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식이론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흔적 
: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론』에서 운명과 해방 

歴史認識理論における精神分析の痕跡

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の『パサージュ論』における運命と解放

프랑수아즈 나이슈타트(Francisco Naishtat)

Francisco NAISHTAT, « Les traces de la psychanalyse dans la théorie de la connaissance historique : Destin et délivrance dans les Passages benjaminiens (Passagen-Werk)», Philosophie et Éducation, UTCP Booklet 1, UTCP, 2008.


Ⅰ. 서론 

 20세기를 통해, 역사기술은 인문과학의 형태와 그 변형과도 관련된 철학적 충격이나 인식론적 충격을 받아왔다. 역사이론의 변용에 수반된 다른 인문과학은 인식론적으로 새롭게 방향이 지어지고, 현대철학은 전회해 왔는데, 본론에서는 이런 변용의 전부를 열거할 수는 없다. 현대의 역사기술에서의 결정적인 변화를 세 가지만 지적한다. 

 (1) 해석학적인 전환 : 역사가의 이해와 해석을 역사인식의 구조에 있어서의 능동적인 결과로 간주하는 것. 

 (2) 사회학적인 전환 : 사회나 역사의 장기적인 구조에 입각해 역사기술의 차원을 재설정하는 것. 이 경우, 개별 사건에 대한 접근법으로부터 구성된 역사기술은 배격된다. 

 (3) 언어학적인 전환 : 역사의 에크리튀르(역사 이야기), 더욱이 역사기술의 텍스트의 에크리튀르에 대한 인식론적 관점을 수정하는 것. 역사기술의 분야에 텍스트 이론이나 언어이론을 둘러싼 논의를 도입하는 것. 

 이런 역사기술의 변용(우리는 20세기의 철학의 변용과 결부시켜, 이것을 굳이 '전회'라고 표현했다)에 있어서, 정신분석은 얼핏 보면, 별다른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정신분석의 작업에 있어서는, 피분석자의 기억이나 억압된 과거를 현재시와의 동적인 관계에 있어서 파악하기 때문에, 시간 형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역사학 갗은 학문 분야에서 정신분석이 인식론적 충격도 '전회'도 초래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시 기묘한 것 아닐까? 역사학의 사명은 바로 "현재시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반론은 다음 세 가지 유보를 포함할 것이다. 

 (a) 최근의 역사기술은 분명히 정신분석의 충격을 받고 있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의 트라우마를 짊어진 희생자의 역사적 기억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제수용소, 전쟁, 학살, 민족간 폭력 등의 역사적 재앙의 기억이다. 그런데 트라우마의 물음은 분명히 담론이나 이야기의 단절에 관계한다. 즉, 통상적인 사건의 증언과는 달리, 희생자가 사건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파울 첼란이 "아무도 증인을 대신해 증언하지 않는다"(Niemand zeugt für den zeugen)[각주:1]는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만 한다. 이 점에서 정신분석은 역사기술에 선행한다. 유아기나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은 누락 부분이나 트라우마의 어떤 기억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 앞에서 이야기가 단편화될 때, 담론의 한계가 드러날 때, 정신분석은 역사가에게 어떤 모델을 제공할 것이다. 즉, 그것은 이야기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뭔가를 지시하고, 상징하고 암시한다는 모델이다.[각주:2] 

 (b) 정신분석에 대한 역사기술의 유보는 후자의 편만이 아니라 전자로부터도 생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집단적인 정신분석을 어떤 형식(문화, 사회, 역사)에 있어서도 금지했다. 초자아의 차원에서, 의식은 자기 동일성이나 승화 같은 문화적 모델을 포함시킬지도 모르지만, 무의식 쪽은 각 주체의 개별적인 역사와 밀접하게 결부되며, 항상 개인적인 채로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에게서는 집단적인 정신분석은 인정되지 않으며, 르 봉의 군중심리학에서의 집단심리도, 헤겔의 역사적 관념론에서의 민족정신도 상정되지 않는다.[각주:3] 무의식에서의 집단적 내지 개인적 지위status의 물음은, 프로이트(및 라캉)이 보기에, 이른바 정당한 정신분석과 미숙하고 잘못된 분석이론을 식별하는 시금석이다. 그래서 개인의 주체성의 차원에 한정된다면, 역사기술은 정신분석을 간접적이고 완곡하게 사용하게 된다. 대체로 역사 해석은 개인적 차원에 한정된 정신분석의 가능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개인들의 심리 ― 프로이트나 라캉에게서의 주요한 쟁점 ― 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c) 이런 설명은 더 나아가, 제3의 유보와 깊이 관련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이론과 역사기술의 실천에 있어서 정신분석과 독자적인 관계를 발전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역사기술의 작업과 이른바 정치, 과거와 역사가의 현재 사이에서 중요한 접점 ― 역사가가 공식적으로는 부정해왔던 접점 ― 을 설치함으로써 실증주의와 역사주의라는 두 개의 극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과거와 정신분석의 관계에 관해서는 벤야민의 역사기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적어도 꼽을 수 있다. 

① 벤야민은 성별(聖別)된 과거와 억압된 과거의 이분법을 시간성의 이론에서 끌어내고, 과거는 두 번 지나간다는 형태로 제시한다. 과거는 첫 번째에는 성취된 과거로서, 두 번째에는 현재시에 대한 새로운 기회chance를 포함한 아직 성취되지 못한 과거로서 지나가는 것이다.[각주:4] 실제로,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추도적追悼的 상기의 작업에 의해 과거는 현재시의 중핵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가 신화로서 경험되고, 각자에게 이른바 숙명으로서 부과될 때, 그런 숙명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 있어서, 특히 19세기에 관한 그의 말년의 탐구에 있어서, 역사가의 작업은 과거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실증주의)도, 지나가버린 시대가 우리의 반성적 의식에 대해 보유하는 의식을 과거의 한복판으로부터 사후적으로 폭로하는[파헤치는] 것(역사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실들의] 응축이나 변증법적 이미지의 기법이나 몽타주에 의해, 시간의 연속된 흐름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의 족쇄를 현재시에 있어서 파탄나게 하는 섬광으로서 과거를 발생시키고, 현재시의 중핵에서 특이한 기회chance를 개시하는 것이다.[각주:5] 

② 벤야민은 꿈과 각성의 대립을 정신분석으로부터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섭취한다[받아들인다]. 이 대립에 의해 우리는 모종의 도식을 손에 넣고, 그의 역사인식의 이론에 손을 댈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과거는 역사가에 의해 고정화되고 영원화되지 않고, 반대로 시간의 연속성을 파탄시킬 수 있도록 재활성화되는 것이다.[각주:6] 여기서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편으로, 벤야민에게서, 우리의 과거 ― 이 경우는 19세기 ― 는 판타스마고리를 포함한다. 판타스마고리가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분석하는 상품 물신주의의 현상과, 공산주의의 선구자나 계급 없는 사회라고 하는 죄 없는 유토피아주의이다. 상품의 물상화의 세계와 그 부정 ―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우정으로 가득 찬 유토피아적 소망 ― 이라는 두 개의 극은 벤야민이 보기에, 같은 시대나 같은 역사적 현상, 즉 자본주의의 판타스마고리적 표현인 것이다.[각주:7] 사회주의적 진보주의는 인류의 역사의 텔로스[목적]를 권위적으로 설정하고, 죄 없는 유토피아를 바라지만, 그것은 결국, 천년낙원을 약속하거나 메시아의 회귀나 시대의 끝[종언]을 한없이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적어도 외관상, 역사유물론은 무적이 된다. 왜냐하면 목적론적 장치는 우리가 진정으로 승부하지 않고, 모든 승부에서 이기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어떤 불행이나 카타스트로프가 생기더라도, 구원은 이윽고 도래한다는 카드[패]가 수중에 있다.[각주:8] 이리하여 상품 물신주의와 공산주의의 약속에 의한 목적론적 유토피아주의라는 두 개의 극은 동일한 판타스마고리로 집약되며, 그것은 역사를 사는 자에게 피험자의 꿈과 똑같은 의미를 띠게 된다. 즉, 운명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이 속박을 파탄시키려고 하는 바람이다. 둘 다 배우[행위자]는 꿈을 꾸는 방관자이다.[각주:9] 

③ 벤야민에게서 과거의 인식이 우리의 현재의 조건의 마력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반대로, 벤야민은 독특한 몽타주 기법[각주:10]을 갖고서, 과거와 이른바 물신주의의 톱니바퀴가 연관되는 메커니즘을 내다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벤야민은 역사인식이 어떤 충격을, 즉 각성을 일으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때 역사인식은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의 역할을 맡으며, 우리는 어떤 출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운명의 마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체의 역사적 형이상학의 새로운 형태로서 해석하는 것에는 조심해야 한다. 정신분석 후에 '해방된' 주체의 상태가 무엇을 닮고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은 정신분석의 사정거리를 넘어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회귀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하는 각성이 무엇을 닮고 있는지를 언표하는 것은 역사기술의 사정거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각성은 소묘되고, 예상될 수 있는 경험적 사태와 똑같은 차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각성을 인식하기 위한 기준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고, 각성은 바로 탈신비화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적합한 때에 우리는 운명의 마력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운명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또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뒤집고, 역사의 필연이라는 무서운 기계장치를 멈출 수 있도 있을 것이다.[각주:11] 그러나 이런 역사인식은 독일관념론 및 역사주의에 의해 해명된 의식과 동등한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이성적이고 몽매한 의식의 안티테제로서, 꿈을 파탄나게 할 수 있는 현명하고 이성적인 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아주 기묘한 의미에서, 데리다가 벤야민에 관한 빼어난 텍스트[각주:12]에서 인정했듯이,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가는 꿈을 주의깊게 지켜봐야 한다〔veiller sur le rêve〕. 즉, 역사가는 꿈을 그 원천으로 소급시켜 감으로써 꿈과 대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이나 동질성을 파괴하는, 꿈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나 다름없다.[각주:13] 꿈의 허를 찌르고, 각성에 의해 기회chance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꿈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정신분석의 작업이 해석의 작업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적 삶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인내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무한하게 설정되는 해방을 목적론적으로 갈망[대망]하는 것과는 다르다. 분석작업이 무한하게 연장되는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분석을 헐뜯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거꾸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분석이 우리의 지성의 마력을 언어에 의해 배신하는 것을 가능케 했듯이, 분석작업에 의해 마력의 단절이 준비되는 것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게임을 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됐다고 해도, 사물이 무엇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각주:14] 이리하여 벤야민이 역사기술의 기회로서 논한 역사적 메시아주의는, 영원히 대망되는 메시아의 목적론적 차원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재시의 각 순간이 갖고 있는 기회이며, 출구의 문이며, 역사의 연속의 단절이다. 이런 단절의 시간성에 있어서 메시아적인 것 ― 벤야민에게서의 진정한 신비 ― 이란 도래하는 것(예를 들어 구원이나 낙원 같은 목적론적 사태)이 아니라, 도래 그 자체이다. 즉, 운명의 뒤통수를 치고, 우리 자신의 과거를 해방하는 시간의 열림, 마치 두 번째로, 다만 기회로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시간의 열림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기술의 작업에 있어서 해석 모델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정신분석을 다뤄왔지만, 그러나 집합적 무의식의 원형 ― 선천적이고 비시간적으로 간주되는 원형 ― 이라는 융의 실체적 해석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은 주체의 철학 및 역사의 목적론의 아포리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역사, 정치, 철학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파사주론』의 역사인식이론이 불러일으킨 반론의 몇 가지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15]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의 테제는 『파사주론』과 분리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 몇 가지의 단장에 입각해 논의를 계속하자. 벤야민이 역사이론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몇 가지 범주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더 예증해보자. 


Ⅱ. 역사인식이론과 벤야민의 『파사주론』

 『파사주론』(Pasaggen-Werk)으로 알려진 저작은 벤야민의 기념비적인 텍스트인데, 1940년 9월에 그가 자살했을 때에는 미완성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사후 42년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간행됐다. 1982년 아도르노의 제자 롤프 티데만 등의 손에 의해 편집되고, 주어캄프판의 전집 5권에 수록됐다(프랑스어로는 1989년, 장 라코스트에 의해 번역됐다). 이 책의 제목은 벤야민에 의해 착상된 것이며, 이미 1927년에는 이 기획에 대한 최초의 언급 속에 "파리의 파사주 : 변증법의 요정의 나라"(1928년 1월 30일,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라고 적혀 있다. 파사주의 도시적인 오브제, 19세기 이후 건축된 파리의 갤러리는 벤야민의 텍스트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다(루이 아라공은 이미 이 대상들 ― 특히 오페라 자리의 파사주에 시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파리의 도시와 19세기가 이 미완의 책에 통일을 가져다주는 중심적 쟁점이라고 하더라도, 『파사주론』은 단순한 역사론도, 도시론이나 문화해석론도 아니고, 오히려 원칙적으로 역사의 정치철학의 책이다. 「파리 : 19세기의 수도」의 처음 노트를 읽었을 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기대한 것은 이것이었다. 

 『파사주론』은 미학, 도시론, 사회학, 역사학 등 이른바 이종혼합적인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그런 특징을 넘어서, 이 책이 전개하는 것은 분석철학의 조류에서 유행하고 있듯이, 역사의 의미를, 더 간결하게 말하면 역사인식의 틀을 철학적으로 파악한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철학적 인식과 현재의 철학적 존재론 사이의 정치적 관계, 즉 역사의 정치에 관련된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관계는 독립적 형태로 방법론으로서 미리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책의 내용 그 자체이며, 그 전체에 새겨져 있다. 즉 이것은 무엇인가를 언표하고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몽타주 장치를 통해 역사인식의 정치적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책인 것이다. 의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다양한 단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단순하게는 말할 수 없는 의미를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관건[내깃돈]으로 삼고 있다. 벤야민의 철학적 인식이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파사주론』은 미학, 역사기술, 사회, 정치 등 여러 차원의 역사인식을 통합하는 중심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을 통해서 그는 '역사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얘기하고 있다. 역사 개념에 대한 벤야민의 유명한 테제는 아도르노의 배려에 의해 이미 50년대에 출판됐지만, 이 테제는 『파사주론』과 독립된 형태로 읽혀져서는 안 되었다. 공교롭게도 따로따로 수용됐기 때문에, 벤야민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역사철학을 전개시키려고 했다고 간주되고, 19세기에 관련된 매우 특이한 조사는 떼어내져 버렸다.[각주:16]

  그의 인식이론에서는 페티시즘, 판타스마고리아, 무의식, 꿈, 몽상, 잠, 각성[잠에서 깸], 눈을 뜸, 기억, 신화적 이미지, 변증법적 이미지, 상기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영향의 혼합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만, 그 주된 것은 마르크스, 루카치, 프로이트, 프루스트, 초현실주의이다.  다만, 이미 첫머리에서 설명했는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파사주론』과 프로이트의 저작의 관계이다. 실제로 벤야민은 꿈, 모앙, 판타스마고리아 같은 정신분석의 개념을 자신의 분석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다만 그는 꿈이나 판타스마고리아를 개인적 심리상태의 차원이 아니라, 파리의 파사주나 만국박람회처럼, 집단이 물질이나 도시를 통해 구현되는 차원에서 이해한다. 또한 오스만, 블랑키, 푸리에, 보들레르 등과 같은 상징적인 역사적 인물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즉, 벤야민은 프로이트처럼, 개인의 심리의 현상에서 출발해서, 정신분석적 해석에 입각해 숨어 있는 논리적 구조를 해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구체적인 역사적 물질에서 출발해, 정신분석적 수법(꿈해석)에서 착상을 얻은 해석을 시행하는 것이다. 파사주나 만국박람회는 물질적 현실인 동시에 판타스마고리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로 자본주의의 상품 페티시즘의 욕망을 나타내며, 계급투쟁이 없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유토피아적 소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판타스마고리아의 현상은 맑스에 있어서는 경제이론에 한정되고, 아도르노나 루카치에 있어서는 맑스가 확립한 페티시즘 현상의 틀 안에서 설명되었다. 하지만 벤야민에 있어서 판타스마고리아 현상은 더 나아가 역사구조의 중핵에 위치지어진다. 즉, 판타스마고리아는 자본주의와 그 물질화라는 형태로 19세기 파리의 생활양식의 모든 수준에 침투해 있는 것이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소외적이고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현상을 모순된 변증법으로서 표현하고, 게다가, 이 변증법은 이른바 19세기의 틀을 넘어서, 다음 세기로 연관하는 듯하다. 바로 이것이 『파사주론』의 철학적 힘인데, 꿈 개념은 지나가버린 시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시現在時로 연장된다. 19세기는 다음의 시대를 규정하고 조건짓는다. 즉, 벤야민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사회적 현실이며, 어떤 시대의 잠 ― 그 꿈이 더 나아가 우리 시대를 조건짓는다 ― 인 것이다. 즉, 벤야민은 추모적 상기의 작업의 계기를 이루는 "[잠, 꿈에서] 눈을 뜸=각성"과 꿈 개념을 관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개인의 심리에 있어서의 정신분석의 상기와 유사한, 꿈의 작업의 도달점을 이루고, 몽상의 출구나 해방의 조건을 이루는 "각성"과 꿈 개념을 관계시키는 것이다. 이리하여 『파사주론』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흔적은 해석상의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즉, 벤야민은 집단 수준에서 정신분석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는 35년의 편지에서 그것은 융 심리학의 아류라고 지적하고, 벤야민은 융과 선을 긋는다고 자기 변호했다.[각주:17] 벤야민의 말투는 그렇다고 치고, '각성' 개념 ― 꿈이나 판타스마고리 개념을 보완하는 개념 ー 의 사용에서부터, 그는 결국, 프로이트에 가깝다고 가정할 수 있다. 즉, 프로이트의 임상실천에 의한 마력에서의 해방의 구조 속에는, 벤야민의 각성 개념과 유사한 것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벤야민이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 개념을 사용하면 몇 가지 문제나 아포리아가 반드시 생겨난다. 다음 장에서는 이를 살펴보자. 


