주58] OR, p.32. 일본어판 58쪽.
둘째로 ‘혁명’이라는 말로부터는 ‘천체의 회전’으로부터 이미지되는 대로, 저항할 수 없는, 저항하기 힘든 ‘불가항력성의 개념(notion of irresistibility)’[주59]이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서 현실로 나타났던, 압도적인 힘으로 밀려가는 그 빈민의 힘으로 상징되는,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은, 헤겔에게서 절대자가 ‘자유’라는 모습으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나타난다고 하는 ‘역사의 필연’ 개념이 되어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이 자유와 필연이 변증법적으로 화해한다고 하는 생각은 맑스주의에서도 계승되었다).[주60]
[주59] OR, p.37. 일본어판 65쪽.
[주60] 현대에서도 공산당 정권이나 노동조합의 성명문에는 ‘역사의 필연’,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와 같은 불가항력성irresistibility을 상기시키는 용어의 사용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혁명’이라는 말에는 “본래의 의미에도, 또한 그것을 최초로 정치용어로 비유적으로 사용했던 경우에도, 거기에는 새로움, 시작, 폭력, 즉 오늘날의 혁명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요소는 눈에 띄게 결여되어 있었다.”[주61] ‘혁명’이라는 말이 완전히 새로운 시작의 혁명적 파토스를 지니기 시작한 것은 가까스로 그 사건이 진행과정에 들어서고부터였다. 그렇지만 근대에서 미국혁명으로서 ‘시작’을 가져왔던 ‘혁명’이라는 말이 원래 복고를 추구했던 말이라는 것, 그 사실을 굳이 아렌트가 길고 이해하기 힘든 서술로 지적하고 있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복고를 추구한다는 혁명 전반기의 국면에서도,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창설한다고 하는 혁명 후반後半의 국면에서도 그것이 의존해야 할 ‘권위’, 또는 ‘절대자’를 희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혁명 전반에서는 바람직한 시대로의 복고(이미 있는 ‘시작’으로의 복고)이며, 후반에서는 이른바 ‘시작의 당혹스러움’, 즉 어떻게 시원의 권위를 수립하는가라는 『혁명론』 후반부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주61] OR, p.37. 일본어판 65쪽.
(2) ‘자유’
이미 지적했듯이 아렌트는 혁명이란 크게 두 가지 의미, 즉 ‘시작’과 ‘자유’를 내포하는 사태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 혁명이 내포하는 바인 ‘자유’의 의미에 관해서 아렌트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미 언급했듯이 아렌트는 “혁명이란 자유의 창설이다”, “(혁명의) 줄거리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자유의 출현이었다”고 말하며, ‘자유’를 둘러싼 해석과 논의는 『혁명론』의 초미의 관심사라고도 해야 할 부분이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흔히 일본어로 ‘자유’라고 번역되는 말인 freedom과 liberty를 명확하게 구별한다. 후자인 liberty는 ‘해방(liberation) 속에 포함되어 있는’[주62] 관념이며, ‘생명life, 자유liberty, 재산property의 권리’,[주63] ‘부당한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주64] 이다.
[주62] OR, p.19. 일본어판 39쪽.
[주63] OR, p.22. 일본어판 42쪽.
[주64] OR, p.22. 일본어판 43쪽.
아렌트는 이러한 liberty는 “(liberty)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는 운동의 자유와 같으며”, “법에 의한 것이 아닌 한, 투옥되거나 구속되지 않는 … 이동의 힘”, “(블랙스톤이 말했듯이, 주로 영국의 역사에서의) 모든 liberty는 결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우리 자신의 주장도 포함하여, 물론 본질적으로 소극적인/네거티브 것이다. 그것은 해방의 결과이지만, 결코 freedom의 실제 내용이 아니다”[주65]라고 말한다.
[주65] OR, p.22. 일본어판 43쪽.
그렇다면 전자의 자유, 즉 freedom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는 이 책에서 freedom의 의미를 “공적 관계에의 참여, 또는 공적 영역에의 가입”[주66]이라고 일관되게 말한다. 그것은 “공적 자유(public freedom)”이며, “정치현상으로서의 freedom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출현과 때를 같이 하여 태어난”[주67]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리스 도시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났던 자유를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66] OR, p.22. 일본어판 43쪽.
[주67] OR, p.20. 일본어판 40쪽.
“공적 자유란, 인간이 세계의 압력으로부터 의지적으로 그 속에서 도망칠 수 있는 내부적 영역도 아니라면, 의지로 양자택일의 선택을 명령하는 선택의 자유(liberum arbitrium)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자유는 공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could exist only in public). 그것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적인 리얼리티(tangible, worldly reality)이며, 천혜(天恵)나 재능(a gift or a capacity)이라기보다는 인간이 향유하기 위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자유가 출현하고(freedom appears), 모든 사람에게 보여질 수 있게 되는(becomes visible to all) 영역으로서, 고대가 알았던 인공적인 공적 공간(manmade public space) 또는 공적 시장(market-place)이었다”[주68]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아렌트의 복잡한 서술로부터 자유에 관한 그녀의 이해가 보여지게 된다. 즉, liberty란 이사야 벌린이 말한 바의 소위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 liberty from)’,[주69] ‘~으로부터의 자유’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위에서 언급했듯이 기묘하게도 아렌트도 “모든 liberty는 … 물론 negative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 ‘부당한 지배,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부를 때의 자유가 이것이며, ‘언론·출판의 자유’ 등도 이것에 해당한다. 일본어의 ‘자유’도 ‘스스로에게서 유래한다’라고 하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제일 먼저 이미지되는 것은 liberty일 것이다.
[주68] OR, p.115. 일본어판 190쪽.
