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로장발롱의 복지국가론

복지국가 재구성의 관점을 얻기 위해

今野健一

http://repo.lib.yamagata-u.ac.jp/bitstream/123456789/5954/1/19-01030147.pdf


** 이 글의 일본적 맥락을 제거하려면 <II. 복지국가의 생성과 그 위기>부터 읽으면 되겠다. 

 

I. 복지국가를 둘러싼 문제 상황

1. ‘복지국가의 위기와 현대일본의 문제 상황

(1) 복지국가의 의미

잘 알려져 있듯이, ‘복지국가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영국에서, 나치의 전체주의적 전쟁국가(Warfare State)에 맞서 민주주의 하에서 국민의 생활보장을 자국민에게 약속하는 것으로서 복지국가(Welfare State)라는 용어가 사용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정의로는, 영국에서 복지국가의 발족 경위 때문에 사회보장제도를 불가결한 일환으로서 정착시켰던 현대국가 내지 현대사회의 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각주:1]이 자주 참조된다. 최근에는 고용보장을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유력하다.[각주:2]

 

(2) 복지국가의 위기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권은 경제의 고도성장을 통해 복지의 확대를 도모한다는 선순환 속에서 복지국가의 발전을 촉진해 왔다. 그러나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세계경제는 정체기에 들어서며, 그때까지 순조롭게 발전을 거듭했던 복지국가에도 주로 재정적 의미의 위기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이런 위기에 직면하여 사회민주주의 정권도 위기에 빠지며,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를 내건 영국의 대처정권을 시작으로 보수정권이 대두됐다.[각주:3] 결국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사상 하에 있는 보수정권이 진행시킨 복지국가 해체의 시도는 좌절했으나, 그래도 기존 복지국가의 정당성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곤란은 지속되고 있다. 저성장 경제 하에 있고, 나아가 저출산 고령화 같은 공통적인 현상을 안고 있는 서구선진국들에서 현재 복지국가체제의 재편성은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으며, 각국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제도 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3) 전후 일본과 복지국가

그렇다면 일본은 어떠한가? 전후의 폐허 속에서 출발한 일본에서는 사회보장제도를 충실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경제성장의 확대를 통한 국민소득의 수준향상이 주요한 목표로 간주되었다. 그 때문에 복지의 충실이 정책과제로서 부상한 것은 고작해야 1973년이었다(‘복지원년’). 그러나 이 시기는 서구복지국가가 그 성장을 정체하지 않을 수 없던 시기에 해당하며, 일본의 고도성장도 종언을 맞이한다. 이 때문에 복지확충정책은 부정적으로 파악된다. 1980년대에는 오히라 내각(大平內閣) 하에서 일본형 복지사회구상[각주:4]이 제출되고, 그 후 자립자조원칙, 공적 복지에 대한 의존 회피, 민간 활력의 활용을 주축으로 한 정책이 실시되었다.[각주:5] 그런데 사회보장제도란 일반적으로 사회보험·사회수당·공적부조·사회복지 서비스의 각 제도를 포함하는 제도로 생각되는데,[각주:6] 이런 제도와 이것에 기초한 시책의 특징으로, 어떤 논자는 의지처’-보완성, ‘남성본위’, ‘대기업본위의 세 가지를 거론한다.[각주:7] 이 중 보족성에 관해서는 80년대부터 이어진 생활보호의 적정화’(보호신청에 대한 체크의 엄밀화)에 의한 보호억제책의 실시가, 헌법 25조의 생존권 보장과의 관계에서 큰 문제를 낳게 되었음은 알려져 있다.[각주:8]

(4) 신자유주의적 전략과 복지국가

자주 지적되듯이,[각주:9] 60-70년대에는 국민의 관심을 오로지 경제성장으로 향하게끔 하는 정책이 취해졌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종래형의 통치전략의 한계가 자각되고, 정치대국주의로의 전환이 꾀해졌다. 자위대의 해외파병, 일미군사협력체제의 강화, 이익정치를 전환하기 위한 정치개혁’, 시장개방·규제완화, 소비세율의 인상 등이 시도되었다. 특히 90년대에서의 변혁의 규모와 영향은 막대하다. 그것은 1999년의 제145회 정기국회에서의 신가이드라인관련법을 시작으로 한, 일본의 국가법 체제 전반을 크게 전환시키는 내용을 지닌[각주:10] 각종 중대한 입법의 성립으로 정점을 맞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보장제도에 관해서는 복지의 시장화 노선[각주:11]이 추진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97년에 성립한 개호보험법에 기초한 20004월부터 실시된 개호보험제도는 종래의 조치제도를 폐지하고 공적 비용 부담분을 감소시키는 것인데, 이것은 개호 서비스를 소득이나 자산의 조건에 종속시키게 되는 등의 문제점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복지제도에 대한 나라의 책임을 재정적 책임도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폐기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각주:12]라는 비판이 있다. 또한 사회보장재원에서의 국비부담비율의 저하도 현저하며, “점점 더 국민생활의 보장이라는 국가책임의 원칙으로부터 사회보장·사회복지정책은 유리하고 있다[각주:13]고 지적되고 있다.

오늘날 일본국 헌법 하에서 적어도 이념으로서는 내걸어졌던 현대적 복지국가라는 국가이념을, 그것 이전의 국가이념인 자유방임국가, 미래를 향해 격세유전시킨다는 전환[각주:14]이 추진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복지국가의 재편성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이런 지점 때문이다.

 

2. 일본국 헌법과 복지국가

(1) 헌법학설의 동향

일본 헌법은 251항에서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의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생존권으로서 보장하고, 2항에서는 나라는 모든 생활 측면에 대해, 사회복지, 사회보장 및 공중위생의 향상 및 증진에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사회보장제도를 정비하는 것을 나라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이로부터, 헌법학설은 일반적으로, 주로 이 조항을 근거로 헌법이 복지국가의 이념이 될 것이라고 파악한다.[각주:15] 복지국가 이념의 존재를 전제로서, 전후의 헌법학설은 생존권의 권리성을 강조하고, 그 재판 규범성을 확립시키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이것은 생존권의 법적 성격론으로서 논의됐던 것이다.

생존권의 법적 성격을 둘러싸고서는, 보통 프로그램 규정설, 추상적 권리설, 구체적 권리설의 세 이론의 대립관계로서 설명되지만, 이런 설명에는 강한 의문이 제기된다.[각주:16] 위와 같은 학설의 대립관계의 배경에는, 재판상, 생존권 실현의 요구를 쉽게 버려버리기 위해 제출된 프로그램 규정설의 논리[각주:17]를 극복하기 위해, 생존권의 법적 권리성이 논의의 기축을 이루어왔다는 사정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존의 구체적 권리설이, 헌법 251항을 직접적인 근거로서 생활보호 등의 급부를 요구하는 판결을 끌어내는 것까지는 예정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감안해, 말의 본래적 의미에서의 구체적 권리성을 긍정하려고 하는 학설도 볼 수 있게 됐다.[각주:18]

생존권을 복지국가 이념으로서 위치짓는 것에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각주:19] 기존의 헌법학이 복지문제를 소극적으로 대우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각주:20] 그러나 최근에는 사정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유형의 복지국가를 구축하기 위한 헌법의 가능성을 정면에서 논하는 것이나,[각주:21] 복지국가가 온정주의[후견주의]적인 관료 지배의 폐해를 내장하는 점에 문제를 찾아내고, 개인의 자유·자율에 역점을 두고 복지국가의 바람직한 모습을 재파악하는 시도 등이 등장하고 있다.[각주:22]

(2) 복지국가의 기본원리를 둘러싼 논의

사회보장법학의 유력한 학설에 따르면, 사회보장법의 배경에 있는 근거이념·기본원리는 주로 생존권 사상과 사회연대사상에서 찾아진다.[각주:23] 사회연대사상은 공동체의 내부에서 그 구성원의 생활상의 어려움에 대해 서로 구제한다는 상호부조의 구조가 생겨나고, 그것이 발전하는 와중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 후, “국민국가의 성립에 이어 나라 전체가 하나의 사회가 되며, 이 사회의 구성원인 국민의 상호부조를 향하는 것으로서, 사회연대-국민연대의 생각에 선 사회보장이 성립된다. 이 사회연대사상은 Give and Take라는 교환은 상조·호혜의 공리적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반면에, 생존권 사상은 나라에 대해 생존의 보장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권리의 근거가 되는 일종의 자연법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더욱이 사회연대사상은 국민 대 국민 사이의 관계에 관련되는 반면에, 생존권 사상은 국민 대 국가의 관계에 관련되는 것이다.”[각주:24]

최근에는 사회연대를 논하는 전제로서 개인의 자율의 계기를 중시하는 견해도 역설되고 있는데,[각주:25] 기본적으로는 사회보장법의 기본원리에 관련된 위와 같은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이 글의 문제 관심과 과제

앞에서 봤듯이, 헌법학의 관심은, 종래는 오로지 생존권의 법적 성격론에 경사되어, 그 재판규범성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에 바쳐졌다. 최근에는 복지국가-사회국가의 부정적 측면에 주목하고, 개인의 자율을 위협하는 독선적인 보호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전개되고 있다. 1980년대 이래, 헌법상의 권리로서 자기결정권이 중시되고 논의가 계속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적극국가’ ‘행정국가에 의한 관리화의 현상에 대해 헌법적 규율을 미치고자 하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각주:26] 국가의 관리화에 대항하여 자기결정권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중요한 것이다.[각주:27]

그런데 1980년대에 서구형 복지국가를 대신하는 것으로서, “가족이나 지역공동체 등의 중간집단의 기능을 소생시킨 일본 특유의 일본형 복지사회가 제창되었을 때, 어떤 논자는 일본형 복지사회에 대항할 때, 단순히 과거의 복지국가로 회귀하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해결에 이르지 못하며, ‘복지기능을 떠맡을 수 있는 타당한 국가상 내지 사회상을 모색할 필요가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각주:28] 내가 아는 한, 이 문제제기에 대한 에두르지 않은 솔직한 응답은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이런 논자의 문제제기는 내가 보기론, 종래형 복지국가가 체현하는 공공성의 구조와 특성에 주목하고, 그 문제성의 모색을 촉구하는 담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국가의 공간에서 주조된 공공성의 내실을 분명히 하고 또 재편하는 작업이 요구되는 것 같다.[각주:29]

다른 한편으로 사회보장법학은 사회보장제도의 구축에 이러한 기본원리에 관련된 고찰을, 헌법에 기초를 지닌 생존권 외에, 사회연대사상의 관점에서 추진하는 것이 보통이다. 최근에는 개인의 자율을 중시하는 입론이 유력시되고 있는데, 그 점은 헌법학설에서의 자기결정권론의 융성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다만 거기서는 개인의 자유’, ‘자율이 강조되면서 다음과 같이 설이 이뤄지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각주:30]


개인내지 시민의 관점에 이르기까지 되돌아가서 다시금 의료보장제도의 방식을 구상한 경우, 직종·지역 등 국민 속의 여러 집단 사이에서의 보장의 방식(부담을 포함해)이 상이하다는 것의 정당성이 다시금 추궁당한다. 사용자 부담과 공금(정부) 부담이 지닌 의미 등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의 하나의 열쇠로서, ‘개인에서 출발해, ‘국가개인의 중간영역에 있으며 사회연대의 구성 개념이기도 한 사회의 현대적 의미를 되물을 필요성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글에서는 피에르 로장발롱[각주:31]의 복지국가 문제를 논한 두 개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의 복지국가론을 소개하기로 한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검토를 행하는 준비는 지금 내게는 없다. 새로운 복지국가를 추구하기 위한 기본적인 시각을 얻기 위해서 로장발롱의 저작의 소개를 통하여 유익하다고 생각된 몇 가지 시사를 제출하는 데 머문다.

 

II. 복지국가의 생성과 그 위기

우선 여기서는 로장발롱의 1981년에 출판된 복지국가의 위기(Le crise de l'État-providence)에서 전개된 논의를 소개한다.

 

1. 복지국가의 원동력

로장발롱에 따르면, 복지국가의 원동력은 근대국민국가의 운동 그 자체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그의 가정은 20세기의 복지국가는 고전적 보호자 국가(l'État-protecteur)의 심화 및 확대이다, 보호자 국가는 근대국가를 특별한 정치형태로서 정의한다는 두 가지 명제에 의해 명확해진다. 14-18세기에 걸쳐 사색되고 제련되었던 근대국가는 스스로를 보호자 국가로서 정의한다. 홉스나 로크가 구상했던 새로운 국가는 안전을 산출하고 불확실성을 감소시킨다는 이중의 임무의 실현을, 그 존립의 기초에 두었다. 국가를 구상하는 것과 보호로의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며, 개인의 탄생과 근대국가의 탄생은 동일한 운동의 특징을 띠게 된다. 권리의 향유 주체로서의 개인 없이는 보호자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보호자 국가 없이는 이러한 권리를 실현하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32] 이리하여 복지국가의 원류가 개인과 국가의 분극 구조에서 찾아지게 된다.[각주:33]

고전적 보호자 국가로부터 복지국가로의 이행은 18세기 말의 민주화·평등화 운동의 영향 하에서 시작된다. 1893년 헌법의 인권선언 제21[각주:34]에서 드러나듯이, 국가에 의한 소유권과 생명의 보호는 새로운 권리들(사회적 권리)로 확대된다. 경제적·사회적 권리들은 필연적으로 시민적 권리들의 연장으로서 나타난다. , 완전한 시민의 자격은 재산소유에서 찾아졌기 때문에, 재산소유자가 아닌 시민을 준소유자’(quasi-propriétaires)로서 다루기 위해서, 사회가 보장하는 안전의 등가물을 그들에게 주는 사회기구를 설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요구는 모든 개인에게 시민권의 완전한 권리들(선거권·경제적 보호의 권리)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소유이거나 아니면 그 효과들을 대체하는 기구에 의해 보장된다. 실제로 입헌의회가 1790년에 설치한 구빈위워회(Comité de mendicité)는 그 보고들에서 노동 및 특히 국유재산의 매각에 의해 재산소유자를 증대시키는 것과 빈민에 대한 공적 부조의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을 보여줬다.[각주:35]

혁명기의 보호자 국가의 역할에 관련된 담론과, 19세기 말의 진보적 공화주의자 및 1945년에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담론에 상이한 것은 전혀 없다. 따라서 복지국가는 개인과 그 국가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보호자 국가에서의 마찬가지의 표상 위에 구축되며, 그런 의미에서 보호자 국가의 확대 및 연장으로서 이해된다.

 

2. 위기의 상들

복지국가는 재정적 위기와 나란히 이데올로기적 위기에 직면한다. 위기에 처하는 것은 복지국가의 정당성이다. 결핍과 리스크로부터 사회를 해방한다는 무제한의 프로그램이 복지국가의 정당성의 기반이 된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의 사상은 평등의 사상과 겹친다. 이런 의미에서 복지국가는 근대의 민주주의적·평등주의적 문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평등의 가치를 둘러싸고 복지국가의 합목적성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난다. 제기되는 것은 사회에 있어서의 평등의 문제이며, 그것은 사회구조 그 자체의 장래를 둘러싼 투쟁이 된다. 복지국가를 관통하는 본질적 의구심은 평등은 대체 장래의 어떤 가치인가/장래가 있는 가치인가라는 것이다.

이 평등이라는 가치는 그것을 법적, 시민적 규범(법앞의 만인의 평등) 또는 정치적 규범(보통선거)에 편입되는 것이 중요하든, 지적으로는 문제없이 기능했다. 평등이 목표로 한 목표는 명확히 정의되었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적 영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해당 영역에서의 평등은 시민적·정치적 영역과는 다른 형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시민적 내지 정치적 평등의 요구는 시민적 내지 정치적 지위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 경우의 평등은 모든 자에게 동일한 규범을 결정함으로써 실현된다. 다른 한편으로, 경제적 내지 사회적 평등의 요구는 불평등의 삭감이라는 의사로서 표현된다. 이 둘은 비대칭이다. 한쪽은 동일화를 지향하는 평등의 산출이며, 다른 쪽은 동일화의 표적을 정하지 않는 불평등의 삭감이다. 경제적·사회적 영역에서는 동일화를 지향하는 평등을 요구하는 자가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사회의 중심적 역설이다. 그 핵심에 복지국가의 지적 동요를 읽어내어야만 한다고 로장발롱은 논한다.

그는 또한 복지국가의 지적 동요는 연대의 위기에도 대응한다고 지적한다. 재분배와 연대의 조직화를 중심적으로 담당하는 복지국가는 개인 및 집단의 대면관계를 대체하는 거대한 접면Interface으로서 기능한다. 이 복지국가가 행하는 연대의 조직화는, 그것을 구축하는 현실의 사회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보다 추상적인 것이 된다. 복지국가가 기계적으로 사회관계를 저해한다는 의미에서, 기계적인 연대(solidaritié mécanique)가 말해질 수 있다. 연대는 시장 메커니즘의 자동적인 산물, 또는 복지국가의 기능의 기계적인 결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게 아니다. 연대는 그것이 표현하는 사회적 모델이 사회적 관계의 최저한의 가시성에 입각한 경우에만 행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국가의 위기는 사회연대의 기계적인 표현의 한계에 대응한다.