Ⅲ. 『파사주론』에서의 벤야민의 아포리아 

 꿈과 깨어남의 물음은 『파사주론』 전체를 통해서, 벤야민 식의 역사기술의 방법과 결부된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 망라적인 분석을 행할 여유는 없으나, 역사기술과 꿈이나 깨어남의 관계에 관해서, 『파사주론』의 K 분류에 수록된 몇 가지 단장断章을 인용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그것과 함께 꿈에 가득 찬 새로운 잠이 유럽을 휩쓴 하나의 자연현상이며, 그 잠 속에서 신화적 힘들의 재활성화를 동반하는[따르는] 것이었다.[각주:18][K1a,8]

19세기는 개인적 의식이 반성적 태도를 취하면서, 그런 것으로서 점점 더 유지되는 반면, 집단적 의식은 점점 더 깊은 잠에 떨어지는 시대〔Zeitraum〕(혹은 시대가 꾸는 꿈〔Zeit-traum〕)이다.[각주:19][K1,4]

기디온의 명제로부터 더 전진하기 위한 시도. '19세기에 건축 구조는 하위의식의 역하을 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건축 구조는 흡사 꿈이 생리적 과정이라는 발판에 들러붙어서 태어나듯이, 그 주위에 이윽고 '예술적인' 건축이 들러붙는 신체적 과정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바꿔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각주:20][K1a, 7]

여기에서는 꿈의 현상은 단지 개인의 심리현상이 아니라, 집단 수준에서 분석된다는 사고방식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다른 대목에서는 판타스마고리와 묶이고 있다. 

졸저의 조사는 문명의 이 물체화적 표상에 의해, 우리가 지난 세기부터 물려받은 새로운 생활의 형태들이나 경제적 기술적 기반에 선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하나의 판타스마고리에 돌입하는지를 나타내고 싶다.[각주:21]

 분명히 벤야민은 판타슴, 꿈, 몽상 같은 정신분석 또는 심리학의 범주를 사회・경제적인 차원으로 이행시키고 있다. 물론 이런 개념의 이행 속에서,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전개한 상품 페티시즘 개념의 흔적을 인식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극히 환상적인 성질을 이미 기술하고 있다. 상품과 주체의 관계는 페티시즘이라는 표현으로 규정되며, 이것은 "사태들의 관계의 판타스마고리 형식"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바에서는, 상품의 사용가치 자체는 전혀 신비가 아니더라도, 거기에는 '신비적인 가치'나 '혼' 같은 것이 부가되어 있다. 루카치도 또한, 『역사와 계급의식』의 「물상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이라는 장에서 물상화 현상에 있어서의 '환상적 객관성', 주체의 행동에 대한 그 영향을 강조했다. 상품은 그 외관에 의해, 욕망을 깨어나게 하며, 상기를 약속하는 그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힘을 성취시킨다. 욕망되는 대상이 끊임없이 연기되며, 유동적이고 표층적인 채로 머물기에, 욕구는 덧없는 현실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계열성, 나아가 로크의 "불안〔uneasiness〕", 헤겔의 악무한 같은 유명한 개념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플라톤이 감각적인 것이나 현상의 왕국에 입각해 덧없음을 기술한 것도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상품의 소유는 항상 사라질 운명에 있지만, 그러나 항상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상품은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그림자처럼 상징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지각을 구성하고, 객관성의 기준을 산출한다. 우리의 신체는 꿈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되며, 욕망이 무제한으로 투영되는 장이 된다. 이런 욕망의 지연에 출구는 없으며, 외관상 이를 정복할 수도 없다. 그것은 악몽의 특징을 띠며, 다나이데스[다나오스의 딸들]나 시지포스의 신화처럼, 마술적 내지 신화적인 관계의 불명료한 가혹함을 연상시킨다.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인간의 끝없는, 불가능한 노력의 허무함이 암시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악몽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이 항상 사라지고 만다, 그때마다 손 안에서 무로 돌아가버린다고 하는 악몽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페티시즘 이론에 남다른 특징을 덧붙인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어떤 시대 전체의 생활양식에 있어서 일반화된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품은 어떤 시대의 꿈이나 집단적 무의식에 바로 유혹을 거는 것이다. 장-미셸 팔미에는 벤야민의 사후 출판에 관한 연구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관계를 둘러싼 분석을 순수하게 경제학적인 것에 머물게 했으나, 벤야민은 페티시즘적 대상과 산보하는 관찰자의 복잡한 관계를 둘러싼 진정한 현상학을 묘사해냈다. 후자에게 상품은 사회 전체의 상징이나 소우주를 이루는 것이다."[각주:22] 이것은 『파사주론』의 서두인 「파리 : 19세기의 수도」라는 유명한 도입부분에서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 

개인은 오락산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기분전환에 잠기지만, 그 내부에서, 그는 밀집한 대중의 한 구성요소이길 계속한다. 이런 종류의 대중은 유원지의 제트코스터나 '회전장치'나 '애벌레'에 올라타,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즐기고 있는데, 그것에 의해, 산업적 혹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기대할 수 있는 전적으로 반동적인 복종에의 훈련을 받는 것이다― 상품의 지고권의 확인과 상품을 에워싼 다양한 기분 전환용 빛, 이것은 그랑빌의 예술의 숨겨진 주제이다. 그의 유토피아적 요소와 시니컬한 요소 사이의 불균형은 여기에서 생긴다. 생명 없는 물체의 묘사에 있어서의 그의 교묘한 기교는, 마르크스가 상품의 '신학적 변덕'이라고 부른 것에 대응한다.[각주:23]

 『파사주론』에서는 상품의 페티시즘적 성격을 꿈의 집단(Traumkollektiv)의 관념과 결부시킨다. 이런 연관은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구조가 아니라, 거꾸로, 19세기를 둘러싸고, 잠과 깨어남의 대칭 개념에 의해 정치의 기능을 상기의 역사서술의 내깃돈으로 하는 작업의 중핵을 차지한다. 물론 어떤 역사적 시대의 물질이나 도시의 현상에 있어서 꿈과 환상의 특징을 파악한 것은 벤야민뿐이 아니며, 그가 처음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1983년에 레모 보데이[각주:24]는 벤야민의 『파사주론』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분석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의 '물질적 의미론'을 논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루이 아라공의 『파리의 농민』 ― 벤야민이 찬양한 작품 ― 도 다시 주목해야 할 텍스트이다. 특히 오페라좌의 파사주」라는 제목의 텍스트에서, 아라공은 부동산 투기에 의해 소멸하고 있던 19세기의 파사주의 분석에 전념하고, 자본주의의 판타슴적 구조에 의해 산출된 그 시대착오적 모양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벤야민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정치적인 의미 ― 현재시에의 결정적인 방향 설정 ― 를 부여받고 응축되어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런 현재시에의 방향 설정은 잠에서 깨어남[각성]의 관념과 떼어낼 수 없다(벤야민에게 있어서 잠에서 깨어남[각성]은 꿈의 집단의 범주에 부수한다). 『파사주론』의 몇 가지 단편을 더 인용하자. 

19세기의 집단적 꿈의 현상형식은 무시할 수는 없으며, 또한 그런 현상인식은 과거의 그 어떤 세기를 특징짓는 것보다도 훨씬 결정적으로 19세기를 특징짓고 있다. ―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으며, 그런 현상형식들은, 올바르게 해석된다면, 매우 실천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항해하려고 하는 바다와, 우리가 떠나간 해변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하면, 19세기의 '비판'은 이 현상형식에서 시작해야 한다.[각주:25][K1a, 6]

〔…〕 내가 아래에서 제시하려는 것은 깨어남의 기법에 대한 시론이다. 즉, 추모적인 상기의 변증법적 전환 혹은 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인식하려고 하는 시도이다.[각주:26][K1, 1]

역사를 보는 데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이런 것이다. 즉, 지금까지 "일찍이 있었던 것"은 고정점으로 간주되고, 현재는, 더듬어가면서 인식을 이 고정점을 이끌려고 노력한다고 겨져졌지만, 이제 이 관계는 역전되고, 일찍이 있었던 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전환의 장소가 되며, 깨어난 의식이 갑자기 출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는 정치가 역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여러 가지 사실이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것이 되며, 그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상기의 작업이다. 실제로 깨어남은 이런 상기의 모범적인 경우, 즉 우리가 가장 가까운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자명한 것을 상기하는 것에 성공하는 경우이다. 프루스트가 깨어난 상태에서 가구를 실험적으로 재배치한다는 얘기에 의해 말하려고 한 것, 블로흐가 태어난 순간의 어두움이라는 표현으로 간파했던 것이, 여기에서, 역사적인 것의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확정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찍이 있었던 것에 대한 아직은 의식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지식의 발굴은 깨어남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각주:27][K1, 2]

 이런 세 가지 단편에 의해 역사인식의 조감도의 핵심에 벤야민의 방법을 뒷받침하는 개념들의 경첩이 놓인다. 그것은 곧 꿈의 집단(Traumkollektiv), 19세기의 비판, 깨어남(Erwachen), 추모적 상기(Erinnerung, Eingedenken), 과거(Gewesene), 현재(Gegenwart), 지금(Jetzt),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등의 개념이다. 

 우선 벤야민에 있어서, 꿈의 집단이란 대중심리가 물상화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의 생리학"에 관한 19세기의 실증주의적, 자연주의적인 방법보다도, 오히려 초현실주의적,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가깝다. 마리오 페첼라가 지적하듯이,[각주:28] 벤야민에게서의 집단적 무의식의 관념에 있어서 '변증법이 첫 번째 계기를, 깨어남이 두 번째 계기를 이룬다. 즉, 깨어남이란, 타자성을 띤 꿈으로 우리의 의식을 열고, 이해와 해석을 위한 순간이다." 이리하여 꿈의 집단은 현실 그 자체와 동일한 심리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역사적인 생활양식의 물질적 표현을 해석함으로써 역사가가 벗겨내는 상징적인 형식이나 상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벤야민은 융과는 달리, 이런 상징적인 형식들을 역사적 변화로부터 떼어내지 않고,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그의 모델이 된다. 즉 역사가의 사명은 집단에 관계하면서도, 개인의 분석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사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페첼라가 더 논하듯이, "특정한 문화에 있어서 작용하는 신화적 요소란 변증법적 사고가 독해해야 하는 꿈의 상징이다. 이런 비평 활동의 절박을, 자아와 무의식 사이의 통합의 결여로부터 신경증이 생길 경우에서의 개인의 분석의 절박과 비교할 수 있다. 프로이트 자신, 문명의 집단적 병을 고찰할 필요를 느꼈다. 이러한 요구에 무관심한 논리는, 현대의 대중의 격정 속에서 해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각주:29]

 그런데 벤야민은 "코페르니쿠스적 전개"라는 표현 속에서, 꿈과 깨어남의 관계 ― 이것이 역사기술의 작업에 정치적 차원을 부여한다 ― 를 둘러싼 모든 의미를 응축시킨다. 역사기술에 있어서 <일찍이 있었던 것(Gewesene)>은 역사가가 접근하고 관계해야 하는 고정점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있어서는, <일찍이 있었던 것>은 해석의 변증법에 의한 추모적 상기(Eingedenken)의 작동을 통해 위치를 바꾸고, 섬광처럼 현재시에 충격을 주고, 순간이나 지금(Jetzt)을 비연속적인 것으로 한다. 이리하여 『파사주론』의 작업은 비의지적 기억이나 연상의 작동을 결합한 프루스트적 상기를 연상시킨다. 억압되어 잠든 과거의 의식의 흐름을 그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일종의 유물론적 기호론은 깨어남을 초래하고, 시대의 물상화나 다음 시대로 계승되는 그 정치적 공허함의 허를 찌른다. 

 이렇게 논한 단계에서, 벤야민의 역사기술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이나 아포리아가 생긴다. 우선 첫째로, 몇몇 비평가가 시사하듯이,[각주:30] 벤야민은 각성 개념을 통해서, 역사의 주체라는 역사적 범주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깨어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깨어 있어야 하는 걸까? 누구를 통해 예기치 않은 깨어남이 생기는 것일까? 자신의 시대에 명석한 의식을 향하는 벤야민의 역사가를,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올빼미]에 포개보고 싶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벤야민은 몰래 역사주의를 다시 도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자신, 근대성의 마약적인 잠을 초래하는 요인으로서 역사주의를 명백하게 비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에서 부정되었던 진보 관념이 부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본주의의 페티시즘의 형식들 속에서 과거가 마비하고 잠들어 있으며, 그에 반해 현재시가 깨어 있다고 하는 진보적인 구도가 도입되는 게 아닐까? 벤야민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각성한 집단(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의식)이라는 전위적이고 본질적인 관념을, 게다가 각성한 민족이라는 개념(예를 들어 전체주의적 관념)을 재도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굴욕과 자유주의의 해악에 맞서서 "독일이여, 깨어나라"고 호소했다. 결국 벤야민은 빛이나 진리에 접근하는 특권적인 철학자-대화자라는 플라톤적 인물상을 부활시킬 우려가 없을까? 그것은 곧, 동물의 마력으로부터 처음으로 해방되고, 감각적 세계의 현상들 속에서 졸고 있는 집단을 깨우는 인물의 복권이다. 

 이런 의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집약된다. 벤야민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범주들을 채용하여 집단을 독해하면서도 후자가 우려하는 지평에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즉, 천계설이나 엘리트적인 전위주의 ― 이것이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에서의 "위인"의 이론을 가능케 한 것이다 ― 와 접근함으로써, 분석 치료의 전체주의적 관념이 생긴다는 우려이다. 그것은 대중에 선행하는 역사의식이 정념에 사로잡혀서 과거의 낡은 형식을 오로지 파괴하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이런 물음은 이리하여 깨어남의 종말론적・신학적 관념을 경유하여, 주술사나 세기말의 지도자 같은 카리스마적 재능으로 귀착하는 모종의 신학정치와도 닮아 있다. 벤야민의 정치적 사상이 물리칠 권위적인 온정주의와 관계하는 것이다. 


Ⅳ. 정신분석과 각성의 세속적 구조 

 우리는 정신분석의 모델을 바탕으로, 이런 아포리아로부터 『파사주론』을 구출해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는 정치적 역사기술에 입각해 그 의의를 다시 방향지을 수 있다. 깨어남에 대해서는 두 개의 모델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본질화된 집단 개념과 결합된 깨어남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의지적 기억이라는 프루스트적 기법과 결합된 깨어남이 있다. 그것은 꿈의 기억을 둘러싼 정신분석의 작업에 가깝다. 후자의 모델에 따르면, 깨어남은 시대에 앞선 의식의 도입이 아니라, 각자가 어떤 해석 기법에 의해 성취되어야 할 상기의 결과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파사주론』은 식견 있는 집단이 필연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현재의 조건이나 생활양식이 과거에서 유래하는 꿈이나 무의식의 구조에 얽매여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작업의 관점을 연 것이다. 정신분석이 드러내듯이, 각성의 진정한 경험이란 유물론적 역사가가 예기하고 기술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시대가 스스로에 대한 정치적 작업 ― 이것은 데리다의 "꿈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실천(각주 13을 참조)과 불가분하다 ― 으로서 이뤄져야 하는 경험이다. 벤야민에 있어서, 유물론적 역사기술은, 시대에 선행하는 "위인"이나 새로운 역사적 영웅에 대한 주의주의적인 호소로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신비를 드러내는 아이러니라는 더 겸허한 차원에 위치된다. 이제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아이러니에 의해, 우리는 운명의 마력의 허를 찌르고, 과거의 찬스[기회]를 새롭게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찬스는 집단이나 선택된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다. 즉, 메시아주의는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열림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다(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밝음〔Lichtung〕'[각주:31]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다시금 인용하면, "아무도 증인 대신 증언하지 않는다"(주1을 참조)는 것이며, 바로 각자가 유물론적 몽타주에 의해, 역사기술의 흐름을 뛰어넘어, 역사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우월 ― 벤야민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중핵을 이루는 생각 ― 을 개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벤야민의 단장을 두 개 인용한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하면, 19세기의 '비판'은 이 현상형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즉, 착수되어야 할 것은 19세기의 기계론이나 동물기계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19세기의 마취적인 역사주의나 그 가장벽(仮装癖)에 대한 비판이다. 누가 뭐래도, 그런 가장벽(仮装癖) 안에야말로, 진정한 역사적 존재의 신호가 숨어 있다. 이 신호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이 신호를 해독하는 것, 이것이 당분간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혁명적・유물론적인 기초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여기서 화제가 되고 있는 진정한 역사적 존재의 신호에 있어서 19세기의 자신의 경제적 기초를 최고도로 표현한다는 것의 충분한 보증이 될 것이다.[각주:32][K1a, 6]

모든 역사적 사건은, 메시아 자신이 도래해야 처음으로 완성된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 의미하는 바는, 역사적 사건과 메시아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메시아 자신이 처음으로 구제하고 완성하고 창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인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자신만의 힘으로, 자신을 메시아적인 것으로 관계시키려고 바랄 수 없다. 따라서 신의 나라는, 역사라는 가능태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신의 나라가 목표로서 설정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의 나라는 목표가 아니라 종언이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신의 나라라는 생각 아래에서 수립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신정정치에는 정치적인 의미는 없으며, 오로지 종교적인 의미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정정치가 가진 정치적 의미를 철저하게 부인한 공적에 있어서는, E.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각주:33]


 깨어남의 기법이 가져올 비판적 차원은, 벤야민의 역사적 메시아주의를 매우 특수한 것으로 한다. 즉 메시아주의가 정치적인 것의 신학화가 아니라, 역사를 정치화하는 충돌로서 이해된다. 이 충돌에 의해 시간은 내재적인 진보의 타성에서, 신의 초월성에 의한 신학적 기회주의에서 벗어난다. 