[주69] Sir Isaiah Berlin, Four Essays on Liberty,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69, pp.121-131. 일본어판:小川晃一・福田歓一・小池銈・生松敬三共訳『自由論〈新装版〉』みすず書房、2000年, 303-318쪽. 또한 이 ‘소극적 자유’에 대립된다고 벌린이 생각하는 ‘적극적 자유(positive freedom)’에 관해서는 벌린은 부정적 견해를 보여준다. 이것은 벌린이 ‘적극적 자유’에 관해 “다른 사람들을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유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어떤 사람들에 의해 가해지는 강제를 정당화하는 데에 유기적인 은유暗喩를 사용하는 것의 위험성”(Berlin, Four Essays on Liberty, pp.132. 일본어판 321쪽)이라고 말하듯이, ‘적극적 자유’를 루소의 ‘일반의지’나 헤겔의 ‘자유는 필연의 결실’로 표현되는 것, 즉 프랑스 혁명을 기반으로 한 문맥에서 파악되기 때문이며, 미국혁명의 freedom로서의 개념을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벌린과 아렌트에게서의 ‘자유’의 해석은 대조적인 방향을 향하게 된다. Berlin, Four Essays on Liberty, pp.131-172. 일본어판 319-390쪽.
그렇지만 아렌트도 “혁명을 묘사하고 해석하는 데에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이 두 가지 비유(산고의 비유와 가면을 벗긴다는 비유를 가리킨다. 松本注) 속에, 유기체의 비유organic metaphor가 혁명의 이론가뿐만 아니라, ― 실제로 맑스는 ‘혁명의 산고’를 아주 좋아했다 ― 역사가들에게도 선호되었다는 것은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OR, p.96. 일본어판158쪽)라고, 혁명운동을 유기생명체에 비유하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아렌트는 persona가 연극의 용어에서 채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정치적, 공적 무대에서의 persona를 지닌 인간(법적 인격a legal personality)으로서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이다. OR, pp.96-99. 일본어판 158-162쪽.
법적 인격을 지닌 개인이 공정 영역에 참여할 때, 벌린이 말한 ‘소극적 자유’의 보장이 철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하며, (예를 들어 민주주의 정치에서의 ‘사상·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의 중요성을 상기하라),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와 벌린의 사상에는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여론의 지배를 경계하고, 개인 개인의 ‘의견’을 중시했다는 것(OR, pp.217-218. 일본어판 365-366쪽)이나, 위에서 언급한 루소의 일반의지와 같은 복수성이 사실상 단일성으로 되는 것을 비판했다(OR, pp.64-69. 일본어판 112-119쪽. 또한 이 복수성과 단일성을 둘러싼 논의에 관해서는 「Ⅲ. ‘시작의 아포리아’ : 그 곤란성과 해결의 방향 ― 2. 혁명운동의 본질과 ‘오토포이에시스’를 참조하라)에서 볼 수 있듯이, 아렌트도 벌린도, 모두 루소, 헤겔(및 맑스)가 상상하는, 하나의 것으로 통일되어가는 국가관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렇지만 아렌트는 ‘자유(liberty)’란 ‘해방의 결과’[주70]로서 초래되는 것이며, 또한 사실 ‘해방은 자유(liberty)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결코 ‘해방의 결과 얻어지는 자유(liberty)가 자유(freedom)의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주71]라고 말한다. 그녀에게서 이 자유(freedom), 공적 자유의 창설이야말로 혁명의 목적이며, 항상 ‘해방’과 이 ‘자유(freedom)의 창설’이 혼동되는 것을 탄식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유(freedom)’이란 ‘공적 영역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치적 자유란 ‘통치 참가자인 것’의 권리를 의미한다”[주72]고, 그리고 “18세기의 정치용어를 따라서, (혁명정신)을 공적 자유, 공적 행복, 공적 정신으로 명명했다”[주73]고 아렌트가 말하듯이, 자유(freedom)이란 공화정을 구성하는 정신이며, 이 자유(freedom)의 공간을 구성하는 정신이야말로 ‘혁명정신’이기도 했다.
[주70] OR, p.22. 일본어판 43쪽.
[주71] OR, p.23. 일본어판 44쪽.
[주72] OR, p.210. 일본어판 356쪽. 이 문맥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자유(freedom)이나 공적 자유를 말의 본래의 의미에 기초하여 ‘적극적 자유’, ‘~로의 자유’라고 불러도 지장이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만, 그 내용 및 평가는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개념의 발안자인) 벌린의 것과는 크게 다르며(주69 참조), 오해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주73] OR, p.213. 일본어판 359쪽.
더 나아가 말한다면, 이 공적 영역에서의 공적 자유란, 『인간의 조건』에서 말하는 ‘활동(action)’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며, 또한 이 활동을 가능케 하는 공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활동이란 인간의 복수성(multitude, 이것은 인간의 차이성과 평등성을 내포한다)에 의해 조건지어진 행위이며, 이것은 언론행위(public speech)에 의해 대표된다고 한다. 활동은 “말과 행위에 의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인간 세계 속에 투입하는” “제2의 탄생”이며, “시작”인 것이며, 인간의 ‘기적창조능력’이라고 말한다.[주74]
[주74] HC, ch.V.(pp.175-247.) 일본어판 286-386쪽.
이런 아렌트의 자유(자유(freedom))에 관한 인식은 『인간의 조건』에서의 서술에도 입각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복수성을 지니고(즉, 복구성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이 지상에 출생/탄생(natality)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persona)을 지닌 주체로서 자신을 공적 공간에서 폭로하는 언론행위에 의해, 이 지상에 ‘활동’의 영역으로서의 공적 공간을 창조하도록 조건지어진다. 그리고 혁명이란 이런 인간의 공적 자유의 영역을 새롭게 창조하고, 그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visible) 역사적 사상(事象)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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