오늘날 국가관리주의적 인터페이스는 대폭 불투명하며, 특히 기계적 연대의 표현 메커니즘은 중간적 사회적 결합관계(sociabilité)의 형태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고 있다. 보다 분권화된 수준에서의 사회 서비스의 비용과 비교하여, 복지국가의 사회서비스 비용은 점점 더 높아지는 결과가 된다. 기계적 연대는 인터페이스의 현상의 발전을 통해 연대를 저해하는 효과를 산출할 뿐만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부적합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점점 더 효과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은 국가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키고 그의 자율성을 상실함과 더불어, 점점 고립을 심화시켜간다. 그것이 복지국가의 위기를 증대시키고 있다. 연대의 위기는 복지국가의 발전에 의해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초래되었던, 사회적 조직의 붕괴, 보다 정확하게는 그 분해에서 유래한다. 이리하여 국가와 개인 사이에 더는 충분한 사회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단이 내려진다.

 

3. 연대의 사회화

로장발롱에 따르면, 복지국가에 관한 현대의 논의는 Privatation과 국가통제의 양자택일 상황에 빠져있다. ‘사회적·국가통제주의적시나리오와 자유주의적시나리오 이외에 제3의 선택지는 제기되지 않고 있다. 전자의 시나리오는, 현상황에서는 중대한 재정적 곤란에 봉착하게 된다. 후자의 시나리오는 재분배의 삭감을 귀결한다.[각주:36] 그것은 사회적 후퇴의 시나리오이며, 발생할 수 있는 반란에 대처하는 태세를 갖춘 강한 국가를 전제로 한다. 둘 모두, 그것은 정당성의 불충분함으로 연결된다. 신자유주의의 지적인 재구축은, 그 중산계급을 매혹시키는 힘을 무시할 수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시나리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두 시나리오는 다양한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국가통제와 민영화(Privatization)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한,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한 적극적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다.

시장과 국가의 양자택일이라는 딜레마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로장발롱은 제도적이 아니라 사회적인(sociétale) 종류의 대안, 즉 사회에 연대를 다시 다시 내장시킨다는 방책을 제안한다. 복지국가의 기계적 연대에 의해 산출되는 개인과 사회적인 것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사회를 보다 농밀한 것으로 하는 것, 사회구성의 중간적 장소를 증대시키고, 개인을 직접적인 연대의 그물 속으로 다시 편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경우 공동체적인 유토피아의 애매함을 제거해야만 한다. 본래는 방법론상의 것이었던, 유기적인 공동체와 개인주의적 사회 사이의 구별은 결국 나쁜사회에 대해서 좋은공동체를 재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가치판단으로 전화해버렸다. 그러나 게마인샤프트(공동체)로부터 게젤샤프트(사회)로의 이행은 관대한 연대성으로부터 보편화된 이기주의로의 변화가 아니다. 반대로 게젤샤프트는 그것이 훌륭한 해방의 도구로서 나타났기 때문에 발전되었던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로장발롱은 공동체로부터의 자율을 요구하는 운동의 강점을 잊고 향수어린 공동체의 신화로 도피해 들어가는 것을 경계한다. 복지국가의 대안은 복고적인 공동체의 회복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경우, 연대의 새로운 비국가적 형태의 구상을, 자율의 요구와 어떻게 어울리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로장발롱은 이 문제에 이론적인 대답은 없다. 공동체도 사회도 아닌 사회학적인 이상적 유형을 정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위에서 사회로의 연대의 재삽입을 가능케 하는 것은 모든 횡단적인 사회화의 형태이든, 이 사회성의 발전의 조건으로서 자유로운 시간의 증가나 노동시간의 단축이 추장된다.

나아가 로장발롱에 따르면, 복지국가의 위기는 증식하는 관료제 외에 기계적이고 추상화된 연대가 직면한 위기에도 원인이 있다. 복지국가는 블랙박스, 거대한 인터페이스로서 기능하고, 복지국가에 의한 자원의 재분배는 그것이 미치는 사회관계로부터 거의 완전히 절단된 것으로 이해되게 된다. 이리하여 사회적인 것의 불투명함이 증가하고, 현실의 연대는 그것이 더는 자각되지 않을 정도로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에워싸이게/감춰지게 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을 보다 읽기 쉽게 하는 것, 사회적 가시성을 증대하고 보다 현실적인 연대의 관계들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확실히 사회를 가시화하는 것은 긴장과 분쟁을 산출할 수 있지만, 분쟁의 건설적 해결에 길을 부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역할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가시성의 증대와 민주주의의 발전은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일치한다. 결국 복지국가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은 공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공간을 소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복지국가의 위기에서 이처럼 위기의 양상들을 분석함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했던 로장발롱은 1995년의 저작 새로운 사회문제 : 복지국가 재고(La nouvelle question sociale, repenser l'État-providence)에서 1980-90년대에서의 대량실업과 장기실업이라는 현상을 계기로 생겨났던 새로운 사회문제에 대해 현상태의 소극적 복지국가는 그 대응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으로서, 새로운 적극적 복지국가의 구상을 제시한다. 이어서 같은 책에서 전개된 논의를 연대원리의 재구성과 사회적 권리의 재구성이라는 두 관점에서 보기로 하자.

 

III. 연대원리의 재구성

1. 철학적 위기

로장발롱에 따르면, 1990년대에서 복지국가는 세 번째 위기, 즉 철학적 위기에 직면한다. 이 철학적 위기는 1980-90년대의 사회변동에 의해 촉진된 대량실업, 장기간 실업의 현상을 계기로 삼아 생겨났던 새로운 사회문제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소득의 상실에서 유래하는 빈곤뿐만 아니라, 교육·고용·주택·의료 등의 생활의 각 방면에서의 배제현상도 포함한, ‘(사회적) 배제의 문제이다.[각주:37] 위기는 두 개의 문제로서 현상한다고 로장발롱은 말한다. 하나는 연대의 조직화 원리의 붕괴이며, 다른 하나는 피배제자의 상태를 고려하는 데 충분한 틀을 사회적 권리의 전통적인 관념이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80년대에 악화된 사회적 분열상태에 직면하여, 공적 개입은 그 정당화 이유를 재발견했다. 극소국가(l'État ultraminimal)는 시대착오이다.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복지국가의 역할은, 누구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국가를 다시 정당화할 길을 탐색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복지국가가 그 역할을 적극적으로 계속 맡을 수 있도록 그것을 재고하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지적·도덕적으로 재건하는 것이 그 생존의 조건이 됐다고 로장발롱은 주장한다.

로장발롱은 또한 복지국가의 철학적 위기가 선진산업국들에서 공통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 대략 1세기에 걸쳐 우세해진 사회적인 것의 인식에 있어서, 결정적인 방향전환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적 위기는 17세기에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의해 정식화되는 권리의 관념을 둘러싼 문제를 다시 근본으로부터 고쳐 묻는 데에 이른다. 그것은 사회계약의 통상적 표현을 재고하며, 정당한 것 및 공평한 것의 정의를 재정식화하고, 연대의 형태들을 재발견하도록 독촉하는 것이다.

 

2. 보험 패러다임의 실추

복지국가는 역사적으로 보험제도를 기초로 발전해 왔다. 보험기술의 개발은 근대사회의 구축과 연대의 생산장치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실천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했다. 전통적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통합의 원리는 사회의 구조 그 자체에 기입된다. 가족, 근린관계 내지 전체적으로 봐서 사회적 계층구조에 관해서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자 노력하는 근대사회는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유형의 관계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8세기 당시, 사회적 유대를 고찰하기 위한 세 가지 모델이 존재했다. 정치적 대면에서 생기는 “(사회)계약”,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연결짓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작용하는 시장’, 연대의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작동하는 보험이다. 그러나 보험을 재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책임관념의 쇠약이나 부도덕한 행위가 생기는 것에 대한 우려가 초래되었다. 보험기술이 사회적 문제의 처리에 대한 적당하고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한 응답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은 빈곤의 망령을 내쫓기 위해 개인 책임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자각된 결과이다.

순서하게 개인주의적인 사회상과 연결된 아포리아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사회적인 것의 관리로의 보험의 도입이 서서히 진전된다. 대혁명 이래의 최대의 문제는 연대의 원리’(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부채를 진다)책임의 원리’(각 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생활할 수 있는데, 책임은 스스로 떠맡아야만 한다)와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개인 책임 원리의 적용 범위가 사회생활상 명료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 공적 구제에의 권리는 개인책임원리에 의해 제한되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에 의한 경제발전은 개인책임과 계약의 원리만이 지배하는 사회적 조절 시스템의 한계를 서서히 분명하게 했다. 개인의 책임에 속할 수 있는 것과 다른 요인에서 유래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또한 혁명기에는 부조에의 권리는 잔여적인, 거의 일시적인 성질만을 갖는, 사정을 한정된 권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전진에 따라 빈곤상태의 악화에 의해 단순한 구제로는 처리할 수 없는 사회적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소유권과 구제에의 권리 사이의 구래의 일관성을 파괴할 우려가 있으며, 사회의 조직화의 기반 그 자체를 흔들려고 했다. 이런 어려움들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회문제에 대한 보험의 적용이었다.

보험은 행동 및 개인 책임의 주관적 관념으로부터 리스크라는 객관적 관념으로 이행함으로써 상이한 방식으로 사회적인 것을 파악하라고 재촉하는 것이다. 리스크의 관점에서의 접근법은 개인의 과실이나 태도를 부차적인 것으로 하자마자 질병이나 노령, 실업 등의 다수의 상이한 문제를 통일적 형식 아래서 고찰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 외에, 새로운 관점에서 정의의 실천을 제기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는 이점을 지닌다. 이 접근법은 자연적·윤리적·정치적 규범에의 합치로서 이해되는 고전적 정의의 사상에, 계약에 의한 정의의 사상(보상의 제도)을 대립시킨다. 사회보험은 부조와 같이 국가에 의해 동의된 구제가 아니라 국가 및 시민이 대등하게 관여하는 계약의 이행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에는 보호자 국가가 떠맡았던 불확실성의 저감이라는 임무의 상당수가 보험의 메커니즘에 의해 거의 기술적으로 수행되게 되었다. 보험은 (강제에 의해) 보편화되자마자 진정으로 사회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그때, 일종의 도덕적·사회적 변압기(transformateur moral et social)’의 역할을 맡는다. , 사회보험은 사람들의 선의가 개재하는 것 없이, 안전과 연대를 산출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로장발롱은 복지국가의 기술적·철학적 기반인 이런 보험의 패러다임은 실제로는 쇠약하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첫째, 리스크라는 통일적 범주의 타당성이 상실되었던 것이다. 복지국가의 정의와 연대의 원리의 기초에는 리스크는 대등하게 분배되고 또한 널리 무작위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것은 오늘날에는 리스크 개념만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장기실업이라는 배제의 현상은 자주 영속적인 상태를 정의하는 것이 된다. 또한 고령자의 개호는 우연적인 종류의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리스크로서 생각되지 않는다. 나아가 오늘날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자연재해 등의 파국의 리스크는 보험은 행하는 리스크의 사회화가 적용되지 않는 사례이다. 둘째로, 유전의학의 진보에 의해 리스크의 우연성이 상실되고 있으며, 보험의 존립기반이 동요하고 있다. 셋째로, 본래 보험 시스템의 재분배는 순수하게 보상적이며 수평적 재분배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제도의 내부에서는 서서히 연대주의적 본질을 지닌, 소득계층간의 수직적 재분배의 메커니즘이 발전되었다는 사정이 있다. 넷째로, 인구혁명이라고도 불러야 할 저출산 고령화 현상의 영향 아래서 복지국가의 당초의 논리가 은밀하게 방향을 바꾸고 새로운 소득이전사회에 길을 물려줬다.

이런 조건들 때문에 보험원리에 의거한 복지국가는 쇠퇴의 경향을 보여준다고 로장발롱은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보험원리를 기축으로 한 비스마르크 모델의 퇴조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재원을 조세에서 찾는 베버리지 모델의 승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간주된다. 후자의 모델은 확실히 시민권에 의해 정초된 보편주의적 시스템을 수립했지만, 그것은 극히 낮은 액수의 급부밖에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제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보편주의적이지 않는 보완적 부조수당들을 설정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베버리지 모델 또한 보수되어야 했다. 로장발롱은 이상의 이유 때문에 두 모델 모두 구축되어야 할 새로운 복지국가의 모델로는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생각해야만 하는가? 이 점에 관해 로장발롱은 이런 두 모델의 역사적 차이를 넘어서 재구축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연대의 원리 그 자체이다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3. 정의 원리의 재고

로장발롱은 모델들의 차이를 넘어서 복지국가의 기초에 있는 특성으로서 애국적·공민적(civique)인 측면을 지적한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애국심에 근거한 공적 구제가 행해졌다. 또한 사회보장제도의 발달은 양차 세계대전에 의해 유발된 공민적 유대의 강화와 불가분하다. 실제로 사회보장의 조직에 관한 1945104일의 행정명령(ordonnance)의 제안이유서는 사회보장의 제도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쟁의 종결을 특징짓는 우애와 계급들의 화해의 고조에 관해 말한다.[각주:38] 로장발롱은 사회보장의 보험적 기초가 붕괴하고 있는 때에 회귀해야 하는 것은 공민적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는 원본적인 복지국가-‘공민적 복지국가’(État civique-providence)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회적 리스크의 단순한 상호화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이상, 어떤 정의의 원리에 기초하여 복지국가를 정당화하는가라는 철학적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보다 공민적인 본질을 지닌 시스템으로의 이행 내지 회귀는 사회적 부담에 기초한 자금조달로부터 조세에 의한 자금조달로의 이행을 의미하는가라는 기술적 문제이다.

우선 로장발롱이 문제로 삼는 것은 종래의 복지국가를 뒷받침했던,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라는 가상이다. 그것이 의거하는 보험원리는 각자가 각종 사회적 리스크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상정했다. 그 경우 사회적인 것의 불투명성은 공평감의 암묵적 조건이었다. 그러나 유전의학의 발달에 의해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태나 운명을 알 수 있게 되면, 일률의 보험료 지불에 대한 불공평감이 증대하게 된다. 보편적인 규범을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정의원리에는 한계가 있다. 각자의 다양한 상태에 무관심한 절차적 공평보다도 그것들의 상태를 통합하는 결과의 공평이 요구되게 된다. 격차의 인식의 역동성은 사회보험원리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설령 무지의 베일 아래에 있는 보험이 응집과 사회화의 기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에 관해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다양화할 때에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탈연대화의 운동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정의와 연대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수정된다. 격차보상의 한 형태로서의 연대는 적극적인 분배작용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정의는 연대로, 이 분배의 정당이라고 인정되는 규범을 지시한다. 보험원리에서는 리스크의 분배가 공평의 규범인 것과 더불어 연대의 절차이라는 의미에서 정의와 연대는 서로 겹친다. 그러나 격차가 우연성에서 파생하는 것이 아닌 이상, 정당한 것은 더는 아프리오리하게 정의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장발롱은 롤스의 정의론이 현실에서 지워지고 있는 복지국가 유형을 이론화한 것으로서, 그 퇴장을 선고한다. 그리고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식하는 정의의 접근법이라고 한다.

우연성의 요소의 비중이 저하한다면, 연대의 정당성 원리는 어떻게 정초될 수 있을까? 로장발롱은 더는 순수하게 절차적 평등의 원리는 문제로 될 수 없다고 하며, 연대의 기반을 개인들의 차이화된 취급에서 찾는다. , 연대는 더 이상 고정적인 보편적 규범의 적용으로부터 생길 수 없는 것이다. 그 경우 정의의 문제는 두 가지 점에서 검토된다. 하나는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스탠스이다. 자연적 불평등을 작용대상으로 하는 것은 개인의 단순한 평등 취급/대우에 머물지 않는, 기회의 평등(égalité des chances)의 원리이다. 이 틀 안에서 연대는 자연적 불평등의 보정작용으로 정의된다. 불평등을 줄이는 것은 자주 차별의 고발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반차별 투쟁은 공평의 규범(개인들의 균등한 취급/대우)을 격차 시정의 정책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수단이다. 자연적 차이의 삭제라는 유토피아를 경계하면서 차별 해소를 위한 포지티브한 조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경우 여전히 자연적 열위의 보정으로 향한 정의의 질서를 사회적으로 구축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둘째, 행동의 변수에 연결되는 격차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에서 생기는 격차는 수용될 수 있다고 하는, 로크 이래의 자유주의의 테제는 노동에서 유래하는 부의 격차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개인 책임을 고집하고 연대의 한계를 언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이론도 예를 들어 자연의 소여와 개인 책임의 영역의 구별이 논쟁의 주제가 되는 이상, 자명한 사항은 아니다.