  1. P. Celan, Aschenglorie, in Strette, Mercure de France, 1971, tr. A. Bouchet, pp. 48–51, repris de J. Derrida, Fichus, Paris, Galilée, 2002, p. 51.〔『フィッシュ』逸見龍生訳、白水社、二〇〇三年、六六頁〕 [본문으로]
  2. P. Ricoeur, La mémoire, l’histoire, l’oubli, Paris, Seuil, 2000.〔『記憶・歴史・忘却』久米博訳、新曜社、二〇〇四―〇五年〕. 트라우마와 역사적 이야기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María Inés Mudrovcik, Historia, narración y memoria(Buenos Aires, Paidós, 2007)를 참조. [본문으로]
  3. S. Freud, Psychologie des masses et analyse du moi (Massenpsychologie und Ich analyse, 1921), OEuvres Complètes, vol. XVI, Paris, PUF, 2003〔「集団心理学と自我分析」、『フロイト全集17』須藤訓任他訳、岩波書店、二〇〇六年〕; G. Le Bon, Psychologie des foules, Paris, PUF, 1991.〔『群衆心理』櫻井成夫訳、講談社学術文庫、一九九三年〕 [본문으로]
  4. 이 표현은 프랑수아즈 프루스트의 것이다. "시간은 <두 번> 지나간다. 시간은 한 번은 죽은 이미지, 공허한 시간, 과거의 추억이 된다. ... 하지만 동시에, 시간은 지나감으로써 다른 장소에 새겨진다. ... 이것이 두 번째 시간, 두 번째 과거, 즉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첫 번째 시간의 그림자이다. 우리는 보는 자가 이 그림자를 부각시키고, 재독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Françoise Proust, L’histoire à contretemps. Le temps historique chez Walter Benjamin, Paris, Cerf, 1994, p. 104. [본문으로]
  5. 역사실증주의나 역사주의와 벤야민의 대립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日本語訳は『ベンヤミン・コレクションⅠ』ちくま学芸文庫、一九九五年などに所収〕에서 명백하다. 특히 테제 Ⅵ, ⅩⅥ, ⅩⅦ를 참조. [본문으로]
  6. 「역사의 개념에 대해」의 테제 ⅩⅣ 등을 참조. [본문으로]
  7. 장-미셸 팔미에는 벤야민의 사후 출판에 관한 최근 논고에서 판타스마고리의 내적 변증법을 해명하고 있다. 이 변증법은 상품 물신주의와 황금시대의 유토피아를 함의한다. 이런 이중성은 물신주의 현상에 대한 순수하게 맑스적, 혹은 아도르노적 사고방식과는 선을 긋는다. 왜냐하면 후자는 물신화된 상품에 있어서의 의식의 소외밖에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cf. J.-M. Palmier, Walter Benjamin. Le chifonnier, l’Ange et le Petit Bossu, Paris, Klincksieck, 2006, p. 447f. [본문으로]
  8. 「역사의 개념에 대해」의 테제 Ⅰ에 묘사된 유명한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를 참조. 일반적으로 이 테제는 맑스주의의 신학적 요소를 지적한 대목으로 간주됐다. 그렇다고 한다면, 속류 맑스주의와는 다른 맑스주의를 벤야민은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목적론적 신학과, 역사의 연속을 현재시에 있어서 단절시키는 메시아주의가 있다. 자동인형의 알레고리에 있어서, 난쟁이[小人]는 거짓 자동인형이 모든 승부에서 이기도록 했지만, 이것은 이중의 해석을 띤다. 한편으로 그것은 벤야민이 격투한 역사적 기계론의 경향이다. 이 경우, 신학적 요소는 속류 역사주의나 진보주의 같은 목적론적 성격을 두르고, 현재시의 행동을 무디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메시아적 시간이며, 그 기회chance는 그때마다 꽉 쥐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작용하는 것은 모든 점진적인 기대를 경시하는 비속류적 유물론이다. 점진적 혁명에 의한 천년왕국의 테제와 마찬가지로, 속류 맑스주의는 어떤 패배도 피하고, 완전무결하게 되지만, 자동인형장치는 이런 협잡의 메커니즘의 뒤통수를 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는 현대의 사이버네틱스 장치에 의해 반전되는 게 아닐까? 살아 있는 인간의 배후에 지능 로봇이 숨어 있고, 목적론적 신학의 역할을 맡는다고 하는 사태를 상상해보자. 숨겨진 지능 로봇이 인간 대신 게임을 하고, 모든 승부에서 이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이 자신의 게임을 할 여지가 없어진다. ... 역사의 맑스주의 내지 목적론적 신학은 현재시를 무디게 하고, 끝없는 가상성에 우리를 내맡긴다. 이런 가상성은 사실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고, 승부에 한 번도 패하지 않고, 하지만 그 때문에, 역사의 행위자는 자신의 게임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 분명히 벤야민은 역사에 관한 텍스트에서, 이런 자동인형의 반전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사주론』 서두에서는 미슐레의 "어떤 시대에도 그것에 이어진 시대를 꿈꾼다"는 문구가 인용되고 있는데, 그 의미를 깊게 이해하면, 이것은 충분히 시사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자동인형은 현대의 틀림없는 자동인형을 예견한 판타스마고리적인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현대의 자동인형은 인간이나 행동, 정치에 있어서 더욱 가혹하고, 어찌할 수 없이 무적이다. [본문으로]
  9.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꿈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는, 그것과 더불어 꿈에 가득 찬 새로운 잠이 유럽을 습격하는 하나의 자연현상이며, 그 잠 속에서 신화적인 힘들의 재활성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K1a,8]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Le livre des Passages, Paris, Cerf, 2006, p. 408.〔『パサージュ論』今村仁司他訳、岩波現代文庫、二〇〇三年、第三巻、一二頁. 이하 Le livre des Passages는 P-W의 약칭으로 표기한다. 일본어 번역본은 岩波現代文庫版의 권수와 쪽수를 나타낸다.〕 [본문으로]
  10. 벤야민의 텍스트에 있어서의 몽타주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F. Naishtat, « La historiografía antiépica de W. Benjamin. La crítica de la narración en las Tesis « Sobre el concepto de historia » y su relación con los dispositivos heurísticos del Passagen-Werk », Actas del II Congreso Internacional de Filosofía de la Historia, Buenos Aires, 2008. [본문으로]
  11. 흥미롭게도 벤야민에게서 혁명은 목적의 왕국의 도래를 앞당기는, 역사라는 증기기관차에 대한 급속한 접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런 증기기관차의 급브레이크이며, 시간을 중지시키고, 위기의 발생을 먹어치운다. 정의를 위한 혁명의 진정한 개입은 천상의 왕국의 약속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게 아니라, 솔직한 '아니오'의 힘, 즉 거절이나 항의를 내뱉는 폭력을 동반한다. 급브레이크로서의 혁명에 대해서는 W. Benjamin, Paralipomena, Gesammelte Schcriften, 1–3, 1228–1252, Berlin, ed. Rolf Tiedemann, Suhrkamp를 참조. [본문으로]
  12. J . Derrida, Fichus, op. cit., pp. 20–21.〔『フィッシュ』前掲、二三頁〕 [본문으로]
  13. P-W., p. 493 [N10, 3].〔第三巻、二一七頁〕 [본문으로]
  14. 칸트에게서의 이성의 역사를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현대성과,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의 점진적 혁명의 가상성의 대립에 관해서는 다음의 졸고를 참조. F. Naishtat, « Revolution, discontinuity and progress in Kant. Copernican revolution and Asymptotic revolution in critical philosophy », Proceedings of the Xth Kant International Congress, Berlín, Walter de Gruyter, 2008. [본문으로]
  15. 특히Rita Bischof et Elizabeth Lenk, « L’imbrication surréelle du rêve et de l’histoire dans les Passages de Benjamin », in H. Wismann compilateur, Walter Benjamin et Paris, Paris, Cerf, 1986, pp. 179-200. [본문으로]
  16. 이 점에 관해서는 F. Naishtat, « La historiografía antiépica de W. Benjamin. La crítica de la narración en las Tesis « Sobre el concepto de historia » y su relación con los dispositivos heurísticos del Passagen-Werk », op. cit. [본문으로]
  17. 『파사주론』의 K 및 N을 참조. [본문으로]
  18. P-W, p. 408.〔第三巻、一二頁〕 [본문으로]
  19. Ibid., p. 406.〔第三巻、七頁〕 [본문으로]
  20. Ibid., p. 408.〔第三巻、一二頁〕 [본문으로]
  21. P-W,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Exposé de 1939, Introduction, op. cit., p. 47.〔第一巻、三五頁〕 [본문으로]
  22. J.-M Palmier, op. cit. p. 458. [본문으로]
  23. P-W,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Exposé de 1939, section B. « Grandville ou les expositions universelles », op. cit. p. 51.〔第一巻、四四頁〕 [본문으로]
  24. Cf. Remo Bodei, « L’expérience et les formes. Le Paris de Walter Benjamin et de Siegfried Kracauer », in H Wisman, op. cit. pp. 33–48. [본문으로]
  25. P-W, p. 408.〔第三巻、一一頁〕 [본문으로]
  26. Ibid., p.405.〔第三巻、五頁〕 [본문으로]
  27. Ibid., pp. 405-406.〔第三巻、六頁〕 [본문으로]
  28. Mario Pezzella, « Image mythique et image dialectique. Remarques sur le Passagen-Werk », H. Wisman, op. cit., pp. 517–428. [본문으로]
  29. Ibid. [본문으로]
  30. Cf. notamment Rita Bischof et Elisabeth Lenk, op. cit. [본문으로]
  31. Martin Heidegger, « La fin de la Philosophie et le tournant », in Questions IV, Paris, Gallimard, 2005, p. 295. [본문으로]
  32. P-W., p. 408.〔第三巻、11-12頁〕 [본문으로]
  33. Theologisch-politisches Fragment, GS II, 1, 203, en W. Benjmin, La dialéctica en suspenso, Santiago de Chile, Arcis, 1995, pp. 181–183.〔「神学的・政治的断章」、『来たるべき哲学のプログラム』道籏泰三訳、晶文社、一九九二年、三六〇頁〕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분류없음 2018.04.25 19:30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자폐증인가도착인가

치바 지금의 얘기와 연결될지는 모르겠지만마츠모토 씨는 이번 책에서는 도착 개념을 옆으로 치워둔다는 식으로 글을 쓰셨네요.

 

마츠모토 정신병과 신경증의 굳건한 이항대립을 제시하고그것이 후기가 되면 탈구축되어간다는 식으로 정리했습니다여기에 도착 개념을 집어넣으면정리가 좋지 않게 된다는 속내도 있습니다만원래 프로이트의 단계에서 도착 개념은 제대로 된 개념으로 수립되어 있지 않다고 제가 생각한 것도도착을 배제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도착을 규정하는 메커니즘은보통 부인이라고 간주되죠제가 쓴 프로이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적었습니다만사실 부인’ 개념은 정신병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꺼내진 것입니다그리고그 다음으로 페티시즘을 설명할 때 부인이라는 단어가 전용(轉用)됩니다만그것은 어머니의 페니스의 부재에 대한 태도를 논하는 것이지구조로서의 도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게다가 가장 말년에는 부인은 자아분열로서 일반화된다모든 주체의 구조화에 있어서, 어머니의 페니스의 결여를 부인한다는 사태가 일반화되는 것입니다.

    라캉의 도착론은 프로이트의 도착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라캉도 도착을 부인에 의해 생각하는 시기가 있습니다만진정으로 라캉적인 도착 개념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세미나 10권의 불안에서 11권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 이르는 여정에서입니다거기에서는 도착자倒錯者는 자신이 대타자(=대문자의 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라는 것은대타자(A)한테서 비어 있는 구멍을자신이 대상 a가 되어 메워나가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노출증자는타자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신의 페니스를 꺼내고 그것을 메워나간다는 것입니다그것은 물론 부인은 아니지만그러나 원리로서 부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는 표현을 사용해 도착 개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리고 논문 칸트와 사드가 보여주듯이신경증자의 판타슴은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생각됩니다신경증자는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대타자가 향락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을 참을 수 없으니까신경증자는 여러 가지 회피의 술책을 부리는 것인데요도착자는 현실에서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되어버린다그래서 신경증과 도착자는 네거티브라고 하는 것입니다라캉의 이런 도착 개념은 대략 60년대 종반(14권 환상의 논리, 16권 어떤 대타자에서 타자로)까지 유지되지만그 후 라캉의 논의에서는 도착 개념이 놓일 장소가 없어져버립니다.

 

우츠미 대문자 타자가 몰락하기 때문 아닙니까?

 

마츠모토 대문자 타자의 이론적 가치가 내려가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예를 들어 생톰』 세미나에서, “도착(perversion)”을 패러디한 아버지를 향하는 방향(père-version)”에 대해 라캉은 얘기합니다만이 단어는 이 시점에서는 도착의 새로운 개념으로 제출되는 게 아닙니다아버지가 복수로 있는 시대가 됐기에보로메오의 매듭을 매는 방식이나섹슈얼리티나 상징적인 것의 조직화의 방식은 버전 차이의 아버지라는 형태로 복수로 있어도 좋지 않은가라는 논의의 맥락에서 ‘père-version’이라는 말장난을 제출하는 것입니다이렇게 되자 역시 라캉의 논의에서도 도착 개념이 놓일 장소가 없어져 버립니다.

    최근 프랑스에서 논의되고 있는 도착 개념에는 크게 나눠서 두 가지가 있으며, ‘보통 도착과 일반화 도착이라는 개념입니다이것들도 또한 도착 그 자체를 구조로서 주제화하여 논하는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도착을 보통화하거나일반화하는 것입니다각자 각각의 별개의 흩어져 있는 상태인 일자론적 향락, ‘하나뿐인 일자라는 방식인 향락은그 자체가 규범적인 향락의 모습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도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그 논점을강조점을 바꿈으로써 일반화 도착이라는 방식으로 논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치바 그렇다면 일자론헤놀로지[hénologie]를 자폐증적으로 다루는 것을그대로 도착론이라고도 부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츠모토 그렇게 될 것예요.

 

치바 그렇게 되면자폐증이라는 말은 적어도 들뢰즈 안에서는 사용하기 어렵고제 경우는 도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게 된다.

 

마츠모토 프랑스의 라캉파에서도 자폐증아냐 도착이냐라는 선택이 있네요밀러파는 자폐증자에게서 볼 수 있는 일자론적 향락을 최근에는 어딕션 쪽으로 끌어당겨 논합니다만최근 분파한 콜레트 솔레르(Colette Soler)는 일반화 도착이라는 개념을 중시하고 있습니다이론의 중심을 자폐증 또는 어딕션에 둘 것인가도착에 둘 것인가라는 선택이 아마 있을 테죠.

 

우츠미 그것은 자폐증이 되면 타자가 나오지 않게 된다는 거죠.

 

마츠모토 정신분석을 추궁해 들어가면타자 없는 향락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그런 의미에서 자폐적이라는 문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그렇게 되면자폐증은 적어도 중기까지의 라캉 이론에는 설 장소가 없고후기 이론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물을 수 있다는 구도와 유비적으로도착이라는 것의 설 장소 없음도 생각하게 된다면.

 

마츠모토 그렇습니다보충해서 말한다면라캉의 이론에는 사실상 자폐증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라캉은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의 구별이 포퓰러하게 시작되는 81년에 사망했기 때문이죠그러나 라캉이 70년대 후반에 스키조프레니에 관해 행한 발언 속에는분명히 그때까지의 이론을 갱신하는 포텐셜을 갖는 사항이 나오고 있으며그것을 자폐증론으로서 끄집어낸 것이 최근의 라캉파의 논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츠미 과거의 분열병의 정신병리에서도자폐증론이 꽤 섞여 있습니다그곳은 우리가 끄집어내려는 작업을 해야 할 곳이네요.

 

마츠모토 그 작업을 도착 쪽에서 첨예화하려고 하는 것이 코노 카즈노리(河野一紀) 씨입니다토가와 코지(十川幸司) 씨도 최근에 도착에 주목하고 계시죠.

 

‘y’의 현장성

── 3월 21일의 제4회 도쿄정신분석 서클의 콜로케에서는 특이성을 말하는 것이 분석의 종결에 있어서의 모종의 매직워드가 되지 않았거나종결에 있어서 분석가 자신의 변화를 어떻게 초래할 수 있는가 등의 물음이 던져졌던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또한 보통 정신병이나 일반화 도착이라는 개념(이론)의 치료()적인 임플리케이션[implication, 함의]의 유무와 그 질에 대해서도.

 

우츠미 토가와 씨가 임상경험 속에서 미지의 저항과 만나 산출되는 극히 강력한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생톰론 등을 비판했더군요.

 

마츠모토 라캉은 임상으로부터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60년대 후반이 되면 그때까지의 이론을 정리하기 위해서만 이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토가와 씨의 진단입니다그러나 생톰의 논의를 만들 때라캉은 그때까지의 이론의 정리에 머물지 않는꽤 새로운 것을 내놓고 있다그것이 특이성의 주제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치바 토가와 씨의 도래할 정신분석의 프로그램(来るべき精神分析のプログラム), “사람 각각론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이번에마츠모토 씨의 책에도 그것과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도발적으로 여쭙습니다만정신분석 또는 정신과 의료 실천에 있어서특이성과 마주하는 것은 물론이고그 위에서뭔가 일반성 내지 규범의 틀을 끼우는 것의 의의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츠모토 라캉의 임상은 분석가의 강한 자아로의 동일화를 목표로 하는 자아심리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안티(anti)로서 나왔기에틀에 끼우는 방향이 아니라오히려 분석을 해서 자신의 향락에 충실해지고예를 들어 말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지향한다는 측면이 있네요그것은 확실히 사람 각각성의 긍정이라는 것이 되겠지만.

 

치바 : “사람 각각이 되었을 때뭔가 타자와 전혀 공생할 수 없는 폭력적인 것이 발로発露한다는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까그것이 있는 경우, “그런 것을 하지 않도록이라는 규범을 끼워 넣을 필요가 있지 않나요?