이리하여 무제의 베일이 찢겨진 이상, 보험원리와 대등한 순수하게 절차적 정의의 이론을 발견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로장발롱은 논한다. 더는 정의의 정치적이고 상황에 적합한 접근법은 없다. 복지국가의 기반을 이루는 최소한의 정의(권리의 평등)에 만족하지 않는 한, 가능한 정의의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키지 않을 수 없다. 무지의 베일의 균열은 그것이 초래한 보험 시스템의 동요를 넘어서 정치의 비전 및 특히 그 법의 범위와의 관계의 비전을 근본적으로 수정한다. , 개인을 그 일반성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정치규범-법규범의 기능이 점점 현실로부터 괴리되는 것을 목격하고, 지금 그 적용대상이 개별 구체적인 정치적 규범의 정립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정치실천은 정의의 탐구와 일체화하며, 그로부터 새로운 분쟁이 생겨난다. 전통적인 계급투쟁의 견지에서 보는 분배를 둘러싼 분쟁에 머물지 않으며, 정의의 의미에 관련된 해석 분쟁이 점점 증대한다. 그 초점이 되는 것은 공평한 분배의 정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4. 국민을 다시 만들기

오늘날 유럽 사회에서 모순이 현저하다고 로장발롱은 말한다. , 국민을 다시 만들고, 연대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안으로 향하는 것이 요구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외국에 대해 더욱 개방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든 적든 국민이 필요해진다. 그것은 경제발전을 위한 경제적 국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끈을 강고하게 하기 위한 사회적 국민이다. 확실히 로장발롱의 진단에서는, 프랑스 사회에서는 세계의 비참함에 대한 진지한 공감과 기득권의 열렬한 옹호를 평화롭게 공존시킴으로써 점점 도덕적으로 정신분열병적으로 됐다. 공민적 공간의 쇠퇴가 그 원인이다. 결국 공통의 세계에의 귀속의 의미에서 이해되는 공민적 의미의 재건 없이, 연대주의적 복지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견해가 제시되는 것이다. 결여되어 있는 것은 동원이 아니라 그 실질 부분, 즉 국민이다. 요컨대 오늘날에는 일정한 방식으로 국민을 다시 만드는 것’(refaire nation), 즉 상호적인 사회적 부채의 인식이 뿌리를 내리는 공민적 토대(socle civique)를 재생시키는 것 없이 복지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5. 보험과에서 조세로

보험사회의 조락에 의해 보험 패러다임의 적용력이 상실된 결과, 논의의 초점은 이제 사회적 시민권(citoyenneté sociale)”의 중시의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 전개는 복지국가의 재정의 일부가 조세로 점진적으로 이행한다는 귀결을 초래한다. 1991년에 사회보장의 목적세로서의 도입된 일반복지세(contribution sociale généralisée)[각주:39]가 그 예이다. 더욱이 조세대체화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노동조합의 기득권과의 충돌이라는 곤란[각주:40] 외에도, 세금의 징수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이 보여지는 이상, 보완적 과제의 증대는 바로 막다른 길에 빠지지 않을까라는 염려가 있다.

사회보험과에서 사회보장세로의 이행에 관해서는 다음 두 가지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로장발롱은 지적한다. , 하나는 기술적인 것으로, 보험과 연대의 장의 명확한 분리가 문제해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정치적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포괄적인 조세개혁은 과데구조를 합리화함으로써 단순하게 정의와 유효성을 연결하는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신앙 속에 있다. 이 두 가지 환상을 떨쳐버리는 것이 긴요하다.

로장발롱에 따르면, 연대의 문제를 다시 볼 경우, 두 개의 길이 모색된다. 급부의 선별도의 증가와 과세구조의 재정의이다. 전자는 선별적 복지국가”(L'État-providence sélectif)의 문제이다. 사회급부의 수급층을 점점 좁혀가는[축소하는] 것이 선진산업국에서는 유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별’(séléctivité)을 행하는 것이 복지국가가 직면한 재정위기의 해결책으로 된다고 생각된다. 소득에 따라 단계화된 급부나 자산조건에 순순히 따르는 급부를 증대하는 나라가 많아지고 있다. 이 경향은 근대복지국가의 기초가 되는 도그마의 하나인 급부의 보편성과 충돌한다. 로장발롱은 사회급부의 선별적 배분은 모순에 봉착한다고 말한다. ,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한다면, 자산요건의 상한을 비교적 낮게 설정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중산계급의 상당수를 배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경우 사회급부의 선별적 배분은 정치적으로 실시하기 어려워진다. 선별원리가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려면 인구의 아주 일부만을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경우 실현될 수 있는 비용의 삭감은 미약한 채로 머문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사회급부가 시민권의 측면을 갖고 있다는 관점을 잃어서는 안 된다. 각종 사회급부는 사회적 유대의 표현의 하나이며, 평등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연대의 원리 그 자체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 결과, 보편성의 일정한 형태는 일정한 급부에 따라 유지되어야만 한다. 비용 삭감의 요청은 무시할 수 없지만, 선별성을 철학적 원리에 이르게 하여 복지국가를 최빈층에 대한 부조 시스템으로 환원한다는 귀결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는 것에, 로장발롱은 주의를 환기한다.

연대주의 시스템으로의 이행은 대가에 대한 암묵적인 기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사회보험의 사고와 단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회보험의 논리를 벗어나는 이상, 공무원이 실업보험과의 지출을 거의 전면적으로 면제된다고 하는 시스템은 더는 정당화될 수 없다. 연대가 만인의 안전을 조직화하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지위의 격차를 메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득세의 부담을 높이기보다도 그런 개혁을 순차대로 진척시키기 위한 합의의 형성이 더 찾기 쉬울 것이다. 소득의 증가에 대응하여 세율을 높이는 것은 개인의 노력을 불리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하는 인상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납세에 대한 저항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 점을 고려해도, 연대의 과세는 더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을까라고 로장발롱은 말한다. 객관적 내지 계승된 요건들, 즉 장애인과 건강한 자, 청년과 노인, 보호된 고용과 위험에 노출된 고용 등에 따라 과세가 연동되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 사이의 연대는 소득의 범주들 사이의 연대보다도 정당화하기 쉽다. 소득세를 기준으로 하면서 새로운 과세의 방법이 제시되어야만 한다는 로장발롱은 조세대체화를 지원하는 일반복지세의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다.

 

 

IV. 사회적 권리의 재구성

1. 소극적 복지국가의 한계

로장발롱에 따르면, 현대 복지국가는 소득상실의 보상(실업, 질병, 퇴직), 일정한 지출의 직접적 부담(의료비), 자산조건 하에서의 수당들의 지급을 행하는, 보상 메커니즘으로서 기능하는 소극적 복지국가이다. 이 복지국가는 실업에 관해서 두 개의 역설에 직면한다. 하나는 보상의 지출이 증대하는 반면에 채워지지 않는 요구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실업자에 대한 보상 대신에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둘째, 비취업 인구의 증가가 감소하는 취업인구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하는, 일종의 사회적 디플레이션적 악순환(deflationary spiral) 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연대의 자동파괴의 역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막다른 골목의 원인은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가 격화되었던(격화되었다고 여겨졌던) 것에서 찾아진다. 한편으로 경제효율이 추구되고 다른 한편으로 보상기계가 기능한다. 사회적 요청과 경제적 요구의 조화가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서로 파괴해버린다. 그러나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는 자주 진보의 요청으로도 생각된다. 이제 이 분리의 문제성이 논해져야만 한다.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는 대량의 실업과 장기간의 실업의 증가라는 현상을 산출했다. 1960-70년대 유럽 경제에서는 노동자 사이의 수평적 재분배(‘법정최저임금의 논리)와 세대 간의 수직적 재분배(연공임금)의 시스템이 기능했다. 이런 기업 수준에서의 재분배 기능은 80년대 이후, 서서히 붕괴를 시작한다. 그 결과 기업의 책임은 효율에서만 찾아지는 것과 더불어, 노동이 개인적 수준에서 이해되게 되며, 노동자 각자의 생산성이 중시된다. 불평등과 실업의 동시적 증가는 이 점에서 유래한다. 그런 의미에서 실업이란 경제적 근대성의 모순들이 우리 사회에 초래했던, 악화된 형태이다.” 다른 한편으로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의 심화는 복지국가의 발전을 초래하게 된다. 급진적인 근대성을 추구하는 기업이 외부화한, 암묵적인 사회적 보호의 요소들을 이번에는 복지국가가 떠맡는 것이다. 이것을 로장발롱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한편으로 포함과 평등의 민주주의적 원리, 다른 한편으로 차이화와 배제의 생산원리가 있다. 이 단절은 명백하다. 이로부터 생기는 것은 복지국가에의 연대의 기능이 집중하는 정도의 강력함이다.”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는 더 나아가 ‘(사회적) 배제의 허용에 이른다. 로장발롱은 배제·빈곤의 해결책으로서 주장·요구되고 있는 생활소득’(revenu d’exsistence)[각주:41]의 사상을 예로 들어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생활소득의 사고방식은 부조와 시민적 존엄을 어울리게 하는 시도로서 제시되는데, 각자에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본질적인 요구를 채우는 것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 소득을 지급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그것은 보편적 수당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는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가 증진하는 경향을 간파할 수 있다. 보편적 수당은 밀턴 프리드먼이나 랠프 다렌도르프 등의 초자유주의자(ultra-libéraux)의 지지를 얻고 있다. 프리드먼은 사회적 최저 소득은 어느 정도의 안전망을 마련한다는 장점을 가지며, 노동시장의 완전히 자유로운 작동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한다. 각 개인은 최저 소득을 보장받으면, 보수의 불충분한 고용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복지국가는 조야한 자유주의의 역설적인 조건이 된다. , 효율의 추구와 연대의 관심이 완전히 분리됨으로써, 거시적 사회계약은 미시 경제의 수준에서 시장의 완전히 반사회적인 기능을 정당화한다. 또한 생활소득의 문제성은,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근본적으로 분리함으로써 고용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킨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생활소득 창설 협회(Association pour l’instauration d’un revenu d’existence)고용을 위한 투쟁은 시대착오적인 싸움이다라고 하며, -마르크 페리는 보편적 수당을 창설하는 것, 그것은 완전고용의 시대착오적인 주제를 따르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라고 논한다.

로장발롱은, 보편적 수당의 사상은 위의 두 가지 이유로 역설적인 반전에 이른다고 한다. , 사회적 권리의 전진이 마침내 사회적 배제를 승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소극적 복지국가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채용해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게 된다. 무엇보다도 노동에 의한 진입”(insertion par le travail)야말로 배제에 대한 투쟁의 초석인 채로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로장발롱은 주장한다.

 

공동사회로의 귀속은 단순히 연대의 제도가 운영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훨씬 근본적으로는, 그 구성원을 연결시키는 상호적 효용의 원리가 있다. “소득에의 권리의 피안에 효용에의 권리가 있다. 사람들이 싸운 것은 부모 같은 온정을 갖고서 돌보는 복지국가에 의해 살 곳을 제공받고 옷을 받고 식사를 제공받는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일하고 살아갈 권리, 그들의 소득을 사회적 기능의 승인에 연결시키는 권리를 위해서이다. 일반적인 사회계약은 노동의 개별적 계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오늘날 전진을 도모하기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은, 소득에의 권리의 형성의 방향보다도 오히려, ‘노동에의 권리’(droit au travail)의 사상을 재발명한다는 방향이다.[각주:42]

 

2. RMI의 조심스러운 혁명

배제의 증가가 복지국가의 해체로 연결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 로장발롱은 고용문제와 복지국가의 불가분성을 강조한다. 그 경우, 복지국가의 재고는, 실업의 사회적 관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검토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과 복지국가의 새로운 관계를 찾는 시도 속에, 로장발롱이 주목하는 것은 진입”(insertion)의 관념이다. 이 관념은 배제와의 투쟁을 추구한다는 공통의 특징을 구비한 일련의 실험적인 사회실천을 특징짓는 것이다. 여기서 로장발롱은 프랑스에서 1988년에 도입된 RMI(Revenu minimum d’insertion: 사회진입최저소득제도)[각주:43]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

로장발롱에 따르면, RMI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권을 표현하며, 권리와 계약(contrat) 사이의 중간적 위치에 있다. 그것은 다음의 의미에서 권리이다. ,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피배제자가 사회에서의 소득을 다시 찾아낼 수 있는 것을 가능케 하는 최저한의 자원을 획득할 자격을 갖는다는 사실의 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RMI가 진입 과정에 대한 RMI 수당 지급자의 개인적 약속(engagement)이라는 대가와 원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한에서 계약이기도 하다.

RMI의 사례를 통해서 권리의 사고방식에 관련된 중요한 혁신이 이뤄지고 있다며, 로장발롱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진입 과정은 인간의 요구들 및 진입 수단의 공급 가능성에 적합한 것으로 이뤄진다. 수급자 각자의 고유한 상태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RMI개별화된 권리이다. 다른 한편으로, RMI의 부여는 어떤 행동 통제를 초래한다. 이런 의미에서 RMI조건부 권리이다. 권리의 특성을 보편성·무조건성에서 찾는다면, 엄밀하게 그것은 권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RMI는 권리에의 관계의 새로운 형태를 짜낸다. 권리의 대상물은 이제 단순히 수당, 특권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일반원칙이다. 지금까지도, 이런 유형에 속하는 권리들, 즉 생활, 주거, 안전, 기타 많은 사항에 대한 권리가 얘기됐다. 그러나 이런 권리들은 도구화될 수 없었다.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형식적 권리에 머물렀다. RMI는 권리를 정의하는 보편성의 속박을 완화함으로써, 이 영역에서 혁신하는 것이다. 즉 권리의 실현을 위한 수단의 추상적인 보편성과 맞바꿔서, 결과의 실제적인 대등성의 추구가 목표로 된다는 것이다. RMI는 개인들이 유일무이한(unique) 상태에 있다는 사실과, 진정한 공평이 실현되도록 그들이 개별적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통합하는 하나의 규범 유형을 마련한다. 그것은 결국, 기회의 평등의 관념을 충실케 하고 또한 확대하게 된다. 그리고 RMI절차적 권리”(droit procedural)로 불리는 것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3. 적극적 의무의 관념

로장발롱에 따르면, “RMI는 사회적인 것의 관습적인 접근법과는 단절하고 있다. 그것은 (주변인, ‘사회적 비호의 대상이 되는 사례를 단속적으로 떠맡는) 사회 부조의 전통적인 형태에도, (‘권리보유자에 기계적으로 급부를 행하는) 사회적 보호의 고전적인 등록부(registre)에도 속하지 않는, ‘세 번째 유형의 사회적인 것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간적인 위치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하다.” 로장발롱은 이 세 번째 유형의 사회적인 것을 탐구하는 시도로서, RMI 외에, 미국에서의 워크페어(workfare) 사상의 전개를 끌어들인다.[각주:44] 이처럼 사회적인 것의 재정의의 시도는 상이한 방식으로 행해지더라도, 거기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관계, 사회적 권리의 새로운 존재 형태의 아이디어, 사회적인 것의 주체들”(sujets)에 관한 정의의 변경이다.

로장발롱은 우선 그 명확한 방식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사회적 권리들의 대가를 정식화하는 방향으로 지칠 줄 모르고 나아갈 것이다라는 인식을 보여주며, 권리에 의무를 대치하는 사고는 결코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때, 사회적 권리들의 고전적인 관념을 발전시키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위치되는 것이, “진입에의 권리”(droit à l’insertion)이다. 로장발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입에의 권리는 개인을 단순히 구제해야 할 피부양자로서가 아니라 능동적 시민으로 간주한다. 진입의 관념은 이런 의미에서 경제적 구제와 사회적 진입을 연결하는 것이며, 민주주의적인 시대의 권리를 규정하는 데에 공헌한다. 권리들은 오로지 사회적 부채의 이론으로부터 꺼내질 때, 거꾸로, 수동적인 것이 되며, 의존의 관계 위에 구축된다(이것들은 전-민주주의적 시대에 인정받고 정식화됐다). 권리들의 자격 보유자는 종속된 주체에 머문다. 거꾸로, 의무는 재사회화의 운동의 특징을 띨 수 있다. 의무는 개인들은, 거기서 그들이 설 자리를 가질 권리를 보유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한다. 명확하게 이뤄지는 것은, 단순히 살아갈 권리라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갈 권리이다.

 

소셜워크의 실천에 있어서 계약”(contrat)의 관념이 점점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은, 이런 새로운 사회적 권리의 길을 개간하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회복지의 권리주체는 곤란한 상태, 상당히 비참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체결하고 또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책임 있는 자율적인 개인으로 간주된다.

말할 것도 없이, 근대적 개인의 관념은 자율성을 기본 요소로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개인의 자율성(특히 정치적 자율성)은 사회의 안전과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됐다. 그래서 부조는 그 은혜를 향유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율성을 빼앗는 경우에만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됐다.” 비교적 최근까지, “사회주의적인국가들이, 시민권을 결여한 사회권 보장의 제도를 마련했다. 그것들은 정치적 종속의 대가로서 일련의 물질적 권리를 보장하는 유형의 복지국가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사회는 후견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형태를 취하는,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 부조의 길을 찾아내어야 한다.” 로장발롱은 이 보호와 의존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에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RMI의 중핵에 위치하는 계약=적극적 의무(obligation positive)의 관념이라고 한다.

로장발롱에 따르면, 진입계약은 개인과 사회의 고독한 대면을, 사회를 산출하는 원리인 사회계약에 연결시킴으로써, 충실하게 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진입에 수반되는 의무는, 자유의 제한형태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을 구축하는 모멘트이다. 개인주의적인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에 대한 요구가, 거기에는 배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적극적 의무의 관념은 소극적 복지국가를 극복하는 수단을 찾아낼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극적 의무의 관념은, 소극적 복지국가의 아포리아, 즉 사회적인 것의 전체주의적 비전에 의해 길러진 공동체의 유토피아에 빠지는 것을 면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개인의 최대한의 존중이 사회적 관계의 재구축을 수반하는 계약에 의한 개인주의”(individuatisme contractuel)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로장발롱은 말한다.[각주:45]

 

4. 사회적인 것의 개별화

로장발롱에 따르면, “1945년에 창설되고 발전된 복지국가는 더 이상 미래의 모델이 될 수 없다. 그 철학적·기술적인 기반은 풍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원인은 단순히 규범이나 권리, 절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복지국가는 또한 일종의 사회학적 혁명에 직면하고 있다고 분석된다. , 주체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비교적 균질적인 사람들(집단 또는 계급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잘 조직화되어 있었다. 복지국가는 이제 특히, 모두 각각 고유한 상태에 있는 개인들을 떠맡아야 한다.”

이 변화를 강요하는 대표적인 현상으로서, 장기실업자와 채무 초과 세대의 존재를 꼽고 있다. 이 두 가지 범주는, 그것들을 선천적으로 식별 가능케 하는 그 어떤 특성도 갖지 못한 것임이 드러난다. 그 때문에, 그것들은 전통적으로 사회복지활동의 대상이 됐던 인구(populations)를 구성하지 않는다. , 사회적 공동체도 통계학적인 집단도 구성하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배제의 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RMI가 마련된 것도, 고전적인 통계학적 접근법에 기초하여 대상화되는 인구를 기초로 한 사회복지활동의 한계가 자각됐기 때문이다. , 국가와 소셜워크는, 그 수를 늘리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개인이 사회복지활동의 전통적인 범주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되며, RMI의 창설이 합의되게 됐다.

통계자료가 풍부해지는 한편, 사회적인 것의 이해가 어려워진다. 이 역설은 비교적 완만하게 움직이는 계급사회를 파악하기 위해 19세기에 착상되고 마련된 각종 통계적인 인식장치의 한계에 의한 것이다. 이제 사회적인 것을 분석하기 위해 점점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사회학이 아니라 개인사이다. 기술해야 할 것은 집단적 정체성이 아니라 개인적 경력(parcours)이다.

그러나 개인들을 그 고유성에 있어서 이해하는 것이 사회정책의 유효성을 확보하는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한다면, 복지국가는 인간의 행동을 관리·통제하는 기관으로 바뀔 위험성이 있는 게 아닐까? 미국에서는 수당 수급자에 대해 교육적 압력을 넣거나, 그 가족 형태에 대해서도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례가 보인다.[각주:46] 이 점에 관해서, 로장발롱은 우리는 오늘날, 개인과 사회적 제도들 사이의 관계의 전반적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고 하면서, 변화하고 있는 모든 실천들을 즉각 낡은 형태의 온정주의[후견주의, paternalism]와 접합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확실히 19세기의 사회복지활동은 빈민을 도덕화하는 목적을 가졌다(도덕적 개인의 추구). 그러나 새로운 사회정책은 오히려 사회적 개인을 목표로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적 교정이 아니라 개인의 행동의 사회적 영향이다. 그 점에서 현대사회의 발전의 더 광범위한 틀 속에서 새로운 사회정책을 재위치시킬 필요가 있다고 로장발롱은 말한다.

또한 국가가 사람들의 행동을 관리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배경에는, 개인주의의 심화亢進나 가족제도의 붕괴에 의해, 개인의 보호자인 국가의 역할이 증대하고 있다는 사정도 있다. 친척에 의존할 수 없게 될수록 개인은 점점 더 국가의 보호적인 권력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서 가족이 표상한 근접한 사회적 보호의 형태들을 재창출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국가는 개인에게 작용을 가함으로써 사회적 결합관계(sociabilité)의 생산자의 역할을 맡고자 한다. 국가가 이 경우에 장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충실성, 효심 등의)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형태들이다.

 

5. 기회의 평등 재고

사회복지 활동의 새로운 주체가, 더 이상 계급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개인이라고 한다면, 관련된 개인은 필연적으로 차이화된 지원을 제안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국가는 이제 단순히 수당들의 배분자 및 보편적 규범의 관리자일 수 없다. 복지국가는 서비스 국가”(Etat-Service)가 되어야 한다고 로장발롱은 말한다. 그 목적은 각자에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단절을 극복하고, 고장을 예상하는 고유한 수단을 주는 것이다. 또한 평등 개념의 이해에 대해서, 로장발롱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이미 시사한 절차적 권리모델에 있어서는, 공평(équité)은 동등한 취급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의미한다. 거기에서는 기회의 평등은 기회의 공평으로 이해된다. 기회의 공평은 우선 자연의 불평등 또는 재산의 격차를 메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활을 다시 궤도에 올리는 수단을 항구적으로 되찾게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고전적인 위험의 차원에 속하지 않는 모든 위험에 대처할 수단을 개인에게 주는 것이 목표라고.

 

 

5. 정리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소개한 로장발롱의 논의의 요점을 간단하게 정리하자. 그런 다음에 향후 생각해야 할 과제를 약간 지적하기로 한다.

 

1. 로장발롱의 논의의 요점

(1) 복지국가의 위기

로장발롱에 따르면, 현대의 논의에서의 복지국가를 둘러싼 양자택일적 상황(민영화privatization인가 국가통제인가)으로부터의 탈출을 도모해야 한다. 대안은 사회적인 종류의 것이다. , 개인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괴리를 메우고, 개인을 직접적인 연대의 그물 속에 다시 집어넣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경우, 공동체적인 유토피아의 환상을 뿌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강조되고, 개인의 자율과 연대의 요구를 접목한다는 과제가 제시된다. 또한 사회적인 것의 불확실성이 연대의 현실성을 잃고 있다는 분석으로부터, 사회를 가시적인 것으로 하는 것, 또한 그것에 수반된 분쟁 해결에 기여해야 할 민주주의의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2) 새로운 사회문제 : 복지국가 재고

그 후의 문제상황을 감안해 작성된 이 책에서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나타내는 두 가지 현상으로서, 연대조직 원리의 붕괴와, ‘배제의 새로운 사회문제에 직면하여 분명해진 전통적인 사회적 권리 관념의 한계를 꼽고 있다. 연대의 위기는 과거의 연대의 기초에 있던 사회보험제도의 동요와 접속되어 있다. 기존 유형의 복지국가를 지탱했던 롤스의 정의 원리는 더 이상 통용성을 잃었다. 평등의 새로운 정식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면서, 로장발롱은 기회의 평등의 실질화를 도모하는 방향성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사회보장의 보험적 기반의 붕괴를 겪고, “공민적 복지국가로의 회귀가 모색된다. 이런 문맥에서 첫째로 재분배의 공간으로서의 국민의 관념을 재정립한다는 과제가 강조된다. 그 어려움을 충분히 자각한 다음에, 더 판독하기 쉽고 보기 쉬운 사회적 유대(le lien social)를 산출하기 위한 정치의 임무에 기대를 걸고 있다. 둘째, 연대의 강화를 목표로 한다면, “선별적 복지국가의 방향은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견지에서, 조세 대체화, 특히 일반복지세의 도입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다른 한편, 전통적인 복지국가는,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에 입각하는 보상자인 복지국가(État-providence compensateur)라고 규정된다. 질병과 단기간의 실업 등의 일시적인 기능 장애를 메울 권리라는 사회적 권리의 파악방식은, 현재의 문제상황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 있는 복지국가를, 로장발롱은 소극적 복지국가라고 명명한다. 반대로 적극적 복지국가(État actif-providence)의 구체화는, 사회적 권리의 관념을 비옥하게 하는 지적 행위와 불가분하다. 로장발롱은 배제와의 투쟁에 있어서는 노동에 의한 진입이야말로 문제해결의 계기가 되며, 프랑스의 RMI의 경험을 참조한다. 거기서 발견되는 의무는 적극적 의무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율의 모멘트를 중시하는 것이며, 그것과 더불어, 사회적인 것을 구축하는 모멘트이기도 하다. 요컨대 개인주의의 아포리아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유토피아에도 빠지지 않는, 새로운 복지국가의 기저적 원리가 거기서 발견되는 것이다(계약에 의한 개인주의).

복지국가는 또한 표준화된 전통적인 절차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각각 특유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감안해, 그것들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간주된다. 그 경우, 국가가 개인의 생활영역에 깊이 들어서고, 사회적 통제의 기능을 강화할 위험성이 있다. 로장발롱은, 이 문제에 대해, 장기적으로, 사회적 이익이나 정책적 배려 때문에 개인의 행위가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고 시사한다.

 

2. 향후 생각해야 할 것

(1) “사회연대

이미 봤듯이, 사회보장 법학설의 통설적 이해에 따르면, 사회보장법의 기본원리의 하나로서 사회연대를 꼽을 수 있다. 이것 자체는 수긍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예컨대 1964년의 헌법조사회 보고서에 나타난 복지국가론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이, “연대를 새삼 강조하는 사고방식은 개인의 자유”, “자율을 위협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사회연대(국민적 연대)를 말하기보다는, 개인의 자유”, “자율의 가치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만 그 경우, “자율성·자발성에 주목하는 90년대 행정개혁노선이 규정하는 자율적 개인상과의 관계·같고 다름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사회연대를 국가책임 방기의 문맥에서 공동체적 연대로 바꿔 읽거나, 국가 책임 하에서의 국민의 의무로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면, 새로운 연대의 형태를 제출할 필요가 나온다. 로장발롱은 복지국가의 위기에서 연대의 새로운 비국가적인 형태의 구상을 자율의 요구와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이 점은 프랑스에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배제의 극복을 시야에 넣고 복지국가의 재구축을 논한 새로운 사회문제에서 심화된다.

거기에서 로장발롱은 기존의 사회연대원리를 나타냈던 롤스의 정의의 원리의 한계를 지적하고, 평등의 새로운 형상을 모색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또한 프랑스에서 현실에서 채용된 RMI의 제도의 의의를 강조하고, 그것이 창출하는 진입에 관한 권리·의무의 구성에, 사회적인 것의 새로운 형상을 산출할 계기를 찾아내고 있다. 진입계약은 부조를 받는 사람들을 자율적 존재로서 승인한다는 전제 하에 있다. 또한 진입계약에 의한 의무는, 사회가 RMI 향유자의 수용을 그 자의 권리로서 승인한다는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이며, 그 자의 사회에서 살아갈 권리를 명시하는 것이다.

확실히 RMI는 모든 사회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며, 문제점도 몇 개 지적되고 있다. 로장발롱도 언급한 미국의 워크페어 제도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전략의 수행의 맥락에서 고찰될 때, 이로부터 긍정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에 대한 권리를 노동의 의무와 연결시키는 사상[각주:47]에는 무시할 수 없는 인력(引力)이 있는 것 같다. 개인의 자율·존엄의 요청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것의 구축에 기여한다고 하는, 로장발롱에 의한 RMI의 도식화는 진지하게 고찰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향후의 과제이다.

 

(2) “통합의 과제

프랑스에서 제3공화정기에 사회연대가 표방됐을 때, 거기서는 국민의 사회적 통합을 확보하는 것의 필요성이 강하게 의식됐다.사회국가가 수행한 것은 사회적 연대의 감각을 집합적(국민적) 정체성의 감각에 의해 뒷받침한다는 기획이었다. 공교육, 공공방송, 공식행사 등에 의해 우리라는 표상을 부단하게 환기하고 보강하는 기획, 전쟁이나 대외위기의 호소에 의해 우리의 감정을 강력하게 충전하는 기획 등이다.” 이것은 자주 지적된다. 다른 한편, 복지국가에 있어서는, 사회적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사회연대나 공동성을 실현시키고, 국민적 통합을 달성하는 것이 기대됐다. 그러나 권리에 의한 통합의 곤란성도 종종 지적되고 있다.

현재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국 동맹의 세계 지배 하에서, 각각의 선진국들은 다국적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고 ‘megacompetition’의 시대를 표방하면서 국내의 복지국가 체제를 해체하고, 시장경쟁에 국민을 내던지려고 한다. 그것은 국민국가의 보호단체로서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있으며, 달리 말하면 nation을 통합하는 state의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지적이 있다. 통합의 가치를 희생하고,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지위에 내몰린 사람들의 구제 시스템을 극소화하고, 사회로부터 낙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하여, 국가의 치안 능력을 높이는 전략이 이뤄지고 있다. 원래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공감대]가 취약한 일본에서 사회연대(국민연대)는 더욱 저해되고, 복지국가로의 도정은 매우 곤란하다.

로장발롱은 사회보험 패러다임의 붕괴에 직면하여 회귀해야 할 것은 공민적 복지국가라고 말한다. 현재의 문제는 기존의 국민적 연대를 가능케 했던 공민정신”(civisme)이라고 불리는 것(징병, 학교, 막사 등)의 연대가 서서히 해체되고 있으며, 개인이 국민으로 일체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투영할 수 있는 제도들은 더 취약하고 진부한 것이 됐다고 하다. 그러나 로장발롱에 따르면 대안은 과거의 공민정신을 몽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공동체적인 것이라고 가정되는 사회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집단적 유대(un nouveau ciment collectif)를 찾아내는 것 없이는, 연대를 재정립할 수 없다고 한다.

자유지상주의와 공동체주의 둘 다를 거부하는 로장발롱이 시사하는 것은, 결국 정치적인 것의 이념에 대한 기대인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의 정치생활과 사회생활은 동일시되려고 한다. 복지국가는 더욱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이 된다. 정의의 탐구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조정과 민주적인 타협이며, 개인적 선호, 가치체계, 개념들의 착종 사이에서 공통의 길을 탐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똑같은 말로 얘기하고, 또한 사회적 부채의 형태에 관해 합의하기 위한 노력이다.” 로장발롱에 의한, 연대의 산출을 담당하는 협의 민주주의(démocratie délibérative)의 의이와 기능에 대한 주목일본의 법 실천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는 향후의 과제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기회의 평등의 실질화[각주:48]온정주의의 문제[각주:49], 논해야 할 과제가 있다. 모두 이제부터 고민하고 싶다.

 