 

마츠모토 그것은 잘 하는 것” 속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현재의 정신과 임상에서 주류가 되고 있는 조작적 진단학은 도감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에 맞추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병자로부터 이쪽으로 향하게 해주는 벡터가 없다우리가 뭔가를 읽고임상가로서 촉발되는 것은그 논고가건너편에서 오는 것에 의해 변형된다고 느낄 때입니다오히려 병자에 의해 작성되고 있다고 할까이론이 삐걱거리고 있다고 할까그런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하며, “이것은 좋은 임상론이다라든가, “이것은 다르다라든가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치바 씨가 강렬도의 윤리로서 말한 것 ― 최저의 것을 긍정하는 것과 너무 설명하는 것” ― 은 임상가의 맥심[maxim, 금언]으로서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한 시기의 라캉파는 너무도 설명해버렸습니다마치 라캉을 대신한 듯한 주인의 담론에 의한 주장이라든가주인을 배경에 깐 대학의 담론으로 퇴색해버린 느낌이었습니다거기에 싱귤라리티를 갖고 옴으로써 너무 설명하지 않는’ 게 되어버린 것은 좋은 징후가 아닐까요?

 

마츠모토 세르주 르클레르(Serge Leclaire)가 말했듯이라캉파에서는이론을 점점 새롭게 갱신해가는 모티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실제로 분석할 때에는 이론을 전부 잊어버리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거든요.

    분석의 종결이 자신의 증상과 잘 지내는 것이라는 정식화에 대해서는기존의 노하우를 사용해 타협을 보다(savoir-faire)”와 “요령이 있다, 능란하다[빈틈없이 행동하다](savoir y faire)”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해야 합니다. “그 장소(y)”가 가진 현장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면접 현장의 세팅이나분석 주체의 삶의 방식 속에서그 장소 그 장소에서 어떻게 해가는가?

 

우츠미 그것이 본래의 정신요법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방금 말씀하신 인지 행동 요법 사이의 차이로군요. ‘y’가 하나 들어 있는가 아닌가이지만최근의 치료는 포뮬레숑(formulation) 대로 합니다그야말로 자구성이랄까그리고 그런 흔한 방식이 의외로 나쁘지 않은 곳도 있다(웃음). 다른 한편고전적인 정신요법가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해서모두 비슷한 것을 말하는데요, “오늘 내가 한 말을 잊어주세요라든가도이 타케오(土居健郎) 씨는 사사건건 항상 운수[임기응변]’이라고 말씀하셨고카와이 하야오(河合隼雄) 씨는 제 작업은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전력을 경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기억합니다.

 

마츠모토 라캉은 마지막에 그런 것을 이론화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치바 개별적으로 잘 하고 있다고 할 때뭔가 모종의 공통의 사회통념이나 뭔가가 개입한다고 생각합니다만 ― 그것을 저는 규범이라고 부릅니다 ― 그런 심급과 개개의 향락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마츠모토 그렇군요이념적으로 생각하면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 수 있겠지만분석의 섹션 속에서 행하고 있는 시점에서역시 틀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분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고모종의 행동요법적으로매주 같은 시간에 오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그런 외형적인 것의 효과도 아마 있겠네요.

 

우츠미 상당한 금액을 치르게 되니까요.

 

치바 뼈를 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규범이 작동하기 때문에, “잘 하는 것이 그래서 한정화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그러면모종의 사회론이랄까일반 인간론 같은 것으로서 특이한 생톰이라고 말한 경우개인의 정신분석 상황에서 작동하는 한정에 유비할 수 있는 것을 사회 일반 속에서 어떻게 위치지으면 좋을까이번에는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정기적으로 다니거나돈을 지불함으로써 체념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은일반론으로서 어떤 것인가?

 

우츠미 예를 들어 스키조프레니 임상이라면아까 말했듯이 관계의 싱귤라리티를 만들 수 있는가 여부이것이 치료자의 자질로서 요구됩니다그 안에서는환자 이상으로 치료자 쪽이 상대에게 의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것은 잊혀지고 있는 것 같고의국에서 젊은 무리들한테 정신분열증자와 만나고 있으면 한시름이 덜어지지 않니?라고 물었더니그렇다는 듯한 얼굴을 했습니다스키조프레니의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시간이 흐릅니다그런 싱귤라리티를 만드는 것은 조금 용기가 들지만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래서그 후에 어떻게 하니?”라는 단계에서사회와의 관계가 문제가 될 때뭔가 그들을 배신한다는 기분이 듭니다치바 씨의 말로 얘기한다면, “비의미적 절단에 의해 치료관계를 만들어 왔는데이번에는 의미적 절단을 하라고 말해야 한다사회에 이러저러한 제도가 있는 가운데스스로를 스스로가 지키라고 하게 된다면, 하루 돌봄[데이케어]를 부탁한다거나, SST(Social Skills Traing)를 하게 된다이때 자신도 기회주의적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지조는 없어도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二刀流でやるよりない자신이 담당하는 것은 관계의 싱귤라리티를 만드는 것어떤 안심할 수 있는 토포스를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만그러나 사회 복귀는 사회복귀로 할 수밖에 없다.

 

마츠모토 진찰실을 하나의 피난처로 삼는다고나 할까싱귤라리티를 공유할 수 있는 곳을 만든 뒤이로부터 일단 바깥을 향해 접속하기 위해의미 있는 절단을 하는 것이 필요해진다고.

 

우츠미 산뜻하게 나누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만그런 것이로군요.

 

치바 진료실이나 분석가의 오피스가 그런 형태에서의 아질[Asyl, (극빈자·부랑자 등의보호 시설, (범죄자 등의은신처피난 장소]이며신체를 다시 만들어가는 주형 같은 것으로서 기능한다그 기능은 일부러 다니는 것의 큰 의의이죠만약 그런 곳에 다니지 않고 사회 속의 어딘가에서 그것을 조달할 수 있다면누구든 의사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으니까요.

 

마츠모토 정신과 의사의 진찰실과 정신분석가의 오피스라면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정신과 임상의 경우예를 들어 정신분열증 환자에 대해서는, “선생과 만나니 안심한다” 같은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장을 우선 확보할 수 없으면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다른 한편분석의 장은 결코 그런 의미에서 안심하게 해주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죠.

 

우츠미 스키조프레니의 경우에는 직접 사회와 접속해버립니다예를 들어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알린다든가남에게서 생각이 들어온다든가이것들은 증상에 등록되어 버리지만그러나 사실입니다사실사회란 그런 거예요그것에 대해 우리는 무슨 까닭인지 셔터를 내리는데그들은 내리지 못한다그런 호소는 대체로는 [귀담아들어주지 못하며거칠게 말하면 병이기 때문에 약이” 된다病気だからとなる약은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좋다고 하더라도호소는 전혀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다그만큼 사회로부터의 벡터가 직접 들어오기 때문에관계의 싱귤라리티를 만드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다만거기서 일단 안전보장감을 얻고그 후 사회로 돌아온다고 할 때치료자로서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마츠모토 숨기고 있고그러면 어떻게 바깥으로 꺼낼 것인가라는 데 어려움이 있죠정신분석도캐비닛의 소파에 숨기고분석 주체에게 공상하기 위한 스페이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니까그런 의미에서는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다만 정신과 임상처럼 본인을 전인격적으로 숨기고 있다기보다는본인 속의 공상을 전개하는 스페이스를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죠.

 

***

마츠모토 제 책에서는 라캉 대 들뢰즈-가타리라캉 대 데리다 등 기존의 대립을 재고하고후기 라캉이 가진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에 대한 모종의 가까움을 강조한 것인데요이번의 간담을 통해그 가까움이 보다 명확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그 가까움을 인정한 다음에더 미묘한 차이나 대립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나, ‘y’의 현장성을 더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과제로서 전망됐습니다앞으로 그 작업은 임상과 사상의 양자의 교점에서 이뤄지지 않을까요오늘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우츠미 타케시정신의학/정신병리학)

(치바 마사야철학/표상문화론)

(마츠모토 타쿠야정신병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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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재장전 또는 긍정과 도주

: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성 유물론 소묘

マルクス・リローデッドまたは肯定逃走

ドゥルーズ/ガタリの偶発性唯物論素描

마츠모토 준이치로(松本潤一郎)

情況第三期第四券第十一号, 150-179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서 사고되어야 한다.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10

 

 

모순에 의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서술

역사를 다시[고쳐] 쓰는 <역회전(revolution)> 

혁명적 잠재력이 어떻게 현행화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전의식적 상태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정확한 순간에 실제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절단>이다.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인과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다시 쓰기를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AO, pp.453-4).

* 한국어판 : 혁명적 잠재력의 현행화는 이 잠재력이 물론 포함되어 있는 전의식적 인과성의 상태보다는 어떤 정확한 순간에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에 의해, 즉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에 의해, 말하자면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을 생산하는 인과성의 단절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L'actualisation d'une potentialité révolutionnaire s'explique moins par l'état de causalité préconscient dans lequel elle est pourtant comprise, que par l'effectivité d'une coupure libidinale à un moment précis, schize dont la seule cause est le désir, c'est-à-dire la rupture de causalité qui force à réécrire l'histoire à même le réel et produit ce moment étrangement polyvoque où tout est possible.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인과관계로부터 단절순간이라는 혁명의 잠재력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이런 미증유의 <실험> 시도의 제1탄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근본적 주장 중 하나는 이것이리라. 그리고 이 기획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일관한다. 그렇다면, 그러나 이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다음의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혁명으로서의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모순을 체현하는 계급의 한 쪽이, 그 모순의 최고 단계에 도달했을 때 저절로 찾아오는 필연적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 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먼저 계급은 기성의 모든 신분제·계층으로부터 탈코드화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AO, p.303), 그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계급이 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AO, p.302), 그리고 그 이름은 부르주아”(AO, p.303)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계급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계급-바깥(hors-classe)”이어야 한다(AO, p.303)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혁명의 내실은 이렇게 될 것이다, “혁명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권탈취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로부터의 자본그리고 노동도주라고.

이리하여 혁명은 이 말이 기존에 품고 있던 필연사관에 의해 뒷받침되는 뜨거운(쓰라린) 코노테이션(connotation, 함의)나중의 천 개의 고원의 화법을 구사한다면 마이너스 1”(MP, p.31)하고 있다. 즉 여기서 채용되는 입론 구성은 기본적으로 모순혁명의 원동력을 맡기는 노동자 본체론적 구상, 더 나아가 묵시록적 내지 목적-종말론적인 혁명구상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이로부터 들뢰즈·가타리를 읽는 것에 있어서는 주지의 논의, 즉 기존의 균일화된 노동자상 또는 계급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오히려 이로부터의 일탈로 규정되는 마이너리티도주로서의 혁명의 잠재력 맡기는 논의 구성이 대척적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 앞에서 인용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라는 의미에서, 역사의 역회전(revolution)”의 뉘앙스를 전면화시키게 되며, 그렇기에, 거기에 있어서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고 얘기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위와 같은 논점을 감안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는 역사의 인과관계로부터 해방된 무수한 사건이 이것임 hecceite”에 기초하여 개체화”(MP, p.318)하는 양상이, 거꾸로 스스로를 확립한 상태가 고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MP. p.32). 그것은 역사를 구성하는 질료-소재로서 생성변화의 질료-소재를 사용하는 것(MP, p.428)에 의해 역사로부터 누출-일탈해가는 을 측량하기 위해, 질료에 형상을 덧씌우는 형상-질료도식으로부터 질료-소재의 연속적 변화에 순종하는 질료[소재]-도식으로의 논점의 이행이기도 하다(MP, pp.509-12).

이렇게 매우 중요한 물음, 모순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를 기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들뢰즈·가타리에게 혁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상의 벡터에 있어서 역사에로 사건적으로 출현하는 이상, 그런 사람들의 도래는 사회 내부의 모순에 의해 담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 [내부] 모순들에 의해 정의된다는 주장은 잘못됐다(특히 맑스주의의 경우). 그러나 거대한 척도로 볼 때에만  그것은 참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커다란 척도로 사물을 본 경우에 한정된다]. 미시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그 도주선에 의해 정의되는데 이 도주선은 분자적이다”(MP, pp.263-4) On dit à tort ( notamment dans le marxisme ) qu'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contradictions. Mais ce n'est vrai qu'à grande échelle. Du point de vue de la micro-politique, 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lignes de fuite, qui sont moléculaires.

그렇지만 이러한 맑스주의자에 대한 강한 비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맑스주의자가 동요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로부터 곧바로 도출되는 맑스주의자에 의한 반문은, “그러면 모순에서 유래하지 않는 자본주의(분석)란 무엇인가?”라는 대척적인 질문이어야 하며,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려고 하는 미증유의 <실험>을 시도하려 들기 때문이다. ,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는 모순이 아닌 우발성”이라는 어휘로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가 기술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재생-이전된[재장전된] 맑스(Ma[t]r[i]x reloaded)가 있다. 모순이 아니라 우연에 자리잡고 자본주의 분석을 <실천>하는 맑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흠뻑 빠진자라고 들뢰즈가 규정한 맑스가 있다. 또한 그렇다고 한다면, 앞의 가차 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나중에 또 다른 어떤 인터뷰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은 맑스와 맑스주의에 의해 완벽하게 가로질러진 작품입니다. 현재 저는 저를 완전히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혹은 또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고쳐 쓰기라는, 거기에 있어서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역사의 역회전-혁명(revolution)”을 향해서, 이런 우발성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 분석이, 맑스로부터 논리 필연적으로 계승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춰서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당하며맑스가 정식화한 규칙들을 정확하게 따른다는 조건에서,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 회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정당하다”(AO, p.163), 또한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체의 음화(陰畵)이다”(AO, p.180)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도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단절>”,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는 논점을 상기한다면, “인과관계의 단절<우연성>으로서의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자본주의 분석이 불가피해진다는 것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세계사는 우발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며, 절단들과 극한[경계선]들의 역사이지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기”(AO, p.163 et passim) 때문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자본주의 그 자체가 <우발성> 내지 <조우>라는 <사건>에 의해 생겼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AO, p.265 et passim). 혹은 초기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으며, 거기에 노동자가 선행하는 시스템으로부터의라는 형태에 있어서 합류한다.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이런 사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들뢰즈가 말할 때,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연-조우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양태의 기술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까의 역사 ()기술의 문제와 관련해,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고 서술됐다는 것도 상기한다면, “욕망은 마음속의 <우발>적인 것이라는 것도 거기에는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욕망의 교차점이며, 그 하부구조, 그 경제 자체가 얼마나 욕망이라는 현상과 밀접하고 불가분한가를 알려면, 자본주의의 기원에 있는 우연성의 총량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죠라고 들뢰즈가 말할 때,우연성욕망”,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점차 밝혀지게 된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에 의한 강제적인 역사의 다시 쓰기라는 역회전-혁명적인 사태가 발생하기 위한 평면이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에 맹아적으로나마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 또한 그 근저에 자본주의그 자체의 우발적인 탄생이 가로놓여 있으며, 이 우발성과 욕망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러한 우발적 조우가 발생하는 평면이 내재평면혹은 공립평면이라고 불리며, 더 나아가 이 조우가 이른바 사건론으로서, “이것임이나 개체화같은 개념을 열쇠로 하여 세련된다는 것이 대략의 그 흐름으로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전망 하에서 이 글에서는 모순의 어휘가 아니라 우발성그리고 조우에 의거한,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의 작동양태, 나아가 그것에 평행선을 그리는 우발적인 세계사의 기술을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전에,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실험>의 전단계로서, 실험에는 가설이 불가결한 이상, 그들이 세운 <가설> 혹은 <실험>에 대한 일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때, 미셸 푸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발과 허구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탈코드의 게임은 우연에 맡겨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을 겪기 이전에 있는, 정보 시스템의 변조[교란] 내지 오인이다.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돌연변이와 진화 과정은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생명은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결코 자기의 장소를 찾아낼 수 없는 생[명]체에 도달한다. 그것은 방황하고 잘못되도록 운명지어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특이하고 유전적인 이 잘못이다. 푸코, 생명 : 경험과 과학

Au centre de ces problèmes, il y a celui de l’erreur. Car, au niveau le plus fondamental de la vie, les jeux du code et du décodage laissent place à un aléa qui, avant d’être maladie, déficit ou monstruosité est quelque chose comme une perturbation dans le système informatif, quelque chose comme une < méprise >. À elle aussi qu’il faut demander compte des mutations et des processus évolutifs qu’elles induisent. Elle également qu’il faut interroger sur cette erreur singulière, mais héréditaire, qui fait que la vie a abouti avec l’homme à un vivant qui ne se trouve jamais tout à fait à sa place, à un vivant qui est voué à < errer > et à < se tromper >.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시도한 미증유의 <실험> 및 그 준비로서 세운 <가설> 내지 <허구>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선으로, 여기서 푸코가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인쇄 허가를 내주었다고 하는 생명 : 경험과 과학의 논의를 경유하자. , 이 시점에서의 푸코의 논의로부터 소급적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의 논의 쌍을 우발-조우및 그것에 밀접한 <실험-가설>허구라는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이라고 말해도 좋은 과학사가 조르주 캉길렘의 과학인식론의 동시대적 의의를 논한 이 논고의 끝 부근에서, 푸코는 이번 절의 서두에 인용한 대목에서, 삶이란 오인에 다름없다, 생명이란 잘못일 수도 있는 것, “오인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생체는 우발성에 의해 횡단되고, “오류의 역량을 부여받았다. 오류가 진리와 짝을 이룬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짝을 창조-발명하는 것을 우리 인간이라는 삶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우발성이라는 점의 이해가 긴요하다. 그래서 진리를 이 근원적 오류로부터의 파생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개념이란 생명 자신이 이 우발성에 대해 주는 해답이라고 인정한다면, 오류는 인간의 사고 및 역사를 형성하는 것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진위의 대립, 진위에 부여되는 가치, 사회들이나 제도들이 이 분할에 연결되어 고려하는 권력의 효과 같은 것은 모두, 생명에 고유한 잘못될 가능성에 대한 뒤쳐진 응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류는 약속된 완성의 망각이나 뒤늦음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나 종의 시간에 고유한 차원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오류로서의 우발성에서 진리의 원천을 발견하는 이러한 관점은, 물론 니체의 계보학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위치되어 있을 것이다. 푸코 자신이 이 텍스트에서 니체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니체에서 보이는 이러한 진리에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불식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란 더없이 깊은 거짓말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에 가까운 동시에 먼 캉길렘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란 생명의 긴 연대기에 있어서의 가장 새로운 오류라고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진위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하고 얻은 가장 특이한 삶의 양식을 형성하고 있다, 생명은 그 궁극적인 기원 이래, 오류의 가능성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캉길렘에게 오류는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오류-우발성을 겪고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생체가 지닌 역량이다. “인간은 오류-우발성에 의해 삶을 촉발되며, 이 삶의 특이성을 해방할 수 있도록, 오류-우발성으로부터 그 삶에 있어서의 진리혹은 개념을 생산하고 벼려나간다. “오류란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이 말을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에 대한 헌사로 고쳐 읽는다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감행한 <실험>을 준비하는 <가설> 혹은 <허구>의 필연성이 이해될 것이다. 삶은 마음속 오류-우발성에 흠뻑 젖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근저에서부터 진리-허구이다. 그리고 그 일을, 그것을 측량하는 개념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긍정해야 한다. 이 뜻을 잃어버리지 않고,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을 뒤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들뢰즈·가타리로 돌아가자.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조우의 문제계로서 초점화되는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에서의 조우, 사유재산상품생산”, 혹은 자본가가 소유하는 변환 가능한 재화의 몇 가지 흐름자신의 노동력밖에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하나의 흐름”(AO, p.164), “노동자자본”, “생산자들의 흐름화폐의 흐름”(AO, p.266) 등 다양하게 표현되는 두 가지의 조우에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 요소가 조우하는 역사적 조건으로 들뢰즈·가타리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열거하고 있다. , “생산내지 자유로운 노동의 흐름 쪽에서의, “전제군주(야만) 기계”(통사적으로는 이른바 봉건제 사회”)로부터 문명(자본주의) 기계”(이른바 자본주의 사회”)로의 누출의 과정에 있어서의, 사기업화에 의한 토지의 탈영토화, 사적 소유에 의한 생산수단들의 탈코드화, 가정과 조합의 분리에 의한 소비재의 사적 사용, 노동으로도 기계로도 사용 가능한 노동자의 탈코드화가 그것에 해당된다. 다른 한편 자본의 쪽에 있어서는, 추상적인 통화에 의한 재화의 탈영토화, 상인자본에 의한 생산의 다양한 흐름의 탈코드화, 금융자본과 공공부채에 의한 국가들의 탈코드화, 산업자본의 형성에 의한 생산수단의 탈코드화가 관찰될 것이다(AO, p.267).