  1. 東京大学社会科学研究所 編, 『福祉国家 1 : 福祉国家の形成』(東大出版会, 1984年), 3頁. [본문으로]
  2. 예를 들어 鳥居喜代和는 “일본국 헌법 유형의 복지국가는 27조론을 불가결한 요소로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鳥居, 「法学的国家論としての『福祉国家』と日本国憲法」法の科学」, 27号(1998年), 110頁. [본문으로]
  3. 渡辺治, 『「豊かな社会」日本の構造』(労働旬報社, 1990年), 143頁.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의 복지국가 비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갖고 있었다. “복지국가 = 공적 기능의 확대는 본래 시장을 통해 민간에게 제공되어야 할 자원을 빼앗는 것이며, 따라서 사적 부문의 경제적 활력을 빼앗는 것이었다. 게다가 복지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자립 자조의 정신을 빼앗고, 기업가 정신·근로 의욕을 감퇴시킴으로써, 점점 더 공적 부문의 확대를 필요로 하게 됐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시장 메커니즘의 확대를 통해 복지국가를 해체하는 것이 긴요[하다].” 新川敏光, 「日本‥日本型福祉の終鳶?」, 岡沢意芙-宮本太郎 編,『比較福祉国家論』(法律文化社, 1997年), 154頁. [본문으로]
  4. 제2차 임시행정 조사회의 1981년과 1982년의 답신에서 강조된, 서구형 ‘복지국가’의 거부와 일본형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선택의 헌법론적 의미에 대해서, 樋口陽一, 「『福祉』シンボルの正と負 : 日本憲法学と『福祉』問題」, 同, 『近代憲法学にとっての論理と価値』(日本評論社, 1994年), 149頁 이하를 참조. 또한 관련된 부분은 이 저자가 東京大学社会科学研究所 編, 『福祉国家4 : 日本の法と福祉』(東大出版会, 1984年)에 있어서 발표한 논문을 수록한 것이다. [본문으로]
  5. 자세하게는 佐藤進, 「社会福祉法制」ジュリスト 1073号(1995年), 226頁 이하를 참조. [본문으로]
  6. 窪田隼人 외 編, 『新現代社会保障法入門』(法律文化社, 2000年), 4頁〔河野正輝 집필〕. [본문으로]
  7. 大沢真理, 「公共空間を支える社会政策」, 神野直彦・金子勝 編, 『「福祉政府」への提言』(岩波書店, 1999), 192頁 이하. 더 자세하게 소개하면, 첫째로 사회보장보다도 가족이 개인을 돌본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 그것은 생활보호법의 보완성과 세대 단위의 원칙 및 아동수당제도의 주변적인 위치부여에 특히 명확하게 나타난다. 둘째, ‘의지처’가 되는 가족의 모습이나 기능이 “남편은 일, 아내는 가정”이라는 성별 분업, 따라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 기초를 갖고 있다는 것. 셋째로, 사회보험이 “대기업본위”라는 것. 즉, 건강보험조합(‘조합건강보험’)과 후생연금기금으로 대표되듯이, 대기업의 노사만큼 갹출과 급부의 양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향유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大沢에 따르면 “일본형 복지사회”를 슬로건으로 80년대에 전개된 “개혁”을 통해 일본의 사회정책은 위의 세 가지 점의 특징을 더욱 강하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예를 들어, 尾藤慶喜 외 編著, 『誰も書かなかった生活保護法』(法律文化社, 1991年) ; 尾藤慶喜 외 編著, 『生活保護法のルネッサンス』(法律文化社, 1996年) ; '特集 「生活保護争訟」法律時報 71巻 6号(1999年) 등을 참조. [본문으로]
  9. 예를 들어 渡辺治, 『政治改革と憲法改正』(青木書店, 1994年) ; 同, 『日本とはどういう国かどこへ向かって行くのか』(教育史料出版会, 1998年) ; 同, 『企業社会・日本はどこへ行くのか』(教育史料出版会, 1999年) ; 浦田一郎, 『現代の平和主義と立意主義』(日本評論社, 1995年) 등을 참조. 또한 포스트 냉전기에서의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검토하는 동시에, 현대 일본의 제국주의화의 양상들을 분석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의 과제와 전망을 제시한, 渡辺治=後藤道夫 編, 『講座・現代日本』全四巻(大月書店, 1996~1997七年)이 중요하다. [본문으로]
  10. “군사 법제의 대전환을 핵에 포함하면서도 국가법 체제 전체의 전환이라는 것이 21세기를 향한 정부 지배층에 의해 밀어붙여지려고 한다”는 지적이 있다. 対談 「新ガイドライン関連法の成立と国家法体制の再編」에서의 山内敏弘의 발언. 法律時報 71巻 9号(1999年), 13頁. [본문으로]
  11. 二宮厚美,『現代資本主義と新自由主義の暴走』(新日本出版社, 1999年), 230頁. [본문으로]
  12. 伊藤周平, 『介護保険 : その実像と問題点』(青木書店, 1997年), 200頁. 또한 同, 「介護保険と社会保障のリストラ」, 『世界』, 1999年 3月号 111頁 이하를 참조. [본문으로]
  13. 浅井春夫, 「新自由主義の福祉政策 = 非福祉国家への道」, 『現代思想』 28巻 4号(2000年), 90頁. [본문으로]
  14. 市席末哉, 「日本国家の力能再編」, 『法の科学』 27号(1998年), 28頁. [본문으로]
  15. 中村睦男, 「生存と憲法」, 樋口陽一 編, 『講座恵法学4 : 権利の保障[2]』(日本評論社, 1994年), 64頁. [본문으로]
  16. 예를 들어 奥平康弘는 「堀木訴訟最高裁判決」(最大判 1982·7·7民集 36巻 7号, 1235頁)에서 입법재량설이 설파되기에 이르러서는, 기존 학설의 대립은 “실천적으로는 거의 무의미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奥平, 『憲法Ⅲ』(有斐閣, 1993年), 247頁. 또한 戸波江二는 “이 세 가지 설에 의한 설명은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생존권의 권리성을 추상적으로 논할 뿐이며, 헌법 25조의 설명으로서는 타당하지 않다. 특히 생존권 규정이 법률 또는 국가행위를 위헌이라고 할 근거가 될 수 있음이 간과되고 있다. 원래 ‘생존권 규정이 프로그램 규정인가 법적 권리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불명확하고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戸波, 『憲法[新版]』(ぎょうせい, 1998年), 302頁. [본문으로]
  17. 식량관리법 위반 사건(最大判 1948・9・29 刑集 2巻 10号 1235頁)을 효시로 하여, 朝日訴訟最高裁判決(最大判 1967・5・24 民集 21巻 5号 1043頁)에서도 채용됐다. 堀木訴訟最高裁判決(最大判 1982・7・7 民集 36巻 7号 1235頁)에서는 프로그램 규정설을 채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입법부의 재량이 “현저하게 합리성을 결여하고 분명히 재량의 일탈・남용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사법심사가 미친다고 하기 때문에, 그런 한에서 헌법 25조에 재판 규범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광범위한 입법재량을 인정한다면, 실질에 있어서 프로그램 규정설이 취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18. 예를 들어 棟居快行, 「生存権の具体的権利性」, 長谷部恭男 編著, 『リーディングズ現代の憲法』(日本評論社, 1995年), 155頁 이하를 참조. 그러나 그래도 사회보장법학의 입장에서는 헌법학의 “생활관의 빈곤”이 지적됐다. 다음을 참조. '井上英夫, 「日本国憲法五〇年と社会保障の権利」, 『法の科学』, 27号(1998年), 26頁 이하. [본문으로]
  19. 다만 이의제기도 있다. 다음을 참조. 阪本昌成, 『憲法理論 III』(成文堂, 1995年), 312頁. [본문으로]
  20. 樋口, 前掲注(4), 164頁이 이를 지적한다. [본문으로]
  21. 鳥居, 前掲注(2) 참조. [본문으로]
  22. 다음을 참조. 西原博史, 「(社会権)の保障と個人の自律」, 『早稲田社会科学研究』, 53号 (1996年) 109頁 이하 ; 笹沼弘志, 「現代福祉国家における自律への権利」, 『法の科学』, 28号(1999年), 96頁 이하. [본문으로]
  23. 堀勝洋, 『社会保障法総論』(東大出版会, 1994年), 95頁 이하 ; 高藤昭, 『社会保障法の基本原理と構造』(法政大学出版局, 1994年) ; 同, 「社会連帯の法理と福祉国家」, 『社会労働研究』(法政大学), 40巻 1·2号(1994年), 34頁 등을 참조. [본문으로]
  24. 掘, 위의 책, 100-101頁. [본문으로]
  25. 菊池替実, 「『社会保障の権利』論(2・完)」, 『北大法学』, 47巻 2号(1996年), 692頁 이하 ; 同, 「新たな医療保障(汰)原理の構築に向けて-ドウオーキンのブルーデント・インシュアランス・モデル」, 『季刊 社会保障研究』, 33巻 1号(1997年), 76頁 ; 同, 『年金保険の基本構造 : アメリカ社会保障制度の展開と自由の理念』(北大図書刊行会, 1998年)을 참조. [본문으로]
  26. 竹中勲, 「自己決定権の意義」, 『公法研究』, 58号(1996年), 30頁. [본문으로]
  27. 그러나 이 점에 대해 中島徹는 “자기결정권이라는 관념은 전후 헌법학에 있어서 양날의 칼일지도 모른다. 자기결정권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결부되면, 복지국가 해체의 원리인 시장주의가 되어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연결을 끊어버리지 않는 한, 전후 헌법학은 시장주의를 유효하게 비판할 수 없다”고 한다. 中島, 「市場と自己決定・下」, 『法律時報』 72巻 7号(2000年), 51頁. [본문으로]
  28. 樋口, 前掲注(4). [본문으로]
  29. 이 점에 관해서는 粛藤純一의 최근 업적(『公共性』〔岩波書店, 2000年〕)이 사고를 정리하고 또한 전진시키기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것 같다. [본문으로]
  30. 菊池, 「新たな医療保障(法)原理の構築に向けて」前掲注(25) 76頁. [본문으로]
  31. 피에르 로장발롱은 프랑스의 사회철학자・역사학자. 여기서 거론하는 것은 ① La crise de l’État-providence, Paris. Seuil, 1981(또한 이곳에서는 1992년의 신판을 참조했다) 및 ② La nouvelle question sociale, repenser l’État-providence, Paris. Seuil, 1995로, 후자의 소개가 중심이 된다. ①에 관해서는 이미 樋口陽一에 의한 적절한 소개가 있다. 樋口, 앞의 각주 4. 157頁 이하. 또한 사회정책 분야에서 로장발롱의 일련의 저작을 상세하게 거론하면서 프랑스의 복지국가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鹿田明의 업적이 중요하다. 鹿田, 「フランスにおける福祉国家の成立」, 『社会労働研究』(法政大学), 45巻 4号(1999年) 105頁 ; 同, 「福祉国家の危機と変容」, 大山博 외 編著, 『福祉国家への視座』(ミネルヴァ書房, 2000年) 76頁. ②에 대한 전체적인 소개는 좁은 식견으로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에서의 복지국가의 성립 사정을 검토한 최근 연구로는 贋滞孝之, 「フランス『福祉国家』における『一九四五-四六年体制』の成立」, 『松山大学論集』 10巻 5号(1998年), 1頁이 있다. [본문으로]
  32. Rosanvallon, La crise de l’État-providence. pp.20-21. [본문으로]
  33. 樋口, 앞의 각주 4, 159頁. [본문으로]
  34. “공적 부조는 신성한 의무이다. 사회는 불행한 시민에게 노동을 확보해줌으로써, 또는 노동할 수 없는 자에게 생활수단을 보장함으로써 그 생존에 대해 책무를 진다.” 번역문은 辻村みよ子, 『フランス革命の憲法原理』(日本評論社, 1989年), 408頁을 참조했다. [본문으로]
  35. Rosanvallon, La crise de l’État-providence. pp.23-24. [본문으로]
  36. 이 점에 대해서는 A. ギャンブル(小笠原欣幸 訳)『自由経済と強い国家』(みすず書房, 1990年)을 참조. [본문으로]
  37. “(사회적) 배제”(exclusions)의 문제에 대해서는 都留民子, 『フランスの貧困と社会保護』(法律文化社, 2000年)이 자세하다. [본문으로]
  38. 1945년의 행정명령(ordonnance)의 의의・위상에 대해서는 田端博邦, 「フランスにおける社会保障制度の成立過程」, 東京大学社会科学研究所 編, 『福祉国家2-福祉国家の展開[1]』(東大出版会, 1985年), 125頁 이하를 참조. [본문으로]
  39. 1945년의 행정명령(ordonnance)의 의의・위상에 대해서는 田端博邦, 「フランスにおける社会保障制度の成立過程」, 東京大学社会科学研究所 編, 『福祉国家2-福祉国家の展開[1]』(東大出版会, 1985年), 125頁 이하를 참조. [본문으로]
  40. 노동조합은 사회적 보호의 각종 조직에 있어서 동수(同數)의 대표로 구성된 관리를 해왔지만, 이로부터 생기는 기득권의 기반을 조세 대체화의 움직임은 무너뜨리게 된다. 로장발롱은 이것 이후, 조세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하는 의회의 역할이 중심적인 것이 된다고 한다. “사회보장은 더 이상 ‘노사의 대표’의 문제가 아니라, 의회에 의해 대표되는 모든 시민의 문제가 될 것이다.” Rosanvallon, La nouvelle question sociale, p.81. [본문으로]
  41. ‘생활소득’ 등, 여러 가지 명칭에서 제창되는 최저소득의 사상에 대해서는 都留・前掲注(42) 196頁 이하가 최근 프랑스에성의 논의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42. Ibid., p.125. 로장발롱에 따르면 소극적 복지국가의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근대화와 사회조직의 재구축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회적인 것의 어느 정도의 내부화를 실현하는 근대적인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19세기에 초래된 해결책은 보험사회의 설립이었지만, 현재 기본으로 해야 할 것은 ‘진입’의 사상이라고 한다. 문제는 보상의 사회로부터 진입의 사회로의 이행의 방법인데, 로장발롱은 이 이행의 철학 원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도 역사적 견지에서 노동에의 권리의 문제를 고찰해야 한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행하고 있다. Ibid.,p.134 et s. [본문으로]
  43. RMI에 대해서는 都留, 前掲注(42) ; 川口美貴, 「フランスにおける最低所得保障と社会的・職業的参入」, 『法政研究』(静岡大学) 2巻1号(1997年) 43頁; 同, 「フランスにおける参入最低所得(revenu minimum d’insertion)制度」, 『海外社会保障情報』 119号(1997年) 38頁 등을 참조. RMI의 제도의 개요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川口美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前掲, 『法政研究掲載論文』, 104頁). RMI는 … ‘연령, 육체적 또는 정신적 상태, 혹은 경제적 내지 고용상황에 의해 노동할 수 없는 모든 자’의 ‘공적 단체로부터 생존을 위해 적절한 수단을 얻는 권리’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일정한 수준 이하의 소득밖에 없는 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일반적 최저소득보장을 행함과 더불어, ‘곤란한 상황에 있는 자의 사회적・직업적 진입’을 실현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 이 때문에 RMI의 제도는 소정의 요건을 충족하는 자의, 최저소득을 보장하는 국고부담의 무갹출제 급부인 RMI 수당의 수급권과, 진입계약을 매개로 하는 수당 향유자와 공적 단체의 계약 이행 의무, 구체적으로는 향유자의 사회적・직업적 진입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서 향유자와 담당기관 사이의 합의된 내용의 활동들을 이행하는 의무와, 공적 단체가 필요한 수단,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무라는 두 가지 권리와 두 가지 의무를 그 중심적 요건으로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RMI 수당의 향유자의 기타 사회적 보장급부에의 권리를 부수하고, 또한 RMI 수당 향유자를 필두로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직업적 진입정책, 즉 사회복지 및 고용보장・직업적 자립 원조 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44. “workfare는 work와 welfare로 만들어진 조어이며, 레이건 정권 하에서 ‘복지에서 취업노동으로’의 방침을 상징하는 캠페인으로서 사용됐다.” 後藤玲子, 「公的扶助」, 藤田伍一 = 塩野谷祐一 編, 『先進諸国の社会保障7-アメリカ』(東大出版会, 2000年), 165頁. 로장발롱은 의존의 문화를 파괴하는 것에 대한 합의의 고조가, 클린턴 정권의 복지개혁(복지수급 기간을 한정하고 취로 요건을 강화하는 것)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수반된 곤란한 문제는 확실히 극복됐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미국은 클린턴 정권의 방침 결정에 의해 저항하기 힘든 어떤 일이 일어난, ‘복지국가는 미국에서 그 변화를 개시했다’고 말한다. Ibid., p.170 et s. [본문으로]
  45. 또한 로장발롱은 적극적 의무의 전제로서, 의무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고용의 확보의 문제에 대해 논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에 따르면, 소극적 복지국가에 있어서의 경제와 사회의 단절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노동에 있어서의 불평등의 저감에 노력하는 것과 보상자인 복지국가를 성장시키는 것에 대한 동시적인 재정지출이라는 방법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이나 미국 사회가 목표로 하듯이, 사회를 시장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방법은, 저임금의 고용을 증대시킴으로써 실업률을 억눌렀다고 해도, 임금격차의 확대에 의한 빈곤의 증가라는 폐해를 초래하게 된다. 거기서 “중간적인 경제공간”(espace economique intemédiaire)의 창출이라는 선택지가 나타난다. 이미 각종 경제적 진입정책에 있어서 그 추구가 시도되고 있다고 여겨지고, “연대고용계약”(contrat emploi solidarité)의 제도가 예로 언급된다. 그러나 로장발롱은 본서의 목적이 아니라며 중간적인 경제공간의 창출에 관한 본격적인 검토는 행하지 않고, 경제효율을 저하시키지 않고 실업자를 사회에 통합하는 것으로서 법정 최저임금제도를 활용하는 등, 몇 가지 시사를 주는 것에 머물고 있다. cf. Ibid.. p.188 et s. [본문으로]
  46. Iearnfare의 프로그램은 취학달성에 수당의 증액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예를 들어 1988년 이래, 위스콘신 주에서는, 아이들이 취학하지 않은 경우, 수당이 감액된다. 또한 오하이오 주에서는 1989년부터 취학을 계속하는 부양아동을 가진 부모에게 할증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wedfare의 프로그램은 부모에게 아이의 수에 책임을 갖도록 촉진시키고, 또는 안정된 가정의 핵을 재구성하도록 촉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스콘신 주 및 뉴저지 주에서는 보충적 수당들은 부모가 혼인하고 있는 경우에 지급된다. 거꾸로 부모가 새롭게 아이를 얻은 경우에는 해당 수당들은 동결된다. Ibid., p.212. [본문으로]
  47. 에이미 거트먼은 숙의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공정한 워크페어”(fair workfare)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한다. “공정한 워크페어는 개인 책임을 복지 개혁에 있어서의 요구로서 진지하게 고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율 또는 자급 자족의 가치보다도 오히려 상호성에 의해 합의되는 상호의존의 가치에 기초되어 있다. 복지의 의무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즉, 소득 원조를 필요로 하는 시민은 노동하도록 의무화된다. 그러나 그들의 동료 시민이 충분한 고용과 자녀에 대한 원조를 제공하는 공적 정책을 (법률로) 정할 의무를 충족시키는 경우에만, 그 의무를 짊어진다.” Gutmann, A. & Thompson, D., Democracy and Disagreement,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p.276. [본문으로]
  48. 로장발롱은 기회의 평등을 “대등한 취급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 점은 드워킨의 “배려와 존중에 대한 평등한 권리”의 관념에 유사한 것일까? 다음을 참조. 吉崎祥司, 『リベラリズム』(青木書店, 1998年), 31-32頁. 또한 사회권 보장에서의 평등의 형태들의 내적 연관을 규명해야 한다는 鳥居喜代和의 “기회의 평등의 실질적 보장”이라는 관념의 제시가 참조가 된다. 鳥居, 前掲注(2), 112頁. [본문으로]
  49. 빈민의 도덕화의 실현을 원동력으로 하는 기존의 온정주의[후견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온정주의[후견주의]”가 복지국가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Rosanvallon. La nouvelle question sociale, p.213)은 로장발롱이 말한 그대로라고 해도, “개인의 자율”의 존중이라는 관점에서의 검토는 과제로서 남겨진 채이다. [본문으로]

역사인식이론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흔적 
: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론』에서 운명과 해방 

歴史認識理論における精神分析の痕跡

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の『パサージュ論』における運命と解放

프랑수아즈 나이슈타트(Francisco Naishtat)

Francisco NAISHTAT, « Les traces de la psychanalyse dans la théorie de la connaissance historique : Destin et délivrance dans les Passages benjaminiens (Passagen-Werk)», Philosophie et Éducation, UTCP Booklet 1, UTCP, 2008.


Ⅰ. 서론 

 20세기를 통해, 역사기술은 인문과학의 형태와 그 변형과도 관련된 철학적 충격이나 인식론적 충격을 받아왔다. 역사이론의 변용에 수반된 다른 인문과학은 인식론적으로 새롭게 방향이 지어지고, 현대철학은 전회해 왔는데, 본론에서는 이런 변용의 전부를 열거할 수는 없다. 현대의 역사기술에서의 결정적인 변화를 세 가지만 지적한다. 

 (1) 해석학적인 전환 : 역사가의 이해와 해석을 역사인식의 구조에 있어서의 능동적인 결과로 간주하는 것. 

 (2) 사회학적인 전환 : 사회나 역사의 장기적인 구조에 입각해 역사기술의 차원을 재설정하는 것. 이 경우, 개별 사건에 대한 접근법으로부터 구성된 역사기술은 배격된다. 

 (3) 언어학적인 전환 : 역사의 에크리튀르(역사 이야기), 더욱이 역사기술의 텍스트의 에크리튀르에 대한 인식론적 관점을 수정하는 것. 역사기술의 분야에 텍스트 이론이나 언어이론을 둘러싼 논의를 도입하는 것. 

 이런 역사기술의 변용(우리는 20세기의 철학의 변용과 결부시켜, 이것을 굳이 '전회'라고 표현했다)에 있어서, 정신분석은 얼핏 보면, 별다른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정신분석의 작업에 있어서는, 피분석자의 기억이나 억압된 과거를 현재시와의 동적인 관계에 있어서 파악하기 때문에, 시간 형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역사학 갗은 학문 분야에서 정신분석이 인식론적 충격도 '전회'도 초래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시 기묘한 것 아닐까? 역사학의 사명은 바로 "현재시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반론은 다음 세 가지 유보를 포함할 것이다. 

 (a) 최근의 역사기술은 분명히 정신분석의 충격을 받고 있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의 트라우마를 짊어진 희생자의 역사적 기억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제수용소, 전쟁, 학살, 민족간 폭력 등의 역사적 재앙의 기억이다. 그런데 트라우마의 물음은 분명히 담론이나 이야기의 단절에 관계한다. 즉, 통상적인 사건의 증언과는 달리, 희생자가 사건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파울 첼란이 "아무도 증인을 대신해 증언하지 않는다"(Niemand zeugt für den zeugen)[각주:1]는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만 한다. 이 점에서 정신분석은 역사기술에 선행한다. 유아기나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은 누락 부분이나 트라우마의 어떤 기억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 앞에서 이야기가 단편화될 때, 담론의 한계가 드러날 때, 정신분석은 역사가에게 어떤 모델을 제공할 것이다. 즉, 그것은 이야기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뭔가를 지시하고, 상징하고 암시한다는 모델이다.[각주:2] 

 (b) 정신분석에 대한 역사기술의 유보는 후자의 편만이 아니라 전자로부터도 생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집단적인 정신분석을 어떤 형식(문화, 사회, 역사)에 있어서도 금지했다. 초자아의 차원에서, 의식은 자기 동일성이나 승화 같은 문화적 모델을 포함시킬지도 모르지만, 무의식 쪽은 각 주체의 개별적인 역사와 밀접하게 결부되며, 항상 개인적인 채로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에게서는 집단적인 정신분석은 인정되지 않으며, 르 봉의 군중심리학에서의 집단심리도, 헤겔의 역사적 관념론에서의 민족정신도 상정되지 않는다.[각주:3] 무의식에서의 집단적 내지 개인적 지위status의 물음은, 프로이트(및 라캉)이 보기에, 이른바 정당한 정신분석과 미숙하고 잘못된 분석이론을 식별하는 시금석이다. 그래서 개인의 주체성의 차원에 한정된다면, 역사기술은 정신분석을 간접적이고 완곡하게 사용하게 된다. 대체로 역사 해석은 개인적 차원에 한정된 정신분석의 가능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개인들의 심리 ― 프로이트나 라캉에게서의 주요한 쟁점 ― 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c) 이런 설명은 더 나아가, 제3의 유보와 깊이 관련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이론과 역사기술의 실천에 있어서 정신분석과 독자적인 관계를 발전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역사기술의 작업과 이른바 정치, 과거와 역사가의 현재 사이에서 중요한 접점 ― 역사가가 공식적으로는 부정해왔던 접점 ― 을 설치함으로써 실증주의와 역사주의라는 두 개의 극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과거와 정신분석의 관계에 관해서는 벤야민의 역사기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적어도 꼽을 수 있다. 

① 벤야민은 성별(聖別)된 과거와 억압된 과거의 이분법을 시간성의 이론에서 끌어내고, 과거는 두 번 지나간다는 형태로 제시한다. 과거는 첫 번째에는 성취된 과거로서, 두 번째에는 현재시에 대한 새로운 기회chance를 포함한 아직 성취되지 못한 과거로서 지나가는 것이다.[각주:4] 실제로,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추도적追悼的 상기의 작업에 의해 과거는 현재시의 중핵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가 신화로서 경험되고, 각자에게 이른바 숙명으로서 부과될 때, 그런 숙명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 있어서, 특히 19세기에 관한 그의 말년의 탐구에 있어서, 역사가의 작업은 과거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실증주의)도, 지나가버린 시대가 우리의 반성적 의식에 대해 보유하는 의식을 과거의 한복판으로부터 사후적으로 폭로하는[파헤치는] 것(역사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실들의] 응축이나 변증법적 이미지의 기법이나 몽타주에 의해, 시간의 연속된 흐름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의 족쇄를 현재시에 있어서 파탄나게 하는 섬광으로서 과거를 발생시키고, 현재시의 중핵에서 특이한 기회chance를 개시하는 것이다.[각주:5] 

② 벤야민은 꿈과 각성의 대립을 정신분석으로부터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섭취한다[받아들인다]. 이 대립에 의해 우리는 모종의 도식을 손에 넣고, 그의 역사인식의 이론에 손을 댈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과거는 역사가에 의해 고정화되고 영원화되지 않고, 반대로 시간의 연속성을 파탄시킬 수 있도록 재활성화되는 것이다.[각주:6] 여기서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편으로, 벤야민에게서, 우리의 과거 ― 이 경우는 19세기 ― 는 판타스마고리를 포함한다. 판타스마고리가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분석하는 상품 물신주의의 현상과, 공산주의의 선구자나 계급 없는 사회라고 하는 죄 없는 유토피아주의이다. 상품의 물상화의 세계와 그 부정 ―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우정으로 가득 찬 유토피아적 소망 ― 이라는 두 개의 극은 벤야민이 보기에, 같은 시대나 같은 역사적 현상, 즉 자본주의의 판타스마고리적 표현인 것이다.[각주:7] 사회주의적 진보주의는 인류의 역사의 텔로스[목적]를 권위적으로 설정하고, 죄 없는 유토피아를 바라지만, 그것은 결국, 천년낙원을 약속하거나 메시아의 회귀나 시대의 끝[종언]을 한없이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적어도 외관상, 역사유물론은 무적이 된다. 왜냐하면 목적론적 장치는 우리가 진정으로 승부하지 않고, 모든 승부에서 이기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어떤 불행이나 카타스트로프가 생기더라도, 구원은 이윽고 도래한다는 카드[패]가 수중에 있다.[각주:8] 이리하여 상품 물신주의와 공산주의의 약속에 의한 목적론적 유토피아주의라는 두 개의 극은 동일한 판타스마고리로 집약되며, 그것은 역사를 사는 자에게 피험자의 꿈과 똑같은 의미를 띠게 된다. 즉, 운명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이 속박을 파탄시키려고 하는 바람이다. 둘 다 배우[행위자]는 꿈을 꾸는 방관자이다.[각주:9] 

③ 벤야민에게서 과거의 인식이 우리의 현재의 조건의 마력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반대로, 벤야민은 독특한 몽타주 기법[각주:10]을 갖고서, 과거와 이른바 물신주의의 톱니바퀴가 연관되는 메커니즘을 내다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벤야민은 역사인식이 어떤 충격을, 즉 각성을 일으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때 역사인식은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의 역할을 맡으며, 우리는 어떤 출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운명의 마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체의 역사적 형이상학의 새로운 형태로서 해석하는 것에는 조심해야 한다. 정신분석 후에 '해방된' 주체의 상태가 무엇을 닮고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은 정신분석의 사정거리를 넘어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회귀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하는 각성이 무엇을 닮고 있는지를 언표하는 것은 역사기술의 사정거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각성은 소묘되고, 예상될 수 있는 경험적 사태와 똑같은 차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각성을 인식하기 위한 기준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고, 각성은 바로 탈신비화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적합한 때에 우리는 운명의 마력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운명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또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뒤집고, 역사의 필연이라는 무서운 기계장치를 멈출 수 있도 있을 것이다.[각주:11] 그러나 이런 역사인식은 독일관념론 및 역사주의에 의해 해명된 의식과 동등한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이성적이고 몽매한 의식의 안티테제로서, 꿈을 파탄나게 할 수 있는 현명하고 이성적인 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아주 기묘한 의미에서, 데리다가 벤야민에 관한 빼어난 텍스트[각주:12]에서 인정했듯이,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가는 꿈을 주의깊게 지켜봐야 한다〔veiller sur le rêve〕. 즉, 역사가는 꿈을 그 원천으로 소급시켜 감으로써 꿈과 대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이나 동질성을 파괴하는, 꿈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나 다름없다.[각주:13] 꿈의 허를 찌르고, 각성에 의해 기회chance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꿈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정신분석의 작업이 해석의 작업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적 삶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인내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무한하게 설정되는 해방을 목적론적으로 갈망[대망]하는 것과는 다르다. 분석작업이 무한하게 연장되는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분석을 헐뜯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거꾸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분석이 우리의 지성의 마력을 언어에 의해 배신하는 것을 가능케 했듯이, 분석작업에 의해 마력의 단절이 준비되는 것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게임을 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됐다고 해도, 사물이 무엇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각주:14] 이리하여 벤야민이 역사기술의 기회로서 논한 역사적 메시아주의는, 영원히 대망되는 메시아의 목적론적 차원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재시의 각 순간이 갖고 있는 기회이며, 출구의 문이며, 역사의 연속의 단절이다. 이런 단절의 시간성에 있어서 메시아적인 것 ― 벤야민에게서의 진정한 신비 ― 이란 도래하는 것(예를 들어 구원이나 낙원 같은 목적론적 사태)이 아니라, 도래 그 자체이다. 즉, 운명의 뒤통수를 치고, 우리 자신의 과거를 해방하는 시간의 열림, 마치 두 번째로, 다만 기회로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시간의 열림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기술의 작업에 있어서 해석 모델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정신분석을 다뤄왔지만, 그러나 집합적 무의식의 원형 ― 선천적이고 비시간적으로 간주되는 원형 ― 이라는 융의 실체적 해석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은 주체의 철학 및 역사의 목적론의 아포리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역사, 정치, 철학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파사주론』의 역사인식이론이 불러일으킨 반론의 몇 가지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15]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의 테제는 『파사주론』과 분리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 몇 가지의 단장에 입각해 논의를 계속하자. 벤야민이 역사이론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몇 가지 범주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더 예증해보자. 


Ⅱ. 역사인식이론과 벤야민의 『파사주론』

 『파사주론』(Pasaggen-Werk)으로 알려진 저작은 벤야민의 기념비적인 텍스트인데, 1940년 9월에 그가 자살했을 때에는 미완성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사후 42년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간행됐다. 1982년 아도르노의 제자 롤프 티데만 등의 손에 의해 편집되고, 주어캄프판의 전집 5권에 수록됐다(프랑스어로는 1989년, 장 라코스트에 의해 번역됐다). 이 책의 제목은 벤야민에 의해 착상된 것이며, 이미 1927년에는 이 기획에 대한 최초의 언급 속에 "파리의 파사주 : 변증법의 요정의 나라"(1928년 1월 30일,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라고 적혀 있다. 파사주의 도시적인 오브제, 19세기 이후 건축된 파리의 갤러리는 벤야민의 텍스트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다(루이 아라공은 이미 이 대상들 ― 특히 오페라 자리의 파사주에 시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파리의 도시와 19세기가 이 미완의 책에 통일을 가져다주는 중심적 쟁점이라고 하더라도, 『파사주론』은 단순한 역사론도, 도시론이나 문화해석론도 아니고, 오히려 원칙적으로 역사의 정치철학의 책이다. 「파리 : 19세기의 수도」의 처음 노트를 읽었을 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기대한 것은 이것이었다. 

 『파사주론』은 미학, 도시론, 사회학, 역사학 등 이른바 이종혼합적인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그런 특징을 넘어서, 이 책이 전개하는 것은 분석철학의 조류에서 유행하고 있듯이, 역사의 의미를, 더 간결하게 말하면 역사인식의 틀을 철학적으로 파악한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철학적 인식과 현재의 철학적 존재론 사이의 정치적 관계, 즉 역사의 정치에 관련된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관계는 독립적 형태로 방법론으로서 미리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책의 내용 그 자체이며, 그 전체에 새겨져 있다. 즉 이것은 무엇인가를 언표하고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몽타주 장치를 통해 역사인식의 정치적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책인 것이다. 의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다양한 단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단순하게는 말할 수 없는 의미를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관건[내깃돈]으로 삼고 있다. 벤야민의 철학적 인식이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파사주론』은 미학, 역사기술, 사회, 정치 등 여러 차원의 역사인식을 통합하는 중심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을 통해서 그는 '역사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얘기하고 있다. 역사 개념에 대한 벤야민의 유명한 테제는 아도르노의 배려에 의해 이미 50년대에 출판됐지만, 이 테제는 『파사주론』과 독립된 형태로 읽혀져서는 안 되었다. 공교롭게도 따로따로 수용됐기 때문에, 벤야민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역사철학을 전개시키려고 했다고 간주되고, 19세기에 관련된 매우 특이한 조사는 떼어내져 버렸다.[각주:16]

  그의 인식이론에서는 페티시즘, 판타스마고리아, 무의식, 꿈, 몽상, 잠, 각성[잠에서 깸], 눈을 뜸, 기억, 신화적 이미지, 변증법적 이미지, 상기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영향의 혼합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만, 그 주된 것은 마르크스, 루카치, 프로이트, 프루스트, 초현실주의이다.  다만, 이미 첫머리에서 설명했는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파사주론』과 프로이트의 저작의 관계이다. 실제로 벤야민은 꿈, 모앙, 판타스마고리아 같은 정신분석의 개념을 자신의 분석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다만 그는 꿈이나 판타스마고리아를 개인적 심리상태의 차원이 아니라, 파리의 파사주나 만국박람회처럼, 집단이 물질이나 도시를 통해 구현되는 차원에서 이해한다. 또한 오스만, 블랑키, 푸리에, 보들레르 등과 같은 상징적인 역사적 인물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즉, 벤야민은 프로이트처럼, 개인의 심리의 현상에서 출발해서, 정신분석적 해석에 입각해 숨어 있는 논리적 구조를 해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구체적인 역사적 물질에서 출발해, 정신분석적 수법(꿈해석)에서 착상을 얻은 해석을 시행하는 것이다. 파사주나 만국박람회는 물질적 현실인 동시에 판타스마고리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로 자본주의의 상품 페티시즘의 욕망을 나타내며, 계급투쟁이 없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유토피아적 소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판타스마고리아의 현상은 맑스에 있어서는 경제이론에 한정되고, 아도르노나 루카치에 있어서는 맑스가 확립한 페티시즘 현상의 틀 안에서 설명되었다. 하지만 벤야민에 있어서 판타스마고리아 현상은 더 나아가 역사구조의 중핵에 위치지어진다. 즉, 판타스마고리아는 자본주의와 그 물질화라는 형태로 19세기 파리의 생활양식의 모든 수준에 침투해 있는 것이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소외적이고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현상을 모순된 변증법으로서 표현하고, 게다가, 이 변증법은 이른바 19세기의 틀을 넘어서, 다음 세기로 연관하는 듯하다. 바로 이것이 『파사주론』의 철학적 힘인데, 꿈 개념은 지나가버린 시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시現在時로 연장된다. 19세기는 다음의 시대를 규정하고 조건짓는다. 즉, 벤야민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사회적 현실이며, 어떤 시대의 잠 ― 그 꿈이 더 나아가 우리 시대를 조건짓는다 ― 인 것이다. 즉, 벤야민은 추모적 상기의 작업의 계기를 이루는 "[잠, 꿈에서] 눈을 뜸=각성"과 꿈 개념을 관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개인의 심리에 있어서의 정신분석의 상기와 유사한, 꿈의 작업의 도달점을 이루고, 몽상의 출구나 해방의 조건을 이루는 "각성"과 꿈 개념을 관계시키는 것이다. 이리하여 『파사주론』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흔적은 해석상의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즉, 벤야민은 집단 수준에서 정신분석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는 35년의 편지에서 그것은 융 심리학의 아류라고 지적하고, 벤야민은 융과 선을 긋는다고 자기 변호했다.[각주:17] 벤야민의 말투는 그렇다고 치고, '각성' 개념 ― 꿈이나 판타스마고리 개념을 보완하는 개념 ー 의 사용에서부터, 그는 결국, 프로이트에 가깝다고 가정할 수 있다. 즉, 프로이트의 임상실천에 의한 마력에서의 해방의 구조 속에는, 벤야민의 각성 개념과 유사한 것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벤야민이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 개념을 사용하면 몇 가지 문제나 아포리아가 반드시 생겨난다. 다음 장에서는 이를 살펴보자. 