최종적으로는 노동자본의 두 개의 계열로 정제할 수 있는, 이상의 다양한 흐름의 변화 탈코드화 및 그 조우에 의해 생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가, “전제군주와는 그 지위status를 달리 한다. 이 점을 들뢰즈·가타리는 전제군주 기계는 공시적이지만 자본주의 기계의 시간은 통시적이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역사를 창조적으로 구축해가는 일련의 과정에 속속 등장한다”(AO, p.264)고 표현하며, 이것은 이른바 시계열적인 역사, 즉 진보나 발전 같은 19세기적인 역사관이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났다고 하는, 그 자체로서는 항식에 속한다고 말해도 좋을 사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 있어서 제시한, 인간을 가로지르는 시간”, 유한성에 기초한 노동”, “생명”, “언어의 변용의 틀 안에, 즉 푸코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역사,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그 자체를 기입하려고 하는, 또는 고쳐 쓰려고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실험>의 사정거리가, 엿보이게 될 것이다.

, 푸코에게 <역사>는 결코 시계열적인 사태의 계기(繼起)-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표(tableau)[굳이 번역한다면 표-] 내지 공간에 있어서의 미세한 균열의 발생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서두에 인용한 들뢰즈·가타리의 역사의 고쳐 쓰기, 이른바 진화-발전의 시계열상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는, 목적론적 의미에서의 혁명을 가리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간 내지 평면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존립평면내지 내재평면 위에 있어서의 자본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적인 조우를 가리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는 푸코의 뜻을 계승하고 있을 것이다. 천 개의 고원에서 비판되는 이른바 역사와는 별도의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우발적인 <역사>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사건, 여기서 이미 문제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는 앞서 말한 자본주의 발생역사적 조건중 하나인 노동의 탈코드화를, 이른바 통역사적 구분에 있어서의 로마 시대에서 보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로마 시대에 있어서도, 재산의 사유화로 인한 부동산의 흐름의 탈코드화, 거대한 재산의 형성에 의한 통화의 흐름의 탈코드화, 상품생산의 발전에 의한 상업의 흐름의 탈코드화, 재산 상실이나 프롤레타리아화에 의한 생산자들의 탈코드화 등의 사태가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전제군주 기계의 체제화에 있기 때문에 노예제를 산출하는것에 불과했다(AO, p.264)는 논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논점에 대한 각주에는 명백히 맑스에 대한 참조가 제시되고 있다. 다른 한편 자본의 계열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조건은 통역사적 시대 구분에 있어서의 봉건제시기에 이미 갖춰져 있었다고 간주되고, 사유 재산, 상품 생산, 통화들의 합류, 시장의 확장, 도시의 진전, 금납 지대·계약 임금의 출현 등 사태가 열거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들도 또한, 오히려 봉건적 하중·연관의 강화, 더욱이 원시적인 봉건제 단계 내지 노예제의 재건조차 산출하고 있는 등 사정을 이유로서, 그 자체로서는 자본주의 기계의 등장과는 반대의 결과를 이끌고 있다고 여겨진다(AO, p.264). 이런 통역사적 원근법으로부터 이탈된 지점에 있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고원개념이 확립되는 것은 명백하며, 이런 의미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얘기되는 고쳐 써진 역사, 이른바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도 명백할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가타리가 계획하는 필연성의 역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절단과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비연속적인 여러 가지 우발적 사건의 역사로서의 세계사의 기술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을 준비하기 위한 <가설>적 틀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곧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편력하는 기관 없는 신체위에서의 야만기계”,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며, 천 개의 고원에서의 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의 한 쌍의 개념에 의해 기술되는, “추상기계의 기계적 및 집단적인 이중의 어레인지먼트에 의한, 정주/유목, 포획/도주, 국가장치/전쟁기계, 홈패임/매끈함 등등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다.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된 모델과 천 개의 고원의 그것 사이의 최대의 차이점을, 전자가 생산의 양태에 중점이 놓인 반면, 후자에서는 예술·인문과학적인 분야를 넘어선 사회·정치적인 분야, 더 나아가 광물이나 동식물, 생물의 분야도 관통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교통내지 번역의 양태로 역점이 이동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서 생산 측면에서부터 유통 측면으로 논점이 전면적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 하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이렇게 제시된 <가설>적 모델을, 그것이 이른바 역사<실험> 재료-소재(matériaux)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갖고서 다름 아닌 역사바깥혹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을 찾아내려고 하는 <실험>이다 라는 점에서, 오히려 <허구> 내지 우화 만들기(fabulation)”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역사는 허구따위라는 것이 아니라, <가설>로서의 <허구>를 세움으로써 이뤄지는 <실험>에 있어서, 역사 속에 무수한 조우-우발성, 혹은 고원이 발견된다는 것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 푸코에게 개념은 우발성에 의해 생기는 <허구>였지만, 들뢰즈·가타리에게 그것은 동시에, 우발성과 조우하기 위한 <허구>이기도 하다. 우발-오류에 의해 촉발되고 세워지는 가설-허구에 의해, 거꾸로 우발적인 세계사야말로 이른바 역사의 도처에서 스캔[주사]될 수 있다고 하는, 이 상호적 관계 속에서 허구와 우발은 포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자본주의가 그런 세계사를 가능케 하는, <조우>로서의 출신을 갖고 있게 될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조우 : 몇 가지 이론적 <가설>

방법론으로서의 질적 분할

그렇다면 이 노동과 자본의 <조우>에는, 어떤 우연성이 발견되는가? 그것에는 자본의 축적에 밀접하게 관련되며, 다음의 두 가지 시기의 존재, 즉 우선 재화가 가치를 갖지 않고 그것을 모으는 데 유리한 기회”, 구체적으로는 재산-토지의 권리증서의 축적이 이뤄지는 시기, 이어서 이러한 재화의 가격이 오르고,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재화를 매각하는시기의 존재가 언급되며,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으로서 “‘가격혁명’, 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 원료자원[]에 대한 접근성, 도구·기계적 생산에 대한 호조건등이 있었다고 여겨진다(AO. pp.267-268). 따라서 여기서는 명백하게 맑스의 자본에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에 관련하여 노동자의 상품화<역사>적 우연성의 양상에 밀접하게 논해지고 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의 말은 결정적이다. , “모든 우연적(contingentes) 요인이, 이러한 조우적 연결들(conjonctions)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런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조우(rencontres)가 있었는가, 이렇게 명명할 수 없는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게 미치는 통제이다”(AO, p.268).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근저에서부터 우발적이며, “그러나그 생산양식을 침투시켜간다. 이런 그러나라는 이상한 접속이야말로, 자본주의는 오작동에 의해만 만사가 순조롭게 작동한다(les choses ne marchent bien qu’condition de draquer)”(AO, p.274)라는 원리를 알고 있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의 저명한 정식의 ()작동 양태에 다름없다. 그러나 그런 지적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앞서 열거한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우발-조우>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런 논의는, 맑스가 자본에서 논한 산업자본주의에서의 노동력의 상품화를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의 정당성이라고 얘기될 때의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를 가리킨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혹은 그 절단의 정의, 즉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한 모든 흐름의 조우적 연결은, 상인 자본에 의해서도 금융 자본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고, 그것들은 탈코드화나 탈영토화와는 다른 흐름, 다른 요소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AO, p.268). 그러므로 앞의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이 미치는 통제이다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하는 역사적 <우연성-조우> “이른바 본원적 축적, “그러나필요-필연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세계규모에서 반복되는 자본축적의 양태가, 아시아 등의 논의를 감안하여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고 명쾌하게 말해지고 있으며(AO, p.275), 이 관점은 물론 천 개의 고원에도 일관하고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반복되는 본원적 축적이라는 논점은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이 두 가지 잉여가치가 코드가 아니라 흐름 flux’의 잉여가치를 구성한다 사이의 영원한 불일치 나중에 보는 끝없는 이윤율저하경향라는 관점에서 분석되며(AO, pp.270-6), 게다가 이러한 자본주의의 작동의 핵심에 이윤율 저하 경향을 영원화하는 반생산”(anti-production)이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반생산주의로서의 무위(des-paevrement)의 공동체”(Jean-Luc Nancy)의 비판적 재검토를 요청한다 라는 논의가 이뤄지며,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본원적 축적이라는 폭력이, “포획장치또는 국가에 의한 이중적 폭력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비가시의 전제-메타수준으로 밀어 올린다 의 기제와 밀접하게 논의되고 있다(MP, pp.558-9)이라는 점을 확인해두자.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대해서는 마지막 절에서 역사와의 관계에서 다시금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앞으로 더 나아가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여기서는 철학자질 들뢰즈의 18번이라고 해도 좋은, 본성상 상이한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질적으로 분할하는 기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서도 완전하게 발휘되고 있을 것이다. 마조흐와 사드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결합관계도 발견되지 않은 듯이, 혹은 스피노자 윤리학이 서술 체계에 있어서 개체 사이에 나쁜 조우가 발생하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 자명하다고 간주되는 노임(salaire)”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화폐-자본, “본성상의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발-조우하는 양태가 <실험>적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가진 우발성에 기생하는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자본을 떼어내고, 각각을 그것 자체로서 파악함으로써, 모순에 기대는 것 없는 질적 분할에 의해 자본의 맑스가 여기서 재장전되고 있다. 거기서의 맑스는 이른바 유물사관에서 해방되고, “우발성의 세계사에 있어서 자본주의를 기술하는, 나중의 천 개의 고원에서 얘기되는 의미에서의 <역사가>이다. 따라서 맑스가 어떻게 재장전되어 있는가를 보기 위해, 질적으로 분할되어 각각 독자적으로 논의되는, 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코드의 잉여가치가 아니라 흐름의 잉여가치에 정위하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한다고 여겨지는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화폐의 이원성의 논의를 경유한 자본-화폐”, ②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형상-질료도식이 아니라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재장전된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도식의 반복으로서의 노동력을 둘러싼 논의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점을 감안한 위에서, 우발성 유물론에 기초한 재장전된 유물사관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논의되는 비신체적 형상으로서의 어레인지먼트”, “명령어등의 논점을 경유하여, “내재평면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1. “자본주의의 공리계의 표현으로 해석된 이윤율저하경향과 화폐의 이원성

맑스가 빠져 있는 예언”?의 하나로서 저명한(악명높은)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제창한다 이 방침은 천 개의 고원에서도 일관하고 있다(MP, pp.578-9) . “공리계란 단적으로는 코드에 있어서의 잉여가치흐름에 있어서의 잉여가치로 변용사키는 장치, 다시 말하면 자본의 출신형태로서의 화폐의 이원성(dualité de l’argent)”이며(AO, p.273), “자본주의는 화폐가 화폐를 낳고,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출신-친자 자본이 된다”(AO, p.269). , 통념과는 반대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끝나지 않는[=일치-해소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AO, p.271). 왜냐하면 자본과 노동력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 척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런 척도는 만약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설>로서의 순수한 허구이다(AO, p.273). , 우선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허구> 혹은 오작동에 의한 만사형통의 기예를 속속들이 알고-이용했다는 점이, 나중에 말해지듯이 중요하다. 어쨌든 들뢰즈·가타리는 이 기괴한 사정 말하자면 영원한 이윤율 저하을 설명하기 위한 문자()”로서, 미분의 비(Dy/Dx)를 제시할 것이다. , ‘Dy’가 노동력 혹은 가변자본의 유동을, ‘Dx’가 자본 그 자체, 혹은 불변자본의 유동을 구성하고, 자본의 출신-친자 형식으로서의 <x+dx> 즉 잉여가치는, ‘Dy’‘Dx’조우적 연결(conjonction)”에 의해 생긴다고 간주된다(이상은 AO, p.270). 그래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우발성 및 그 생산양식을 침투시키는 공리계로서의 작동이, 미분의 비에 있어서 완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음의 인용이 결정적이다. “경향적 저하는 극한(terme)을 갖지 않는다. 문제가 생산고의 견지에서 하는 생산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limite)라면 미분의 몫은 계산 가능하지만, 문제가 잉여가치가 생기는 생산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잉여가치], difference de natur...”(AO. p.273 강조는 인용자). 이로부터 유명한 테제, 자본주의는 자신의 끝-극한을 갖지 않는다혹은 극한을 스스로 치환함으로써 이 극한을 재생산한다라는 주장이 맑스에 대한 참조를 촉구하면서 도출된다(AO, p.273)는 것은 주지의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그것의 확인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공리계의 작동으로까지 관철되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조우>, 맑스에 의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재장전시킨/에 있어서 읽어 들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의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한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바의 잘못된 만남을 하고 있다 . 문제는 지양이라는 공통척도, “‘모순이 아니라 우발성”, ‘본성의 차이에 준거한 위에서 이뤄지는 자본주의의 출신의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성의 차이에 근거함으로써, 생명으로부터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관철되는 소재-도식의 연속 변화로서의 노동자의 역사가 기술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논점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상에서 개괄한 공리계의 구체적 작동양태의 아주 짧게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포획장치로서의 화폐를 둘러싼 논의를 일별해야 한다.

노동가 자본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의 증거로서의 두 가지 요소의 우발적 조우가, 잉여가치의 [종말]없는 발생으로서의 저하경향에 있어서도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예상되고 있으며, 화폐도 또한 이러한 이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 탈코드화되고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자유로운노동자를 노임관계 즉, 앞에서 본 미분의 비의 하나의 항인 <Dy>에 체류시키겠다는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재영토화의 기능을 갖는 동시에 코드들의 잉여가치를 흐름(flux)”의 잉여가치로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탈영토화하는 기능을 가진다. , 잉여가치 내지 이윤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두 가지 흐름 사이의 통약 불가능성 그렇지만 서로에게 내재하는 이 두 가지 흐름을 표현하는 화폐(monnaie)의 두 측면 사이의 어긋남에 의해 정의된다(AO, p.283). 이러한 이원성을 들뢰즈·가타리는 한편으로는 교환가치의[/라는] 무기력한 화폐의 기호들, 소비재들이나 사용가치들에 관련된 지불수단의 흐름, 화폐와 공정구역의 생산물 사이의 11 대응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강력함의 기호들, 융자의 흐름, 지금 여기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장기적인 어림셈 내지 예측 능력을 나타내는, 추상량들의 공리계로서 기능하는 생산미분계수의 시스템과 구별하고 있다(AO, p.271). 물론 이 재영토화의 기능, 가 탈영토화의 기능에 대응한다. 어쨌든 여기에 주지의 안티 오이디푸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양의적 평가를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은 명료하다. , 자본주의는 탈영토화와 동시에 재영토화를 행하는 것이며, 에 그 공리계의 작동이 제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원성의 장치로서의 화폐를 통제하는 것이 국가― 『천 개의 고원에서는 더 추상적으로 포획장치라고도 불린다 이며,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서의 화폐의 기원을 국가에 있어서의 세금징수에서 찾는 논의까지 일관하고 있다(MP, pp.552-3). 이러한 화폐의 이원성에 의해, 유통 측면 또는 시장에서의 이른바 교환은 반드시 화폐가 아닌 통화로서, 즉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있어서 실현된다는 점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 사족인데, 이른바 전지구화현황 분석을 위해서도, 이 논점의 파악은 최소한의 전제로 여겨진다. 거기서의 문제는 맑스의 등가교환론 내지 가치형태론을 착취(exploitation)”수탈(expropriation)” 중 어느 쪽에 밀접하게 연결시켜 이해하는가라는 양자택일로 집약되지만, 지금은 이 점을 젖혀 둔다. 자본제 내부에서는 교환은 항상 합법혹은 등가라고 (표상)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들뢰즈·가타리가 화폐-교환을 수탈론으로서 전개하고 있는 것은 명료하다. 자본제 내부에서의 교환에 정위하는 착취론은 자본제 그 자체의 성립이라는 -바깥의 폭력의 수준에 정위되는 수탈의 측면을 간과하기 쉬운 반면, 들뢰즈·가타리의 화폐론에서는 화폐의 이원성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또한 구매력으로서의 소비재와의 11 대응의 기능만 담지할 뿐인 통화는 탈영토화된 흐름flux”회귀-환류(reflux)”로서도 파악되고 있다. , “돌연변이의 역능을 가진다(a pouvoir mutant)”라고도 형언되는 이 화폐의 이원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통화는 환류를, 즉 이 통화의 노동자나 생산요인들(이른바 반노동일半労働日에 상당하는 소비재 인용자)에 대한 배분에 의해 구매력을 이 통화가 획득하자마자 수많은 재화와 맺는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AO, p.282). 흐름과 환류의 서로에게 내재하면서도 통약 불가능한 관계에도 우발적인 조우가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논점은 천 개의 고원13고원 포획장치에서 일종의 집합론적 조작 마술 또는 신비라고도 불린다 으로서 다뤄지고 있는데, 거기서은 단적으로 분배나 보수로 여겨지는 한에서의 노임[급여(salaire)]은 구매라고도 말할 수 없다. 반대로 구매력은 노임으로부터 생긴다On ne peut donc même pas dire que le salaire, conçu comme répartition, rémunération, soit un achat ; c'est au contraire le pouvoir d'achat qui va en découler”(MP, p.556)고 서술될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이 마술무로부터(ex nihilo) 창조라고 불리며, 자본제 내부에서는 잉여가치는 완전히 합법적인등가교환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누구도 훔치지 않는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맑스주의자를 도발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AO, p.283). 즉 여기서도 앞에서 언급한 포획장치에 의한 이중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래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의 이상에서 살펴본 화폐론이 수탈에 정위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점이 다시금 확인될 것이다. 따라서 이윤들은 수입[구매력 인용자] 창조의 흐름의 재가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의 일탈(déviation)에 있어서, 그것과 나란히(côte à côte) 유출한다”(AO, p.283). 이와 같은 화폐의 이중성을 둘러싼 논점을 바탕으로, 이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노동력을 살펴본다.