Ⅲ. 『파사주론』에서의 벤야민의 아포리아 

 꿈과 깨어남의 물음은 『파사주론』 전체를 통해서, 벤야민 식의 역사기술의 방법과 결부된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 망라적인 분석을 행할 여유는 없으나, 역사기술과 꿈이나 깨어남의 관계에 관해서, 『파사주론』의 K 분류에 수록된 몇 가지 단장断章을 인용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그것과 함께 꿈에 가득 찬 새로운 잠이 유럽을 휩쓴 하나의 자연현상이며, 그 잠 속에서 신화적 힘들의 재활성화를 동반하는[따르는] 것이었다.[각주:18][K1a,8]

19세기는 개인적 의식이 반성적 태도를 취하면서, 그런 것으로서 점점 더 유지되는 반면, 집단적 의식은 점점 더 깊은 잠에 떨어지는 시대〔Zeitraum〕(혹은 시대가 꾸는 꿈〔Zeit-traum〕)이다.[각주:19][K1,4]

기디온의 명제로부터 더 전진하기 위한 시도. '19세기에 건축 구조는 하위의식의 역하을 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건축 구조는 흡사 꿈이 생리적 과정이라는 발판에 들러붙어서 태어나듯이, 그 주위에 이윽고 '예술적인' 건축이 들러붙는 신체적 과정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바꿔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각주:20][K1a, 7]

여기에서는 꿈의 현상은 단지 개인의 심리현상이 아니라, 집단 수준에서 분석된다는 사고방식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다른 대목에서는 판타스마고리와 묶이고 있다. 

졸저의 조사는 문명의 이 물체화적 표상에 의해, 우리가 지난 세기부터 물려받은 새로운 생활의 형태들이나 경제적 기술적 기반에 선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하나의 판타스마고리에 돌입하는지를 나타내고 싶다.[각주:21]

 분명히 벤야민은 판타슴, 꿈, 몽상 같은 정신분석 또는 심리학의 범주를 사회・경제적인 차원으로 이행시키고 있다. 물론 이런 개념의 이행 속에서,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전개한 상품 페티시즘 개념의 흔적을 인식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극히 환상적인 성질을 이미 기술하고 있다. 상품과 주체의 관계는 페티시즘이라는 표현으로 규정되며, 이것은 "사태들의 관계의 판타스마고리 형식"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바에서는, 상품의 사용가치 자체는 전혀 신비가 아니더라도, 거기에는 '신비적인 가치'나 '혼' 같은 것이 부가되어 있다. 루카치도 또한, 『역사와 계급의식』의 「물상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이라는 장에서 물상화 현상에 있어서의 '환상적 객관성', 주체의 행동에 대한 그 영향을 강조했다. 상품은 그 외관에 의해, 욕망을 깨어나게 하며, 상기를 약속하는 그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힘을 성취시킨다. 욕망되는 대상이 끊임없이 연기되며, 유동적이고 표층적인 채로 머물기에, 욕구는 덧없는 현실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계열성, 나아가 로크의 "불안〔uneasiness〕", 헤겔의 악무한 같은 유명한 개념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플라톤이 감각적인 것이나 현상의 왕국에 입각해 덧없음을 기술한 것도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상품의 소유는 항상 사라질 운명에 있지만, 그러나 항상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상품은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그림자처럼 상징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지각을 구성하고, 객관성의 기준을 산출한다. 우리의 신체는 꿈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되며, 욕망이 무제한으로 투영되는 장이 된다. 이런 욕망의 지연에 출구는 없으며, 외관상 이를 정복할 수도 없다. 그것은 악몽의 특징을 띠며, 다나이데스[다나오스의 딸들]나 시지포스의 신화처럼, 마술적 내지 신화적인 관계의 불명료한 가혹함을 연상시킨다.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인간의 끝없는, 불가능한 노력의 허무함이 암시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악몽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이 항상 사라지고 만다, 그때마다 손 안에서 무로 돌아가버린다고 하는 악몽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페티시즘 이론에 남다른 특징을 덧붙인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어떤 시대 전체의 생활양식에 있어서 일반화된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품은 어떤 시대의 꿈이나 집단적 무의식에 바로 유혹을 거는 것이다. 장-미셸 팔미에는 벤야민의 사후 출판에 관한 연구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관계를 둘러싼 분석을 순수하게 경제학적인 것에 머물게 했으나, 벤야민은 페티시즘적 대상과 산보하는 관찰자의 복잡한 관계를 둘러싼 진정한 현상학을 묘사해냈다. 후자에게 상품은 사회 전체의 상징이나 소우주를 이루는 것이다."[각주:22] 이것은 『파사주론』의 서두인 「파리 : 19세기의 수도」라는 유명한 도입부분에서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 

개인은 오락산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기분전환에 잠기지만, 그 내부에서, 그는 밀집한 대중의 한 구성요소이길 계속한다. 이런 종류의 대중은 유원지의 제트코스터나 '회전장치'나 '애벌레'에 올라타,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즐기고 있는데, 그것에 의해, 산업적 혹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기대할 수 있는 전적으로 반동적인 복종에의 훈련을 받는 것이다― 상품의 지고권의 확인과 상품을 에워싼 다양한 기분 전환용 빛, 이것은 그랑빌의 예술의 숨겨진 주제이다. 그의 유토피아적 요소와 시니컬한 요소 사이의 불균형은 여기에서 생긴다. 생명 없는 물체의 묘사에 있어서의 그의 교묘한 기교는, 마르크스가 상품의 '신학적 변덕'이라고 부른 것에 대응한다.[각주:23]

 『파사주론』에서는 상품의 페티시즘적 성격을 꿈의 집단(Traumkollektiv)의 관념과 결부시킨다. 이런 연관은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구조가 아니라, 거꾸로, 19세기를 둘러싸고, 잠과 깨어남의 대칭 개념에 의해 정치의 기능을 상기의 역사서술의 내깃돈으로 하는 작업의 중핵을 차지한다. 물론 어떤 역사적 시대의 물질이나 도시의 현상에 있어서 꿈과 환상의 특징을 파악한 것은 벤야민뿐이 아니며, 그가 처음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1983년에 레모 보데이[각주:24]는 벤야민의 『파사주론』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분석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의 '물질적 의미론'을 논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루이 아라공의 『파리의 농민』 ― 벤야민이 찬양한 작품 ― 도 다시 주목해야 할 텍스트이다. 특히 오페라좌의 파사주」라는 제목의 텍스트에서, 아라공은 부동산 투기에 의해 소멸하고 있던 19세기의 파사주의 분석에 전념하고, 자본주의의 판타슴적 구조에 의해 산출된 그 시대착오적 모양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벤야민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정치적인 의미 ― 현재시에의 결정적인 방향 설정 ― 를 부여받고 응축되어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런 현재시에의 방향 설정은 잠에서 깨어남[각성]의 관념과 떼어낼 수 없다(벤야민에게 있어서 잠에서 깨어남[각성]은 꿈의 집단의 범주에 부수한다). 『파사주론』의 몇 가지 단편을 더 인용하자. 

19세기의 집단적 꿈의 현상형식은 무시할 수는 없으며, 또한 그런 현상인식은 과거의 그 어떤 세기를 특징짓는 것보다도 훨씬 결정적으로 19세기를 특징짓고 있다. ―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으며, 그런 현상형식들은, 올바르게 해석된다면, 매우 실천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항해하려고 하는 바다와, 우리가 떠나간 해변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하면, 19세기의 '비판'은 이 현상형식에서 시작해야 한다.[각주:25][K1a, 6]

〔…〕 내가 아래에서 제시하려는 것은 깨어남의 기법에 대한 시론이다. 즉, 추모적인 상기의 변증법적 전환 혹은 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인식하려고 하는 시도이다.[각주:26][K1, 1]

역사를 보는 데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이런 것이다. 즉, 지금까지 "일찍이 있었던 것"은 고정점으로 간주되고, 현재는, 더듬어가면서 인식을 이 고정점을 이끌려고 노력한다고 겨져졌지만, 이제 이 관계는 역전되고, 일찍이 있었던 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전환의 장소가 되며, 깨어난 의식이 갑자기 출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는 정치가 역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여러 가지 사실이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것이 되며, 그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상기의 작업이다. 실제로 깨어남은 이런 상기의 모범적인 경우, 즉 우리가 가장 가까운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자명한 것을 상기하는 것에 성공하는 경우이다. 프루스트가 깨어난 상태에서 가구를 실험적으로 재배치한다는 얘기에 의해 말하려고 한 것, 블로흐가 태어난 순간의 어두움이라는 표현으로 간파했던 것이, 여기에서, 역사적인 것의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확정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찍이 있었던 것에 대한 아직은 의식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지식의 발굴은 깨어남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각주:27][K1, 2]

 이런 세 가지 단편에 의해 역사인식의 조감도의 핵심에 벤야민의 방법을 뒷받침하는 개념들의 경첩이 놓인다. 그것은 곧 꿈의 집단(Traumkollektiv), 19세기의 비판, 깨어남(Erwachen), 추모적 상기(Erinnerung, Eingedenken), 과거(Gewesene), 현재(Gegenwart), 지금(Jetzt),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등의 개념이다. 

 우선 벤야민에 있어서, 꿈의 집단이란 대중심리가 물상화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의 생리학"에 관한 19세기의 실증주의적, 자연주의적인 방법보다도, 오히려 초현실주의적,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가깝다. 마리오 페첼라가 지적하듯이,[각주:28] 벤야민에게서의 집단적 무의식의 관념에 있어서 '변증법이 첫 번째 계기를, 깨어남이 두 번째 계기를 이룬다. 즉, 깨어남이란, 타자성을 띤 꿈으로 우리의 의식을 열고, 이해와 해석을 위한 순간이다." 이리하여 꿈의 집단은 현실 그 자체와 동일한 심리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역사적인 생활양식의 물질적 표현을 해석함으로써 역사가가 벗겨내는 상징적인 형식이나 상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벤야민은 융과는 달리, 이런 상징적인 형식들을 역사적 변화로부터 떼어내지 않고,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그의 모델이 된다. 즉 역사가의 사명은 집단에 관계하면서도, 개인의 분석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사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페첼라가 더 논하듯이, "특정한 문화에 있어서 작용하는 신화적 요소란 변증법적 사고가 독해해야 하는 꿈의 상징이다. 이런 비평 활동의 절박을, 자아와 무의식 사이의 통합의 결여로부터 신경증이 생길 경우에서의 개인의 분석의 절박과 비교할 수 있다. 프로이트 자신, 문명의 집단적 병을 고찰할 필요를 느꼈다. 이러한 요구에 무관심한 논리는, 현대의 대중의 격정 속에서 해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각주:29]

 그런데 벤야민은 "코페르니쿠스적 전개"라는 표현 속에서, 꿈과 깨어남의 관계 ― 이것이 역사기술의 작업에 정치적 차원을 부여한다 ― 를 둘러싼 모든 의미를 응축시킨다. 역사기술에 있어서 <일찍이 있었던 것(Gewesene)>은 역사가가 접근하고 관계해야 하는 고정점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있어서는, <일찍이 있었던 것>은 해석의 변증법에 의한 추모적 상기(Eingedenken)의 작동을 통해 위치를 바꾸고, 섬광처럼 현재시에 충격을 주고, 순간이나 지금(Jetzt)을 비연속적인 것으로 한다. 이리하여 『파사주론』의 작업은 비의지적 기억이나 연상의 작동을 결합한 프루스트적 상기를 연상시킨다. 억압되어 잠든 과거의 의식의 흐름을 그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일종의 유물론적 기호론은 깨어남을 초래하고, 시대의 물상화나 다음 시대로 계승되는 그 정치적 공허함의 허를 찌른다. 

 이렇게 논한 단계에서, 벤야민의 역사기술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이나 아포리아가 생긴다. 우선 첫째로, 몇몇 비평가가 시사하듯이,[각주:30] 벤야민은 각성 개념을 통해서, 역사의 주체라는 역사적 범주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깨어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깨어 있어야 하는 걸까? 누구를 통해 예기치 않은 깨어남이 생기는 것일까? 자신의 시대에 명석한 의식을 향하는 벤야민의 역사가를,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올빼미]에 포개보고 싶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벤야민은 몰래 역사주의를 다시 도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자신, 근대성의 마약적인 잠을 초래하는 요인으로서 역사주의를 명백하게 비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에서 부정되었던 진보 관념이 부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본주의의 페티시즘의 형식들 속에서 과거가 마비하고 잠들어 있으며, 그에 반해 현재시가 깨어 있다고 하는 진보적인 구도가 도입되는 게 아닐까? 벤야민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각성한 집단(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의식)이라는 전위적이고 본질적인 관념을, 게다가 각성한 민족이라는 개념(예를 들어 전체주의적 관념)을 재도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굴욕과 자유주의의 해악에 맞서서 "독일이여, 깨어나라"고 호소했다. 결국 벤야민은 빛이나 진리에 접근하는 특권적인 철학자-대화자라는 플라톤적 인물상을 부활시킬 우려가 없을까? 그것은 곧, 동물의 마력으로부터 처음으로 해방되고, 감각적 세계의 현상들 속에서 졸고 있는 집단을 깨우는 인물의 복권이다. 

 이런 의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집약된다. 벤야민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범주들을 채용하여 집단을 독해하면서도 후자가 우려하는 지평에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즉, 천계설이나 엘리트적인 전위주의 ― 이것이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에서의 "위인"의 이론을 가능케 한 것이다 ― 와 접근함으로써, 분석 치료의 전체주의적 관념이 생긴다는 우려이다. 그것은 대중에 선행하는 역사의식이 정념에 사로잡혀서 과거의 낡은 형식을 오로지 파괴하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이런 물음은 이리하여 깨어남의 종말론적・신학적 관념을 경유하여, 주술사나 세기말의 지도자 같은 카리스마적 재능으로 귀착하는 모종의 신학정치와도 닮아 있다. 벤야민의 정치적 사상이 물리칠 권위적인 온정주의와 관계하는 것이다. 


Ⅳ. 정신분석과 각성의 세속적 구조 

 우리는 정신분석의 모델을 바탕으로, 이런 아포리아로부터 『파사주론』을 구출해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는 정치적 역사기술에 입각해 그 의의를 다시 방향지을 수 있다. 깨어남에 대해서는 두 개의 모델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본질화된 집단 개념과 결합된 깨어남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의지적 기억이라는 프루스트적 기법과 결합된 깨어남이 있다. 그것은 꿈의 기억을 둘러싼 정신분석의 작업에 가깝다. 후자의 모델에 따르면, 깨어남은 시대에 앞선 의식의 도입이 아니라, 각자가 어떤 해석 기법에 의해 성취되어야 할 상기의 결과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파사주론』은 식견 있는 집단이 필연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현재의 조건이나 생활양식이 과거에서 유래하는 꿈이나 무의식의 구조에 얽매여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작업의 관점을 연 것이다. 정신분석이 드러내듯이, 각성의 진정한 경험이란 유물론적 역사가가 예기하고 기술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시대가 스스로에 대한 정치적 작업 ― 이것은 데리다의 "꿈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실천(각주 13을 참조)과 불가분하다 ― 으로서 이뤄져야 하는 경험이다. 벤야민에 있어서, 유물론적 역사기술은, 시대에 선행하는 "위인"이나 새로운 역사적 영웅에 대한 주의주의적인 호소로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신비를 드러내는 아이러니라는 더 겸허한 차원에 위치된다. 이제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아이러니에 의해, 우리는 운명의 마력의 허를 찌르고, 과거의 찬스[기회]를 새롭게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찬스는 집단이나 선택된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다. 즉, 메시아주의는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열림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다(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밝음〔Lichtung〕'[각주:31]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다시금 인용하면, "아무도 증인 대신 증언하지 않는다"(주1을 참조)는 것이며, 바로 각자가 유물론적 몽타주에 의해, 역사기술의 흐름을 뛰어넘어, 역사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우월 ― 벤야민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중핵을 이루는 생각 ― 을 개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벤야민의 단장을 두 개 인용한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하면, 19세기의 '비판'은 이 현상형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즉, 착수되어야 할 것은 19세기의 기계론이나 동물기계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19세기의 마취적인 역사주의나 그 가장벽(仮装癖)에 대한 비판이다. 누가 뭐래도, 그런 가장벽(仮装癖) 안에야말로, 진정한 역사적 존재의 신호가 숨어 있다. 이 신호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이 신호를 해독하는 것, 이것이 당분간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혁명적・유물론적인 기초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여기서 화제가 되고 있는 진정한 역사적 존재의 신호에 있어서 19세기의 자신의 경제적 기초를 최고도로 표현한다는 것의 충분한 보증이 될 것이다.[각주:32][K1a, 6]

모든 역사적 사건은, 메시아 자신이 도래해야 처음으로 완성된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 의미하는 바는, 역사적 사건과 메시아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메시아 자신이 처음으로 구제하고 완성하고 창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인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자신만의 힘으로, 자신을 메시아적인 것으로 관계시키려고 바랄 수 없다. 따라서 신의 나라는, 역사라는 가능태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신의 나라가 목표로서 설정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의 나라는 목표가 아니라 종언이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신의 나라라는 생각 아래에서 수립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신정정치에는 정치적인 의미는 없으며, 오로지 종교적인 의미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정정치가 가진 정치적 의미를 철저하게 부인한 공적에 있어서는, E.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각주:33]


 깨어남의 기법이 가져올 비판적 차원은, 벤야민의 역사적 메시아주의를 매우 특수한 것으로 한다. 즉 메시아주의가 정치적인 것의 신학화가 아니라, 역사를 정치화하는 충돌로서 이해된다. 이 충돌에 의해 시간은 내재적인 진보의 타성에서, 신의 초월성에 의한 신학적 기회주의에서 벗어난다. 