 

2. ‘소재-도식으로 쇄신된 생산력과 생산관계

우선 들뢰즈·가타리가 완전히 맑스 다만 재장전된 주의자이며, 따라서 교환주의자가 아니라는 것(AO, pp.224-6 et passim)의 확인이 긴요하다. 거기에는 또한 악명 높은(?) 맑스의 노동가치설특히 자본13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어서의 절대적 잉여가치설에 충실한 들뢰즈·가타리가 있고, 이 맑스에 대한 충실성(fidelité)”(Alain Badiou)가 겉보기에는 맑스에 대한 준거가 상대적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보다 적다고 생각되는 천 개의 고원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점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중요한 규정을 부여받았던 코드화, 탈코드화의 양태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인간적 틀을 넘어선, 무기물도 포함한 생명에서조차 발견된다고 여겨지는 잉여가치개념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 생명의 돌연변이 현상을 논한 3고원 도덕의 지질학에서의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조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ségmentarité)[코드의 구성요소 인용자]은 두 번 복제되며,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거기서 행해지는 것은 어떤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의 번역이 아니라 오히려 코드의 잉여가치 혹은 파생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부를 특이한 현상이 생기고 있다non seulement tout code a des suppléments capables de varier librement, mais un même segment peut être copié deux fois, le second devenant libre pour la variation. sans qu'il y ait traduction d'un code à un autre (les virus ne sont pas des traducteurs), mais plutôt phénomène singulier que nous appelons plus-value de code, communication d'à-côté”(MP, pp.69-70), 혹은 또한 이른바 예술론으로서 이해되면서 11고원 리토르넬로에 있어서의, “코드 변환이 행해질 때, 거기에 있는 것은 단순히 부가가 아니라, 항상 새로운 [코드로서의] 평면 그리고 잉여가치가 성립하고 있다Chaque fois qu'il y a transcodage, nous pouvons être sûrs qu'il n'y a pas une simple addition, mais constitution d'un nouveau plan comme d'une plus-value”(MP, p.386), “생명의 장에는 아마 존립성의 이득 즉 잉여가치가 포함되고 있다Or, s i nous nous demandons quelle est l a « place de l a vie » dans cette distinction, nous voyons sans doute qu'elle implique un gain de consistance, c 'est-à-dire une plus-value (plus-value de déstratification)”(MP, p.414), “영토의 어레인지먼트는 탈코드화를 동반하며, 어레인지먼트를 촉발하는 탈영토화와 불가분하다(새로운 유형의 두 가지 잉여가치)L'agencement territorial implique un décodage, et n'est pas lui-même séparable d'une déterritorialisation qui l'affecte (deux nouveaux types de plus-value)”(MP, p.414) 등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러한 생명현상에 있어서의 코드화와 탈코드화의 착종이, “자신의 지층 위에 있어서조차 유기체는 탈영토화된다. 유기체는 유기체의 자립성을 보증하고 유기체를 이끌도록 제반 내부 환경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Sur sa propre strate, un organisme est d'autant plus déterritorialisé qu'il comporte de milieux intérieurs assurant son autonomie, et le mettant dans un ensemble de relations aléatoires avec l'extérieu”(MP, p.70)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에도, 앞에서 언급한 푸코의 오류-우연성으로서의 생명과도 밀접하고, 생체의 이른바 근원적인 우발성이 함의되어 있다는 점의 이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른바 생명의 영토에 있어서의 잉여가치에 밀접하는 “()코드화영토화의 양태의 규정은, 더 나아가 언어나 기호계 같은 이른바 인간적 영토에까지 연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거기에서는 이러한 생체의 우발성이, “비신체적 변형으로서의 언표행위의 집단적 어레인지먼트신체의 기계적 어레인지먼트”(MP, p.112)와의 조우라고 규정되는, “날짜-사건이라는 형태에 있어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인데(MP, pp.103-12), “우발적인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우발성 유물사관에 관련된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아무튼 맑스에 있어서 인간이 존재하고 노동한다는 것 자체에 있어서의 과잉을 의미했던 절대적 잉여가치, 이리하여 “()코드화영토화개념에 의해 재규정된다는 점을 확인한 뒤에, “생명으로부터 무기물까지를 관통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소재-도식에 충실하게 전개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재장전된 생산력과 생산관계론이 이해될 것이다.

우선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충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은 두 번 복제되고,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에서 분명한 것처럼, 코드의 구성요소로서의 분절적 단편은 그 자체로 변이하는 내용이며 또한 표현이다. 내용은 이미 형성된 소재 내지 질료, 표현이란 실질로서의 힘이며, 또한 각각이 그 하위 구분으로서 형식-실질의 이중분절을 겪고 있기 때문에, 내용의 형식이란 표현의 실질, 표현의 형식이란 내용의 실질이며, 따라서 소재와 힘은 서로 구성하는, 그러나 대응도 부호도 갖지 않은불가분한 것이다(MP, pp.58-9). 천 개의 고원에서의 유물론의 재장전은, 이런 이중으로 분절된 표현과 내용의 동형성에 기초하여 <실험>된다. 따라서 내용과 표현이 구별되는 경우, 그것은 형태적 내지 형상적이지 않고 ‘distinction reelle’(MP, p.59) 현실적인 구별은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 10 및 그것에 붙여진 비고로부터 채용되고 있다 . 생산력의 발전이 기존의 생산관계를 질곡에 빠뜨리고 생산력이 반전하여 새로운 생산관계를 내재적으로 생기게 하듯이, 표현과 내용은 존립성의 집합”, 존립평면에 있어서는 서로 반전-생성변화할 것이다. 존립평면의 집합이라는 표현은, 매우 비등질적 성분이 모여 강화되며, 형상-질료의 규칙적 연속으로 바뀌어 계층의 단락短絡, 혹은 역회전의[역전된] 인과관계가 일어나고, 이질적인 소재와 힘 사이에 포획관계가 성립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마치 기계적 계통류(un phylum machinique)[물질의 흐름에 내재하는 어레인지먼트의 연속변화 인용자], 그리고 탈지층화적 횡단성이 요소, 차원, 형상과 질료,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관통해 질료를 해방하고 힘을 포획하듯이On parlera au contraire d'ensembles de consistance quand on se trouvera devant des consolidés de composantes très hétérogènes, des courts-circuits d'ordre ou même des causalités à l 'envers, des captures entre matériaux et forces d'une autre nature, au lieu d'une succession réglée formes-substances : comme si un phylum machinique, une transversalité déstratifiante passait à travers les éléments, les ordres, les formes et les substances, le molaire et le moléculaire, pour libérer une matière et capter des forces”(MP, p.414). 거기에 있어서 소재 내지 질료는 형식 또는 형상이라는 주괴[주형]에 집어넣어지게 되는 부정형의 것이 아니라, 소재 각각이 지닌 이것임자신의 특이성에 기초한 개체화 를 따라서 형식-실질을 형성하고, 따라서 그 자신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상호 반전을 내재적으로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법칙에 복종하는 질료보다도 노모스[질서 인용자]를 가진 물질성을 뒤따르는 , 질료에 특성을 부과할 수 있는 형상보다도 다양한 정서를 구성하는 표현의 물질적 특징을 뒤따르는 것이다il s'agit de suivre le bois, et de suivre sur le bois, en connectant des opérations et une matérialité, au lieu d'imposer une forme à une matière : on s'adresse moins à une matière soumise à des lois, qu 'à une matérialité qui possède un nomos”(MP, p.508). 그리고 이른바 인간/물질의 구분, 혹은 이른바 인간의 역사를 훨씬 넘어선, 생산관계의 형상을 정초짓는 생산력의 사례로서, 매우 아름다운 금속의 역사를 말하는 대목을 반드시 인용해야 한다. 야금술은 물질을 재용해하고 재이용할 가능성을 갖고, 그래서 물질에 주괴[주형]라는 형식을 부여한다 금속의 역사는 스톡과도 상품과도 다른 이 특별한 형식과 불가분하며, 화폐가치는 이로부터 생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환원적이라는 야금술의 관념은, 준비된 물질로부터 물질성의 해방 및 구체화되어야 할 형상으로부터의 변형의 해방이라는, 이중의 해방을 표현한다 거기에는 다양한 형상의 계기로 바뀌어 연속 발전하는 형상이, 다양한 물질의 변화로 바뀌어 연속 변화하는 물질이 있다Et pour finir, la métallurgie a la possibilité de refondre, et de ré-employer une matière à laquelle elle donne une forme-lingot : l'histoire du métal est inséparable de cette forme très particulière, qui ne se confond ni avec un stock ni avec une marchandise ; la valeur monétaire en découle. Plus généralement, l'idée métallurgique du « réducteur » exprime la double libération d'une matérialité par rapport à la matière préparée, d'une transformation par rapport à la forme à incarner. Jamais la matière et la forme n'ont paru plus dures que dans la métallurgie ; et pourtant c'est la forme d'un développement continu qui tend à remplacer la succession des formes, c'est la matière d'une variation continue qui tend à remplacer la variabilité des matières”(MP, p.511, 강조는 인용자). 생산력, 혹은 잉여가치의 변주로서의 “()코드화영토화에 기초한 이런 금속-화폐형태론적 관점이, 물질/인간의 구분을 넘어서, 자본과의 우발적 조우를 준비하는 이중으로 해방된노동자에 관해서도, 연속 혹은 일관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임금노동자의 기원, ‘국내의 노동자에게 정위하는 정주혹은 트리[나무]적 관점과는 상이한, ‘이민혹은 유목의 리좀적 관점으로부터 논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 정의로 되돌아간다 기계적 계통류는 자연인공[의 구별 인용자]과는 무관한 인공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물질성이며, 특이성과 표현 특징을 담지하는 한에서, 운동하고 흐르며 변이하는 물질이다. 이 정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백한 귀결들이 생긴다. 즉, 이런 흐름으로서의 물질만을 뒤따를[추적할] 수 있을 뿐이다. 필시 따르다[좇다]라는 동작은 그 장소에서도 가능하며, 대패질을 하는 장인은 자리를 바꾸지 않고서도 나무와 나무의 섬유를 뒤따른다. 그러나 이런 뒤따르기 방식은 더 일반적인 과정의 특수한 시퀀스일 뿐이다. 왜냐하면 장인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 뒤따르도록, 즉 필요한 섬유를 가진 나무를 그것이 있는 장소에까지 찾으러 가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오게 하는 수밖에 없지만, 이 경우는 상인이 반대방향에서 궤적의 일부를 담당하기 때문에 장인은 스스로 그 궤적을 만드는[이동하는] 것을 절약했을 뿐이다. 그러나 장인은 동시에 재료를 채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장인으로서 불충분하다. 재료 채집자와 상인과 장인을 분리시키는 조직[분업체제의 확립 인용자]이란 이미 장인을 지체장애로 해서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장인은 물질의 흐름 즉 기계적 계통류를 뒤따르도록 정해졌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인이란 물질의 흐름이다. 물질의 흐름을 뒤따라가는 것은 이동하는 것, 방랑하는 것이다. (MP, pp.509-10).

Nous retombons toujours sur cette définition : le phylum machinique, c'est la matérialité, naturelle ou artificielle, et les deux à la fois, la matière en mouvement, en flux, en variation, en tant que porteuse de singularités et de traits d'expression. Des conséquences évidentes en découlent : c'est que cette matière-flux ne peut être que suivie. Sans doute cette opération qui consiste à suivre peut-elle se faire sur place : un artisan qui rabote suit le bois, et les fibres du bois, sans changer de lieu . Mais cette manière de suivre n'est qu'une séquence particulière d'un processus plus général . Car l'artisan est bien forcé de suivre aussi d'une autre manière, c'est-à-dire d'aller chercher le bois où il est, et le bois qui a les fibres qu'il faut. Ou, sinon, de le faire venir : c'est seulement parce que le commerçant se charge d'une partie du trajet en sens inverse que l'artisan peut s'épargner de faire lui-même le trajet. Mais l'artisan n'est complet que s'il est aussi prospecteur ; et l'organisation qui sépare le prospecteur, le commerçant et l'artisan, mutile déjà l'artisan pour en faire un « travailleur ». On définira donc l'artisan comme celui qui est déterminé à suivre un flux de matière, un phylum machinique. C'est l'itinérant, l'ambulant. Suivre le flux de matière, c'est itinérer, c'est ambuler.

 

여기에서는 이른바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와 구별되는 장인, ‘이동체로서 물질에 순종한다고 정의된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이전以前의 상태는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소급적으로파악될 수 있는 우발적 세계사에서 발견된다. 그런 한에서 여기서의 장인은 소급적으로 그리고 소급적으로만 파악된 노동자의 전신前身이다. 이로부터 물질의 흐름에 순종하는 것으로서의 장인의 이동과는 상이한 두 번째 이동이 구별될 것이다. , “농민 또는 목축민이 계절이나 토지의 빈곤화에 부응해 토지를 바꾸는” “이동”,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숲이 재생하고 토지가 회복되면 출발점으로 회귀하도록 미리 정해진 회전을 행하는듯한 이동을 행하는 이동목축민이 그런 두 번째 이동을 담당한다고 간주되며, 그리고 상인도 또한 상품의 다양한 흐름들이 출발점과 도착점의 회전에 종속하고 있는 한에서 이동목축민les flux marchands sont subordonnés à la rotation d'un point de départ et d'un point d'arrivée ( aller chercher-faire venir, importerexporter, acheter-vendre)이라고 간주된다(MP, p.510).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의 기원상인자본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관점에 대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인용했듯이, 세계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정의된다라는 <가설>로부터 들뢰즈·가타리는 논의를 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틀림없이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자.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소재-의 상에 있어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의 파악에 기초하여, “이동목축민이 진정한 이동자가 되는 것은, 토지나 목초의 회로가 피폐하고, 회로가 너무도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갈 때뿐이다Le transhumant n'est donc itinérant que par voie de conséquence, ou ne le devient que quand tout son circuit de terres ou de pâturages est épuisé, et quand la rotation est tellement élargie que les flux échappent au circuit”(MP, p.510)가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 회로가 자본제에 있어서의 생산-소비-분배의 회로의 알레고리라는 것은 명료하다. 따라서 여기서 얘기되는 진정한 이동자상인이다, 자본주의라는 회로너무 확대된때에 이 회로로부터 일탈’, 심지어 도주해가는 생산력으로서의 흐름혹은 기계적 계통류-물질로서의, 자본주의 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일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노동자란 물질의 흐름의 한복판에 있는 이동체라고 하는 정의가, 앞의 인용으로부터 논리적 혹은 오히려 <비정확>하게(MP, p.31) 도출되어야 한다. “회로가 너무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간다는 것은 바로 흐름으로서의 물질에 대해이뤄지는 장인의 정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이동체라는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에 있어서의 자본제라는 결과로부터 볼 때 여전히 상실된 채인 다름 아닌 <가설> 혹은 <허구>로서의 기원, 들뢰즈·가타리는 이른바 전쟁기계와도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다. 유목론 혹은 전쟁기계라는 제목의 12고원에서의 국가의 전쟁을 총력전으로 하는 요인은 자본주의, 즉 전쟁에 관련된 자재·산업·경제에 투자되는 고정자본 및 육체적 정신적 인구로서 투자되는 가변자본과 밀접하게 결부시킨다”(MP, p.524)고 하는 구절 및 그것에 덧붙여진 폴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에의 참조를 촉구하는 각주(101)에서 그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에 덧붙여 14고원 매끈함과 홈패임에서의, 맑스 자본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른바 추상노동, ‘전쟁기계홈패임혹은 국가장치로의 회수로서 논의되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명백하게 맑스의 절대적 잉여가치가 숨쉬고 있다. ,

 

추상노동, 그 효과의 배가, 그 분업화 같은 문제가 최초로 출현하는 것은 핀공장에 있어서가 아니라 공공사업의 작업현장 혹은 또한 군대의 조직화(인간의 규율훈련뿐만 아니라 무기의 공업생산에 있어서도) 등에 있어서이다. 전쟁기계는 아마 최초로 홈패임화되고, 효과에 있어서는 배가하며, 분업화 가능한 추상적 노동시간을 산출하는 것이 됐다. <노동>의 물리적 사회적 모델이 국가장치의 발명으로서 국가장치에 속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며, 우선 첫째로 노동은 어떤 잉여의 성립에 의해서 처음으로 출현한다, 즉 스톡으로서의 노동만 존재할 뿐이며, 노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른바 잉여노동과 더불어 개시된다는 것, 둘째로 노동은 시공간의 홈패임화라는 보편적인 조작·자유활동의 예속화·매끈한 공간의 폐절 등을 행하는 것이며, 국가의 본질적 기획인 전쟁기계의 정복이 노동의 기원이며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MP, pp.611-2).

Ce n'est pas dans la fabrique d'épingles que se posent en premier lieu les problèmes du travail abstrait, de la multiplication de ses effets, de la division de ses opérations : c'est d'abord sur les chantiers publics, et aussi dans l'organisation des armées (non seulement discipline des hommes, mais production industrielle des armes). Si bien que la machine de guerre a peut être été la première à être striée, à dégager le temps de travail abstrait multipliable dans ses effets, divisible dans ses opérations. Le modèle physico-social du Travail appartient à l'appareil d'Etat, comme son invention, pour deux raisons. D'une part, parce que le travail n'apparaît qu'avec la constitution d'un surplus, il n'y a de travail que de stockage, si bien que le travail (à proprement parler) commence seulement avec ce qu'on appelle surtravail. D'autre part, parce que le travail effectue une opération généralisée de striage de l'espace-temps, un assujettissement de l'action libre, une annulation des espaces lisses, qui trouve son origine et son moyen dans l'entreprise essentielle de l'Etat, dans sa conquête de la machine de guerre .

 

이리하여 맑스의 자본에 의한 자본제에서의 추상노동으로서의 과잉노동론은, 이른바 매끈한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활동홈패임화하고, (과잉)노동을 전인격적으로 착취 즉 수탈하는, 혹은 오히려 포획하는 양태 앞서 본 이중으로 발휘되는 폭력, “전쟁기계의 홈패임화에 입각해 얘기된다. 이로부터 대차적対遮的으로 전쟁기계는 맑스/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교역·전쟁을 포함한 이른바 <교통(Verkehr)> 형태를 담하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단에 의해 정의되, ‘소재-도식에 구현되는 구체적인 어레인지먼트로서 작동하는 추상기계’(MP, p.636)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136불변자본과 가변자본에 있어서 맑스가 전개한 기계론이, 앞서 언급한 기계도 또한 잉여가치를 산출한다라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미 논의됐던 사태(AO, pp.275-8)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기계과거의 / 죽은 노동의 보존과 전송을 관장하는 장치라고 맑스는 말했다. 이것에 현재 시점에 있어서의 인간-노동자의 산 노동”(이라는 원래부터 잉여일 뿐인 노동)이 부가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산출된다. ‘산 노동에 의해 과거의 / 죽은 노동억지로 되살리거나, 혹은 산 노동죽은 노동의 접속에 의해 잉여가치가 생긴다. 과거의 죽은 시간 혹은 노동을 재생시키고 착취하기 위해서만 산 노동은 동원된다. ‘산 노동은 그래서 그 자체로는 무가치하다고 말해도 좋지만, 다른 한편 그것 없이 착취는 수행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생기는가라는 위치 결정이 불가능하다는 사태가 생긴다.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논의를 받아, 맑스의 근본적 성과는, 잉여가치는 위치 결정 불가능하다는 점의 해명 및 기계가 그 자체 잉여가치를 산출하고 자본의 유통이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구분을 무효화한다는 예지, 이렇게 두 가지 점에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MP, p.613). 또한 이런 맑스를 바탕으로 하여, 이제 산 노동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만으로 자본주의가 매끈한 공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즉 자본이 절대속도에 도달한 상태가 찾아왔다고 하는 것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현황 인식이다(MP, p.614). 거기에서는 이른바 냉전붕괴 이후에 전면화된 감시사회’, ‘전지구화’, ‘남북전쟁이나 걸프전’, 나아가 동시다발테러같은 사건에 대한 예언적 서술이 엄청나게 발견되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후적으로만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며, 여기서는 젖혀 두고 묻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시 되어야 하고 소급적으로 ()기술되는 우발적 세계사, 아래에서 개괄한 자본과 노동의 조우에 잇어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재장전된 유물론사관> 구상이 전망된다.

 

긍정과 도주 : 우발성의 유물사관을 위해 

각각의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가 되고 있는 속성 하에서 신이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만 신을 원인으로 하고, 신이 어떤 다른 속성 하에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 윤리학2부 정리6

 

노동력을 포함한 여러 상품들의 생산-유통-()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을 완결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이 원환을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조우를 기점으로서 기술하는 것. 이러한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의 기획에, 『『자본을 읽자에 수록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의 근본 개념에 대해논문이 크게 기여하는 점이 우선 확인되어야 한다. 이미 본 이윤율의 영원한저하 경향 법칙자본주의의 공리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 한에서의 으로서의 코드의 잉여가치흐름의 잉여가치로의 변용이라는 논의 그 논거는, ‘노동력자본사이에는 공통 척도가 없다는 점에서 찾아졌다 도 발리바르에 의거하여 이뤄진 것이었지만(AO, p.271), 이것에 덧붙여 “<잠재적으로는(virtuellement)> 별개로 존재하고 있자유로운 노동화폐-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조우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aurait pu ne pas se faire)”라는, 본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장에 이어서 곧바로 이뤄지는 두 요소에 대한 언급, 요소의 한쪽은 낡은 사회 신체를 구성하는 농지구조의 변용에, 다른 한쪽은 이 낡은 신체의 무수한 모공 속에 난외-여백적으로(marginalement) 존재하고 있는 상인과 고리대금을 경유하는, 완전히 다른 계열에 의존하고 있다”(이상은 AO, p.266)가해진 각주(76)에서 인용되는 발리바르가 결정적이다. 이하에서 보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인용되는 발리바르의 논문의 해당 대목은 물론 4. 이행의 이론을 위한 요소들“1. 본원적 축적, 한 가지 전사(前史)”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조우를 둘러싼 맑스의 고찰에 대한 주석의 일부분이다.

 

자본주의의 구조가 지닌 통일성은, 한번 구성되면 자신의 배후에서는 찾아낼 수 없다[배후로는 되돌아가지는 않는다](ne se retrouve pas en arriere d’elle) (필요한 것은) 이것들의 조우적 연락(leur conjonction)의 결과에서 출발해 [소급적으로] 규정 [한에서의] 요소들과, 이런 결과들과는 그 개념에 있어서 무관한 왜냐하면 결과는 다른 생산양식의 구조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되어야 하는 역사 분야와의 사이의 조우(la rencontre)가 이미 산출되고 있으며, 또한 엄밀하게 사고되고 있는 것이다. 선행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구성된 이런 역사 영역에 있어서는, 그 계보가 추적되는 이런 요소는, 정확하게는 난외-여백적 상황, 즉 비결정적인 상황만 갖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보충. ‘조우’, ‘조우적 연결의 강조도 들뢰즈·가타리의 것 인용자]

 

여기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구조는 자신의 통일성을 자본주의의 전사에서는 갖지 못하고, 통일성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조우적 연결이 요소들과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사고해야 할 역사 영역과의 사이의 조우에 있어서 획득됐지만, 다만 이런 요소들은 이 조우적 연결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결과와 이것들 각각의 역사를 지닌 요소들은 개념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본자본주의의 구조에 있어서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에 , 이런 요소들은 역사적으로 비결정적인 상황밖에는 갖지 못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전사로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자본주의의 구조의 통일성이 부여되고 있는가에서 보이는 현재에 있어서도 부단하게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전사는 자본주의의 통일성에 있어서 필요하고 불필요한, 배제되기 위해서만 소환되는 난외-여백이며, 난외-여백으로서의 전사혹은 비결정적 상황, 노동과 자본의 <조우>가 발생하는 역사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이 <조우>, ‘자본주의의 구조로부터 소급적으로 발견되는 세계사속의 도처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조우>가 발생하는 상황을 구조에 있어서 소급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관점의 제시에 있어서, 발리바르와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 공유되는 것은, 스피노자의 이른바 인과성여기서는 필연사관 내지 목적론적 사관을 가리킨다고 생각해도 좋다 비판이며, 주지하듯이 그것은 알튀세르파에 있어서는 칸트파 정신분석의 무의식과 관련해서 무의식은 그 효과-결과에 있어서 실재한다고 하는 테제로 변주되고 있으며 무의식의 징후가 구조에 있어서의 전사의 발견으로서, 계급투쟁-개입의 계기가 된다 또한 들뢰즈에 있어서는 표현표출도 유출도 아닌 표현에 기초한 종합적 방법의 문제계에 있어서 정제되는데, 여기서는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적 세계사와 관련되는 한에서의 스피노자를 언급하고자 한다.

윤리학1부 정리 10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어야 한다비고에서는,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 것이 현실적인 구별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현실적 구별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구별로서 나타난다 라고 규정되고 있다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영역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내재평면이다 . 속성자본노동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구성하는 요소로 파악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런 요소각각의 현실적인 구별에 의해, (아직 그것이라고 동일시[규정]되지 않는 그런 요소들의) <조우>의 소급적으로 동일시[규정]되는 역사적 요소가, 그런 요소들에 있어서 파악됨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가 갖는 통일성,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해야 하는 역사 영역과의 사이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것이 제시될 것이다. “자본주의그것에 비추어 세계사가 소급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를 성립시키는 노동자본전사<조우>로부터 뒤집어서, 더 소급적으로 세계사의 전역에 이런 전사<조우>를 찾아낸다는 구상에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우발적인 세계사는 기초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이른바 역사, 이런 의미에서의 전사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그리고 이 전사, 단서로부터도 목적으로부터도 일탈한 강도의 상태를 가리키는 고원’, 혹은 사물 각각의 이것임에 기초한 개체화-사건이 발생하는 내재평면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풀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과성에 근거한 시계열적인 사태들의 연쇄가 아니라,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서술된, 자본주의에 의해 소급적으로 파악되는 우발적인 세계사이다. 거기에 있어서 특히 중시되는 것이 비신체적 변형행위로서 상황에 개입하는 명령어이며, 이런 명령어들은 날짜혹은 사건으로서, 역사상에 출현한다 19231120일 독일에서의 신화폐교부 포고, 혹은 레닌의 191774. 이 집단-언표적 어레인지먼트, 혹은 사건, 이른바 자본제사회에 내재, 혹은 평행적으로 일어나는 비결정적인 상황혹은 전사의 영역에 있어서, 따라서 자본제사회의 언제 어디서든 일어난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잉여가치가 어디서 생기는지가 결정 불가능하다라는 것과 평행하여, 사건혹은 앞서 인용한 혁명적 잠재력의 현실화는, 언제 어디서 생기는가를 모른다 = 언제 어디서든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AO, p.454).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 공리계로부터의 도주내지 누출의 선분의 하나일 것이다. 또한 이런 명령어를 구성하는 분절적 단편이, 광물로부터 생물을 거쳐 언어, 더 나아가 인간의 집단적 어레인지먼트에까지 이르는, 이중분절을 겪고 표현에서 내용으로 혹은 그 반대로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소재-도식에 관통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사적 유물론우발성 유물론으로 재장전된 것이 이해될 것이다 그때 <matérialism>물질주의라기보다는 소재-도식에 있어서 내용과 표현이 서로 연속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소재주의로 번역된느 것이 적절하다 . 여기서의 역사는 목적론으로부터도 필연성으로부터도 누출-도주한 고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원으로서의 역사로, 이제 자본주의 그 자체를 도주시켜야 한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성립을 위한 필요하고 불필요한 전사는 자본주의의/라는 결과의 안쪽에 있어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결과, ‘전사라는 자본주의의 원인혹은 오히려 조건이 내재 혹은 평행주행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말했듯이 요소 각각의 현실적인 구별, 자본노동<조우>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규정[식별]되는 역사적 요소 각각의 파악에 의해, 이것들 사이에는 그 어떤 필연적인 결합관계도 발견될 수 없다는 것 비결정적 상황, 따라서 또한 이런 결합에는 우발적으로 조우하지 않는 한 부단하게 알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 노동의 각각을 그 자체에 의해서긍정적으로 파악하는 것, 현실적인 구별에 있어서, <>에 의한 접속 그 자체가, 단서도 목적도 갖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 한에서의 역사의 영역에 있어서의 우발적인 연결(conjonction)이었음이 제시된다. 이런 ‘conjonction’<> 또는 본성의 차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런 <> 그 자체를 그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한다면, 거기에는 무수한 <조우>의 가능성,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이 무수하게 열릴 것이다. 그때 자본주의의 성립에 있어서 발생한 저 우발적 조우,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소급적으로 파악되는 세계사를 가득 채운다는 것을 소급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그 자체를 도주시킨다고 하는 명제의 내실이어야 한다.

이리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의 상호 구성하는 <소재-> 도식에 근거한 내용-표현의 <유물론>적 구별을, 내재평면에 있어서의 사물들의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파악된다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적 구별과 들뢰즈·가타리가 상정한 것의 의의가 이해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제시된, “혁명적 잠재력을 현실적인 것으로 하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절단실제로 발생하는”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의 출현의 순간을 가리킨 것이며, 따라서 구별은 오히려 ‘~한 절단이다. 그리고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 재장전된 우발성 유물론사관이다. 거기에서는 현실적 구별에 있어서, 우발적으로 혁명의 잠재력이 현행화actualize된다. 내재평면에 있어서 무수한 어레인지먼트를 담지하는 표현과 내용은, 상호 연속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똑같은 것이며, 따라서 형태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구별된다. 스피노자가 윤리학2부 정리 6에서 말한, “각각의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가 되고 있는 속성 아래에서 신이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만 신을 원인으로 하고, 신이 어떤 다른 속성 하에서 생각되는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때의 내재평면으로 풀이할 때, 현실적 구별의 함의는 훨씬 명료하다. , 내재평면에 있어서는, “만일 세계사를 소급적으로 파악시키는 자본주의 그 자체가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 조우에 있어서 성립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세계사의 도처에 이러한 조우가 똑같이 발생한다고 하는 만일 ~라면(si), 그것들은 ~이다(donc)”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내재평면에 있어서는 자본주의(라는 원인)가 세계사(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는 인과성은, 세계사 앞서 말한 전사의 의미에서의 라는 여기서의 결과에 있어서, 자본주의라는 여기서의 원인의 성립 조건, <조우>가 발견되고, 뒤집어 자본주의라는 결과에 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안티 오이디푸스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것은 원인(자본주의)에서 결과(세계사)”라는 인과관계로 고쳐 써질 수 있다. 이 관계가 결과(자본주의)에서 원인(세계사)”으로 ()전도시킨 다음에, 다시금 원인(세계사)에서 결과(자본주의)”로 나아간다. 이때 은 자본주의에 의한 스스로에 대한 오인-전도였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노동력을 포함한 상품들의 생산-유통-소비-()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을 완결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본과 노동의 각각이 그것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되는 것에 있어서, 이 원환을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조우를 기점으로서 기술하는 것,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조우를 필연으로서가 아니라 무수하게 가능한 다른 조우와 더불어 기술하는 것에 의해서, 자본주의를 역사 앞서 언급한 푸코가 말한 의미에서의 로 귀환시키는 것, 그것이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의 들뢰즈·가타리의 미증유의 <실험>이었다. 그리고 이런 “sidonc의 논리를, 들뢰즈·가타리는 다름 아닌 맑스에서 찾아내고 있다(AO, p.266). 즉 맑스의 이른바 1844년의 경제학과 철학세 번째 초고 욕구, 생산, 분업이라는 절에서 나타난, <만일 라면, 그것들은 네게 c‘est donc à toi si>(원문에서는 라틴어 ‘conditio sine qua non’)라고 말한 산업 환관産業宦官의 악마의 계약이 그것이다. 환관宦官즉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의 생산자, 이웃을 향해서 네가 바라는 것을 나는 네게 주겠다, 그러나 너는 sine qua non의 조건을 알고 있네, 즉 만일 네가 원한다면, 그렇다면 이라고 속삭인다, 이미 봤듯이 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불필요하고 불가결한 전제로 추켜세우는 국가장치, 혹은 미리 스톡되는 것으로서만 과잉이라고 지목한 뒤에 노동을 수탈하는 포획장치와 상동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의 이른바 개념인물이다. 따라서 이 일화를 언급하는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가 이런 ‘si donc 의 논리를 재빨리 활용하는 기예를 터득하고 또한 맑스도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주장한다고 풀이해야 하며, 더욱이, ‘si donc 의 논리는 바로 자본주의 자체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들뢰즈·가타리는 매우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본<> 노동은, 이것들이 본성의 차이에 있어서 질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우발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결말을 대신해 : 원환의 파쇄

이리하여 역사를 자본주의에 봉사-동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를 역사로 귀환시키는 시도의 준비가, 여기서 정비됐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영원히 불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노동<> 자본의 쌍방이 자본주의라는 결합-어레인지먼트로부터 도주하는 사태를 조직화해야 한다. 노동<> 자본이 서로 잡아당기는, 즉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됨으로써, ‘억지를 부린결합에서 도주-누출하는 계기가, ‘우발적인 세계사속에 깃들어 있다. , 자본주의의 원환은 파쇄되어야 한다, 혹은 이것들은 원래 파쇄되고 있는 두 개의 원환의 <이음매 joint>를 찾아내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원환을 형식적으로만 파악한다면, 원환은 닫힌 구조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자본 축적의 원환에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원환이 반드시 나란히 달리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자본주의의 원환은 초점을 두 가지 갖는 타원이라고 표현되어도 좋다. 원환의 중심은 하나가 아니며,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중심이 거기에 겹쳐져 있는 것이다. 이 타원을 찾아내어 두 개의 원환을 찾아내기 위한 <가설> 혹은 가정명제가, “만일 자본과 노동의 조우가 우발적이었다고 한다면이다. 이제 이 두 가지 원환의 결합을 푸는 기예가 탐구되어야 한다. 이 결합은 필연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음매 joint><벗어나는(out of)> 것은 <유물론>적으로 적어도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두 개의 원환을 지혜의 고리처럼 <벗어나고>, 그리고, 만일 있을 수 있다면, 결합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말하면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 대해서, “이 책은 각 고리가 다른 고리로 결합할 수 있는 파쇄된 고리의 집합이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이런 파쇄된 고리의 ‘떼어냄이음의 기예(operation), 자본주의의 원환에 대해서도 시행되어야 할 때이다. 그런 떼어내는 방식-이음매 없는 방식out of joint의 조사에 대해서는, 그러나 뒷날을 기약하고 싶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분류없음 2018.04.24 01:00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3/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를 살면서

우츠미 그런데 치바 씨는 들뢰즈의 흄론에 주목하셨네요그리고 흄철학에서 절단의 계기를 끄집어내고들뢰즈에게서 생기론이나 잠재성의 파시즘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측면을 찾아냈다.

 

치바 그렇습니다모종의 픽션론으로서의 흄론이었습니다.

 

우츠미 흄은 낱개의[개개별별의] 세계를 연합에 의해 묶으려고[통합·정리하려고] 했습니다만그 통합정리할 때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치바 씨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거론한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흄의 경우, 파트그래피컬[パトグラフィカル, 바이오그래피컬의 오식인 듯. 즉, 전기적인]한 얘기인데요, 18세부터 23세까지 꽤 힘겨운 우울 상태에 있었고어쩌면 이인증(離人症)을 경험했습니다이인증에서는 사물을 서로 이어주는 아교랄까치바 씨의 말로는 ’ 같은 것이 누락되어 있습니다그것이 흄의 어소시에이션론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일단 아이러니적인 파괴를 경험한 곳에서부터 턴(turn)해온다유머적인 턴(turn)이랄까대타자 또는 초월론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은 통합·결말[まとまり]마조히즘에 있어서의 억압을 변형하는 듯한 턴(turn)입니다그 언저리의 모습이살아가는 지혜랄까경험론의 진면목이 아닐까 합니다만.

 

치바 제 말투에서 유머를 흄의 맥락으로 연결한다면어떤 우연적으로 생겨난 연합을그렇게 해도 좋다고 한다는 것입니다그 정의나 시스템을 묻겠다고 생각한다면근거는 없습니다어떤 우연의 마주침즉 최초의 자체성애적인 것이 생길 때의 외부와의 마주침의 우연성 같은 것으로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것을 떠맡고우연히 뭔가와 뭔가가 서로 달라붙게 됐을 때그로부터 연쇄적으로 다른 것이 또한 달라붙게 되는 것을 좋다고 한다모든 것은 근가가 없다고 하는 곳으로 향해서 비판을 캐고 들어가는 아이러니만을 하다 보면 엉망진창이 되며모든 것이 붕괴되기 때문에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대조적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유머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츠미 초월론적인 타자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후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네요.

 

마츠모토 : ‘일단은’ 식으로.

 

치바 그렇죠저는 어드혹(ad hoc)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생각해보면제가 전에 기고한 트랜스어딕션 동물-성의 생성변화(トランスアディクション───動物-生成変化(現代思想特集=人間/動物分割線, 2009年 7月号)와도 공명하네요. S1을 되풀이하는 것은 중독적이라고 밀러는 말하고 있으니까요제가 생각한 어딕션(addiction)도 그런 의미에서의 어떤 특이적인 증상이며또한 크리에이션(creation)과 결부된다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의 얘기로 말하면, S1이 몸을 옥죄어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변형하여 다른 크리에이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될 가능성을 트랜스어딕션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우츠미 단독의 S1에는 그런 어딕션적·에크리튀르적인 측면과 더불어그런 단순한 외침으로서의 측면도 있습니다외침은 마츠모토 씨의 논의에서 원-상징계의 + - + - … 라는 곳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거기에서 상징적인 심급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 “이 칭얼거림[외침]은 이런 의미예요라고 어머니가 유닛(unit)화한다. “배가 고프구나라고어머니도 칭얼거림이 매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그런 감각적인 차이에 배가 고프다라는 상징적 유닛을 덧씌운다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함으로써칭얼거림이 배가 고프다가 된다그러나 자폐증의 경우는 그런 응답이 없기에칭얼거림인 채인 것입니다.

 

마츠모토 그래서 늑대!”, “늑대!”라고 외칠 뿐이다.

 

치바 그리고 똑같은 그 외침이 온갖 것에 적용 가능해진다면.

 

우츠미 자폐증의 언어적인 측면은 매우 다양하네요.

 

마츠모토 정형발달처럼 S1과 S2가 연쇄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자폐증자에게는 하나뿐인 S1과 알고리즘적인 S2가 존재하며그 양자 사이에서 이러저러한 언어의 병리가 생겨나는 거죠그것은 거꾸로 정형발달이 무엇인지를 겉으로 드러내는[해명하는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도 되죠.

     조금 전 치바 씨의 트랜스어딕션” 말씀을 듣고서 생각한 건데요인프라크리틱 서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포스트인문학으로(インフラクリテイーク序説───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からポスト人文学)(思想地図β』, vol. 1, 2011)에서는 장애를 짊어지게 된 후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썼습니다그 논의는 S1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치바 역시그곳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통할지도 모르겠네요그곳은 말라부에게서 얻은 발상입니다만.

 

마츠모토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S1에서 다른 것이 발생한다는 느낌이겠죠아니면 S1 자체가 유물론적으로 고쳐 써진다는 것일까요?

 

치바 그런 식으로 연결한다면, S1의 변형을 생각했던 게 되겠죠말라부를 좇아 말한다면데리다적인 똑같은 흔적의 이전(移転)오배송[誤配] 모델이 아니고흔적 그 자체가 변형되어 버렸다는 그녀의 모델을 구별하지요그리고 원래 S1을 복수 갖고 있거나, S1을 새롭게 추가한다는 것도제 테마입니다마츠모도 씨의 논의에서도라캉과 가타리의 대비에서특이성을 단수적으로 생각하는가 복수적으로 생각하는가라는 갈림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네요제가 여기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라캉에게는 S1이라는 말을 ‘essaim(무리)’라는 단어로 바꿔 부르는 말놀이가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하나이면서도 거기에는 뭔가 무리성이 있다는 것일까요?

 

마츠모토 : ‘essaim’이 라캉파 에서 사용되는 경우기본적으로는 스키조프레니인 자의 언어사용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말 하나하나가 현실계의 수준에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서 서로 분절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언어의 병리의 행방言語病理行方『유이티카ユリイカ, 2012年 9月号)에 적은 사례인데요제가 전에 본 사춘기 유형의 환자로환청을 호소했습니다그 사람은 어느 날, “소리를 질러서[말을 걸어서] 잡아주세요[をかけられたのでってください]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걸다[かける]라는 말이, “물을 뒤집어썼으니까 닦아줘[をかけられたからいてくれ]라고 할 때의 걸다[かける]라는 뉘앙스가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비유적인 의미에서 걸리는[かけられる]’ 것이었을 터인 목소리라는 말이 현실계와 직접적으로 이어지고물질화되는 언어사용이 모든 곳에서 이뤄지고메타포로 말하지 못하게 된다시니피앙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バラバラになり]그것 자체로 자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정신분열증의 정신병리로 말하면아마 콘크리티즘concretism(구상화 경향具象化傾向)이 될 것입니다.

     다만처음에 언어가 들어올 때하나의 언어만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할 수 있으니까요밀러조차, ‘essaim’에 관해서클로스프스키=니체적인 주체의 동일성의 산란散乱을 말하고 있습니다.

 

치바 과연 그렇군요복수의 언어가 상처로서이른바 폴리트라우마틱’[polytraumatic]한 형태에서 들어온다인프라크리틱(infracritique) 서설」 무렵저는 폴리트라우마티즘과 모노트라우마티즘이라는 대비를 했고, 50년대의 라캉은 전형적으로는 모노트라우마틱한 이론으로서 수용됐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들뢰즈=가타리특히 가타리는폴리트라우마티즘을 도입했다는 것이 제 견해였습니다.

 

마츠모토 그것은 재미있네요라캉은 1974년에 외상(traumatisme)을 구멍-외상(trou-matisme)’이라고 말합니다불가능한 것즉 존재하지 않는 성관계로서의 외상은 구멍이라고 말이죠그러면 언어의 도입에 의해 구멍이 몇 개 비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어요들뢰즈=가타리의 라캉 비판에 연결하면외상은 사실 다공적[구멍이 여럿]이고 이러저러한 곳에서 누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됩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 씨는 존재론적우편적(存在論的郵便的)(新潮社, 1998)에서 불가능한 것은 부정신학에서처럼 하나인가아니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그 뒤에 나온 토가와 유키(十川幸司) 씨의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精神分抵抗)(青土社, 2000)각주에서 히로키 씨의 논의를 다루었습니다라캉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을 통해 불가능한 것과 하나[한 가지] 만날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것은 하나뿐이라고 해도동시에 불가능한 것은 복수적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왜냐하면 각 주체는 각각에 있어서 상이한특이적인 정신분석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이죠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신분석이라는 리미트(limit, 극한속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은 하나이게 되지만다른 한편 가타리는 집단성에 대해 생각하며시니피앙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그러면 불가능한 것이 단수인가 복수인가라는 대립은정신분석과 스키조분석의 양자에 있어서의 임상의 장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합니다개인의 정신분석이라면 역시 시니피앙의 주체를 원칙으로서 다루기 때문에구멍=불가능한 것은 하나가 되는 셈이지만라 보르도 병원처럼 집단적 실천에서 하면 복수가 된다.

 

치바 제 논의라면한 개인 속에 복수의 구멍이 있다는 사고방식에 집착하는데요그렇기에 해리(解離)나 다중인격을 문제 삼았던 것이죠.

      90년대 말 경은페르소나의 다중성이 인터넷이나 버추얼한 것의 등장으로 강하게 의식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 씨의 복수성에 대한 논의도멀티레이어(multi-layer)한 상황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죠저도 그 시기에 청춘기를 보냈기에그런 감각을 어떻게 이론과 결부시키면 좋을까줄곧 생각했습니다.

 

우츠미 우리는 본래 이디어트(idiot, 백치) 같은 것이며거기에 조금만 공약 가능한 곳이 있다는 거죠실제로 자신의 경험을 이른바 의식의 흐름처럼 관찰해 보면,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같은 매우 기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He war”가 아니라 “Ich denke” 같은 녀석이항상 가만히 들러붙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오히려 그것들이 불가사의랄까어째서 그럴게 될까그런 의미에서의 일자여라”, “개체여라는 명령법이 지금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지만향후 그것이 어떻게 될까?

 

다른 방식으로?

치바 여기서 저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오늘의 일련의 화제는 특이성단독성각각의 별개[それぞれパラバラ]라는 방향을 향합니다만굳이 나쁘게 말한다면결국 사람 각각이라는 얘기가 되며그것은 이론적 퇴행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만일 이론에 재미가 있다면다소 폭력적이라고 할지라도복수의 것에 걸친 어떤 일반화를 행하는 곳에 있으며결국 임상의 현장에서 개개의 것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례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면이론의 [종언]이 아닌가라고 말이죠마츠모토 씨는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마츠모토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모든 것은 싱귤라리티이다라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결론이 되면이론은 죽어버립니다라캉이 목표로 한 것은자기 자신의 분석에서 얻어진 싱귤라리티가 있다며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정신분석의 이론 자체를 갱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점입니다분석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싱귤라리티에 도달한 곳으로부터 새롭게 이론을 가다듬어 내어야 합니다그것이 분석가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가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분석가마다 주목의 중점이 다르다는 거네요그것은 분석가 자신의 생톰의 반영이며그것을 밑천으로 클라이언트와 관계함으로써변화를 야기한다.

 

마츠모토 그렇군요좀 더 근원적으로는학파 속에서 다른 분석가와 공유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다른 분석가와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분석가를 차례로 산출한다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분석가는 다시 새롭게 자신의 특이성과 만나서 정신분석 이론을 갱신한다이른바 영구혁명입니다.

 

치바 그래서 궁금한데요각각의 분석가가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고다른 분석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클라이언트와 마주대하려고 하며그 다른 방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요?

 

마츠모토 예를 들면라캉의 단시간 세션은그가 특이적으로 발견한 방식이죠.

 

치바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는 장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마츠모토 : 24시간 내구(耐久) 정신분석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분석가도 있을지 모르죠(웃음).

 

치바 그래서 효과를 올리도록 별난 분석가가 나와도 원리적으로는 더 좋다고.

 

우츠미 치바 씨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치바 씨가 부분대상과 팔루스적 대상 사이에 기관 없는 신체”, 또는 전체화하지 않는 정리[모둠]를 놓고 있는 곳에 주목하고 싶습니다한쪽에 부분대상으로서의 현실적인 것이 있고다른 한쪽에 팔루스적인 대상으로서의 상징적인 것이 있다고 하며그 중간에 기관 없는 신체가 있다저는 팔루스적 전체성과 전체 대상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클라인이 말하는 부분대상은 오히려 기관 없는 신체와 닮은 곳이 있습니다.

 

치바 지금의 3항도식에서는클라인의 부분대상은팔루스적 통일과 전체화하지 않은 정리[모둠] 둘 다를 거듭[중첩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저의 해석입니다.

 

우츠미 아까 말한 아이러니적 잠재성과 분화·현동성의 중간에 유모적 개체화가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치바 글쎄요그것을 저는 특히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현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상상적인 것혹은 요도[尿道]적인 것을 넣는 곳이 급소라고 하죠이 구도는 두 사람의 책에서 공통된 것으로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그리고 치료가 어디를 목표로 하는 것이냐 하면각각의 별개バラバラ의 단편으로부터 자그마한 [turn, 선회]을 만드는버추얼리티 쪽으로 확산하면서도, [갔던 길을] 약간 되짚어와서 기관 없는 신체 쪽으로 간다아마 여기에 싱귤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흄도 데카르트도 비슷한 것을 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흄의 경우이인증(離人症)적으로 각각의 별개가 된[산산조각 난] 단편을 어소시에이트[associate, 연합]합니다만그렇다고 강력한 자기는 만들지 않는다일단 다발 같은 자신으로 좋다고 한다데카르트가 과장적인 회의를 하는 곳은 급진적인 사디즘이죠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하고어느 정도의 네거티비티[부정성]을 견딜 수 있는가그 위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물음 아래에서마지막으로 잠깐 그래도 생각하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turn, 선회]한다. “코기토” 등이라고 잘난 체 하는 느낌이 아닌 것입니다그저 자그마한잠깐 동안 생각한다는 형식뿐으로아무런 내실도 갖지 못하는미결정의 중지[허공에 붕 떠있는 것]로서 코기토가 산출된다마지막은 신이라는 상징적인 것을 증명하고 보증인으로 합니다만그것은 그가 정말로 했는가 여부는 의문입니다.

 

치바 그렇게 하면-코기토-회의(악령)상징-상상-현실이라는 3항도식을 할 수 있다.

 

우츠미 그렇네요흄의 경우는 공간이 단편화하는 반면데카르트의 경우는악령이 시간적으로 절단하는 건데요이런 아이러니에서 유머로 [turn, 선회]한다는 도식이 임상적으로도 생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치바 단편화를 거쳐서가까스로 정리[모둠, 종합]로 돌아간다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고 저라면 말할 것제 논의의 경우그 차원은 특히 상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판타슴이죠라캉파에서는판타슴의 횡단이라는 논의가 될까요?

 

마츠모토 판타슴의 횡단의 경우는모든 상징체계의 폐절까지를 지향하는 아이러니이죠모조리 없애버리는 듯한.

 

치바 그래도 뭔가가 남죠?

 

마츠모토 외상적인 핵이 남는다그 잔여를 꺼내기 위해라캉은 생톰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죠우츠미 씨가 지금 말했듯이조금 돌아온다고 할까당분간의 정리[모둠, 통일]를 만든다고 할까.

 

우츠미 생톰 그 자체가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는 논의가 아닙니까?

 

마츠모토 콩시스탕스[consistance]의 이마지네르(imaginaire)라는 논의이죠(フィリップ・ジュリアンラカンフロイトへの回帰誠信書房). 밀러는 타투나 피어스로 무너지고 있는 신체의 고리를 지탱해도 되잖아라고도 말합니다.

 

우츠미 들뢰즈에게 공백의 [바둑판] 칸(case vide)”이라는 개념이 있죠단적으로 말하면상상력은 빈 그릇이 있어야 비로소 기능할 수 있습니다제가 자주 드는 사례로, “나는 퍼즐에 비유하면 빈 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혹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포화되어 버린다는 것 같습니다이것이 자폐증 스펙트럼에 있어서의 상상의 부자유의 원형입니다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그렇게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었고지금은 그 세계로부터 탈출하고 있습니다만이번에는 정형자의 얄팍한 세계いい加減世界에 들어가는 것의 고통이 있다후설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그는 이 방의 건너편この部屋こう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혹은 자신에게는 등이 없다がない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습니다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혹은 집들의 건너편에 사람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든가.

    이른바 장애의 세 쌍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운데상상력의 장애는 매우 조잡한 취급방식을 하고 있습니다수집벽이나 철도 마니아 등흥미 관심의 폭이 좁다든가곧바로 그런 얘기가 되어버립니다그런 게 아니라경험 속에 빈 눈금을 어떻게 만들까이렇게 그들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마츠모토 빈 칸이 있어서 처음으로 전개되는 유형의 공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죠.

 

우츠미 다른 식으로 공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츠모토 당사자인 후지이 히로코(藤家寛子) 씨는분명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보이는 수많은 집의 각각에 가정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고 썼네요집이 일 뿐이고그 속에는 가정이 있고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공상이 미치는 공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일까요?

 

우츠미 그것을 가진다고 포지티브하게 파악되지 않을까요정형으로 이끌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작업이 아니니까.

 

마츠모토 공상하는 공백의 칸이 없는 대신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