  1. P. Celan, Aschenglorie, in Strette, Mercure de France, 1971, tr. A. Bouchet, pp. 48–51, repris de J. Derrida, Fichus, Paris, Galilée, 2002, p. 51.〔『フィッシュ』逸見龍生訳、白水社、二〇〇三年、六六頁〕 [본문으로]
  2. P. Ricoeur, La mémoire, l’histoire, l’oubli, Paris, Seuil, 2000.〔『記憶・歴史・忘却』久米博訳、新曜社、二〇〇四―〇五年〕. 트라우마와 역사적 이야기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María Inés Mudrovcik, Historia, narración y memoria(Buenos Aires, Paidós, 2007)를 참조. [본문으로]
  3. S. Freud, Psychologie des masses et analyse du moi (Massenpsychologie und Ich analyse, 1921), OEuvres Complètes, vol. XVI, Paris, PUF, 2003〔「集団心理学と自我分析」、『フロイト全集17』須藤訓任他訳、岩波書店、二〇〇六年〕; G. Le Bon, Psychologie des foules, Paris, PUF, 1991.〔『群衆心理』櫻井成夫訳、講談社学術文庫、一九九三年〕 [본문으로]
  4. 이 표현은 프랑수아즈 프루스트의 것이다. "시간은 <두 번> 지나간다. 시간은 한 번은 죽은 이미지, 공허한 시간, 과거의 추억이 된다. ... 하지만 동시에, 시간은 지나감으로써 다른 장소에 새겨진다. ... 이것이 두 번째 시간, 두 번째 과거, 즉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첫 번째 시간의 그림자이다. 우리는 보는 자가 이 그림자를 부각시키고, 재독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Françoise Proust, L’histoire à contretemps. Le temps historique chez Walter Benjamin, Paris, Cerf, 1994, p. 104. [본문으로]
  5. 역사실증주의나 역사주의와 벤야민의 대립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日本語訳は『ベンヤミン・コレクションⅠ』ちくま学芸文庫、一九九五年などに所収〕에서 명백하다. 특히 테제 Ⅵ, ⅩⅥ, ⅩⅦ를 참조. [본문으로]
  6. 「역사의 개념에 대해」의 테제 ⅩⅣ 등을 참조. [본문으로]
  7. 장-미셸 팔미에는 벤야민의 사후 출판에 관한 최근 논고에서 판타스마고리의 내적 변증법을 해명하고 있다. 이 변증법은 상품 물신주의와 황금시대의 유토피아를 함의한다. 이런 이중성은 물신주의 현상에 대한 순수하게 맑스적, 혹은 아도르노적 사고방식과는 선을 긋는다. 왜냐하면 후자는 물신화된 상품에 있어서의 의식의 소외밖에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cf. J.-M. Palmier, Walter Benjamin. Le chifonnier, l’Ange et le Petit Bossu, Paris, Klincksieck, 2006, p. 447f. [본문으로]
  8. 「역사의 개념에 대해」의 테제 Ⅰ에 묘사된 유명한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를 참조. 일반적으로 이 테제는 맑스주의의 신학적 요소를 지적한 대목으로 간주됐다. 그렇다고 한다면, 속류 맑스주의와는 다른 맑스주의를 벤야민은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목적론적 신학과, 역사의 연속을 현재시에 있어서 단절시키는 메시아주의가 있다. 자동인형의 알레고리에 있어서, 난쟁이[小人]는 거짓 자동인형이 모든 승부에서 이기도록 했지만, 이것은 이중의 해석을 띤다. 한편으로 그것은 벤야민이 격투한 역사적 기계론의 경향이다. 이 경우, 신학적 요소는 속류 역사주의나 진보주의 같은 목적론적 성격을 두르고, 현재시의 행동을 무디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메시아적 시간이며, 그 기회chance는 그때마다 꽉 쥐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작용하는 것은 모든 점진적인 기대를 경시하는 비속류적 유물론이다. 점진적 혁명에 의한 천년왕국의 테제와 마찬가지로, 속류 맑스주의는 어떤 패배도 피하고, 완전무결하게 되지만, 자동인형장치는 이런 협잡의 메커니즘의 뒤통수를 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는 현대의 사이버네틱스 장치에 의해 반전되는 게 아닐까? 살아 있는 인간의 배후에 지능 로봇이 숨어 있고, 목적론적 신학의 역할을 맡는다고 하는 사태를 상상해보자. 숨겨진 지능 로봇이 인간 대신 게임을 하고, 모든 승부에서 이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이 자신의 게임을 할 여지가 없어진다. ... 역사의 맑스주의 내지 목적론적 신학은 현재시를 무디게 하고, 끝없는 가상성에 우리를 내맡긴다. 이런 가상성은 사실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고, 승부에 한 번도 패하지 않고, 하지만 그 때문에, 역사의 행위자는 자신의 게임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 분명히 벤야민은 역사에 관한 텍스트에서, 이런 자동인형의 반전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사주론』 서두에서는 미슐레의 "어떤 시대에도 그것에 이어진 시대를 꿈꾼다"는 문구가 인용되고 있는데, 그 의미를 깊게 이해하면, 이것은 충분히 시사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자동인형은 현대의 틀림없는 자동인형을 예견한 판타스마고리적인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현대의 자동인형은 인간이나 행동, 정치에 있어서 더욱 가혹하고, 어찌할 수 없이 무적이다. [본문으로]
  9.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꿈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는, 그것과 더불어 꿈에 가득 찬 새로운 잠이 유럽을 습격하는 하나의 자연현상이며, 그 잠 속에서 신화적인 힘들의 재활성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K1a,8]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Le livre des Passages, Paris, Cerf, 2006, p. 408.〔『パサージュ論』今村仁司他訳、岩波現代文庫、二〇〇三年、第三巻、一二頁. 이하 Le livre des Passages는 P-W의 약칭으로 표기한다. 일본어 번역본은 岩波現代文庫版의 권수와 쪽수를 나타낸다.〕 [본문으로]
  10. 벤야민의 텍스트에 있어서의 몽타주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F. Naishtat, « La historiografía antiépica de W. Benjamin. La crítica de la narración en las Tesis « Sobre el concepto de historia » y su relación con los dispositivos heurísticos del Passagen-Werk », Actas del II Congreso Internacional de Filosofía de la Historia, Buenos Aires, 2008. [본문으로]
  11. 흥미롭게도 벤야민에게서 혁명은 목적의 왕국의 도래를 앞당기는, 역사라는 증기기관차에 대한 급속한 접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런 증기기관차의 급브레이크이며, 시간을 중지시키고, 위기의 발생을 먹어치운다. 정의를 위한 혁명의 진정한 개입은 천상의 왕국의 약속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게 아니라, 솔직한 '아니오'의 힘, 즉 거절이나 항의를 내뱉는 폭력을 동반한다. 급브레이크로서의 혁명에 대해서는 W. Benjamin, Paralipomena, Gesammelte Schcriften, 1–3, 1228–1252, Berlin, ed. Rolf Tiedemann, Suhrkamp를 참조. [본문으로]
  12. J . Derrida, Fichus, op. cit., pp. 20–21.〔『フィッシュ』前掲、二三頁〕 [본문으로]
  13. P-W., p. 493 [N10, 3].〔第三巻、二一七頁〕 [본문으로]
  14. 칸트에게서의 이성의 역사를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현대성과,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의 점진적 혁명의 가상성의 대립에 관해서는 다음의 졸고를 참조. F. Naishtat, « Revolution, discontinuity and progress in Kant. Copernican revolution and Asymptotic revolution in critical philosophy », Proceedings of the Xth Kant International Congress, Berlín, Walter de Gruyter, 2008. [본문으로]
  15. 특히Rita Bischof et Elizabeth Lenk, « L’imbrication surréelle du rêve et de l’histoire dans les Passages de Benjamin », in H. Wismann compilateur, Walter Benjamin et Paris, Paris, Cerf, 1986, pp. 179-200. [본문으로]
  16. 이 점에 관해서는 F. Naishtat, « La historiografía antiépica de W. Benjamin. La crítica de la narración en las Tesis « Sobre el concepto de historia » y su relación con los dispositivos heurísticos del Passagen-Werk », op. cit. [본문으로]
  17. 『파사주론』의 K 및 N을 참조. [본문으로]
  18. P-W, p. 408.〔第三巻、一二頁〕 [본문으로]
  19. Ibid., p. 406.〔第三巻、七頁〕 [본문으로]
  20. Ibid., p. 408.〔第三巻、一二頁〕 [본문으로]
  21. P-W,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Exposé de 1939, Introduction, op. cit., p. 47.〔第一巻、三五頁〕 [본문으로]
  22. J.-M Palmier, op. cit. p. 458. [본문으로]
  23. P-W,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Exposé de 1939, section B. « Grandville ou les expositions universelles », op. cit. p. 51.〔第一巻、四四頁〕 [본문으로]
  24. Cf. Remo Bodei, « L’expérience et les formes. Le Paris de Walter Benjamin et de Siegfried Kracauer », in H Wisman, op. cit. pp. 33–48. [본문으로]
  25. P-W, p. 408.〔第三巻、一一頁〕 [본문으로]
  26. Ibid., p.405.〔第三巻、五頁〕 [본문으로]
  27. Ibid., pp. 405-406.〔第三巻、六頁〕 [본문으로]
  28. Mario Pezzella, « Image mythique et image dialectique. Remarques sur le Passagen-Werk », H. Wisman, op. cit., pp. 517–428. [본문으로]
  29. Ibid. [본문으로]
  30. Cf. notamment Rita Bischof et Elisabeth Lenk, op. cit. [본문으로]
  31. Martin Heidegger, « La fin de la Philosophie et le tournant », in Questions IV, Paris, Gallimard, 2005, p. 295. [본문으로]
  32. P-W., p. 408.〔第三巻、11-12頁〕 [본문으로]
  33. Theologisch-politisches Fragment, GS II, 1, 203, en W. Benjmin, La dialéctica en suspenso, Santiago de Chile, Arcis, 1995, pp. 181–183.〔「神学的・政治的断章」、『来たるべき哲学のプログラム』道籏泰三訳、晶文社、一九九二年、三六〇頁〕 [본문으로]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자폐증인가도착인가

치바 지금의 얘기와 연결될지는 모르겠지만마츠모토 씨는 이번 책에서는 도착 개념을 옆으로 치워둔다는 식으로 글을 쓰셨네요.

 

마츠모토 정신병과 신경증의 굳건한 이항대립을 제시하고그것이 후기가 되면 탈구축되어간다는 식으로 정리했습니다여기에 도착 개념을 집어넣으면정리가 좋지 않게 된다는 속내도 있습니다만원래 프로이트의 단계에서 도착 개념은 제대로 된 개념으로 수립되어 있지 않다고 제가 생각한 것도도착을 배제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도착을 규정하는 메커니즘은보통 부인이라고 간주되죠제가 쓴 프로이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적었습니다만사실 부인’ 개념은 정신병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꺼내진 것입니다그리고그 다음으로 페티시즘을 설명할 때 부인이라는 단어가 전용(轉用)됩니다만그것은 어머니의 페니스의 부재에 대한 태도를 논하는 것이지구조로서의 도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게다가 가장 말년에는 부인은 자아분열로서 일반화된다모든 주체의 구조화에 있어서, 어머니의 페니스의 결여를 부인한다는 사태가 일반화되는 것입니다.

    라캉의 도착론은 프로이트의 도착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라캉도 도착을 부인에 의해 생각하는 시기가 있습니다만진정으로 라캉적인 도착 개념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세미나 10권의 불안에서 11권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 이르는 여정에서입니다거기에서는 도착자倒錯者는 자신이 대타자(=대문자의 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라는 것은대타자(A)한테서 비어 있는 구멍을자신이 대상 a가 되어 메워나가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노출증자는타자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신의 페니스를 꺼내고 그것을 메워나간다는 것입니다그것은 물론 부인은 아니지만그러나 원리로서 부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는 표현을 사용해 도착 개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리고 논문 칸트와 사드가 보여주듯이신경증자의 판타슴은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생각됩니다신경증자는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대타자가 향락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을 참을 수 없으니까신경증자는 여러 가지 회피의 술책을 부리는 것인데요도착자는 현실에서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되어버린다그래서 신경증과 도착자는 네거티브라고 하는 것입니다라캉의 이런 도착 개념은 대략 60년대 종반(14권 환상의 논리, 16권 어떤 대타자에서 타자로)까지 유지되지만그 후 라캉의 논의에서는 도착 개념이 놓일 장소가 없어져버립니다.

 

우츠미 대문자 타자가 몰락하기 때문 아닙니까?

 

마츠모토 대문자 타자의 이론적 가치가 내려가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예를 들어 생톰』 세미나에서, “도착(perversion)”을 패러디한 아버지를 향하는 방향(père-version)”에 대해 라캉은 얘기합니다만이 단어는 이 시점에서는 도착의 새로운 개념으로 제출되는 게 아닙니다아버지가 복수로 있는 시대가 됐기에보로메오의 매듭을 매는 방식이나섹슈얼리티나 상징적인 것의 조직화의 방식은 버전 차이의 아버지라는 형태로 복수로 있어도 좋지 않은가라는 논의의 맥락에서 ‘père-version’이라는 말장난을 제출하는 것입니다이렇게 되자 역시 라캉의 논의에서도 도착 개념이 놓일 장소가 없어져 버립니다.

    최근 프랑스에서 논의되고 있는 도착 개념에는 크게 나눠서 두 가지가 있으며, ‘보통 도착과 일반화 도착이라는 개념입니다이것들도 또한 도착 그 자체를 구조로서 주제화하여 논하는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도착을 보통화하거나일반화하는 것입니다각자 각각의 별개의 흩어져 있는 상태인 일자론적 향락, ‘하나뿐인 일자라는 방식인 향락은그 자체가 규범적인 향락의 모습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도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그 논점을강조점을 바꿈으로써 일반화 도착이라는 방식으로 논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치바 그렇다면 일자론헤놀로지[hénologie]를 자폐증적으로 다루는 것을그대로 도착론이라고도 부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츠모토 그렇게 될 것예요.

 

치바 그렇게 되면자폐증이라는 말은 적어도 들뢰즈 안에서는 사용하기 어렵고제 경우는 도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게 된다.

 

마츠모토 프랑스의 라캉파에서도 자폐증아냐 도착이냐라는 선택이 있네요밀러파는 자폐증자에게서 볼 수 있는 일자론적 향락을 최근에는 어딕션 쪽으로 끌어당겨 논합니다만최근 분파한 콜레트 솔레르(Colette Soler)는 일반화 도착이라는 개념을 중시하고 있습니다이론의 중심을 자폐증 또는 어딕션에 둘 것인가도착에 둘 것인가라는 선택이 아마 있을 테죠.

 

우츠미 그것은 자폐증이 되면 타자가 나오지 않게 된다는 거죠.

 

마츠모토 정신분석을 추궁해 들어가면타자 없는 향락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그런 의미에서 자폐적이라는 문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그렇게 되면자폐증은 적어도 중기까지의 라캉 이론에는 설 장소가 없고후기 이론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물을 수 있다는 구도와 유비적으로도착이라는 것의 설 장소 없음도 생각하게 된다면.

 

마츠모토 그렇습니다보충해서 말한다면라캉의 이론에는 사실상 자폐증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라캉은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의 구별이 포퓰러하게 시작되는 81년에 사망했기 때문이죠그러나 라캉이 70년대 후반에 스키조프레니에 관해 행한 발언 속에는분명히 그때까지의 이론을 갱신하는 포텐셜을 갖는 사항이 나오고 있으며그것을 자폐증론으로서 끄집어낸 것이 최근의 라캉파의 논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츠미 과거의 분열병의 정신병리에서도자폐증론이 꽤 섞여 있습니다그곳은 우리가 끄집어내려는 작업을 해야 할 곳이네요.

 

마츠모토 그 작업을 도착 쪽에서 첨예화하려고 하는 것이 코노 카즈노리(河野一紀) 씨입니다토가와 코지(十川幸司) 씨도 최근에 도착에 주목하고 계시죠.

 

‘y’의 현장성

── 3월 21일의 제4회 도쿄정신분석 서클의 콜로케에서는 특이성을 말하는 것이 분석의 종결에 있어서의 모종의 매직워드가 되지 않았거나종결에 있어서 분석가 자신의 변화를 어떻게 초래할 수 있는가 등의 물음이 던져졌던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또한 보통 정신병이나 일반화 도착이라는 개념(이론)의 치료()적인 임플리케이션[implication, 함의]의 유무와 그 질에 대해서도.

 

우츠미 토가와 씨가 임상경험 속에서 미지의 저항과 만나 산출되는 극히 강력한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생톰론 등을 비판했더군요.

 

마츠모토 라캉은 임상으로부터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60년대 후반이 되면 그때까지의 이론을 정리하기 위해서만 이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토가와 씨의 진단입니다그러나 생톰의 논의를 만들 때라캉은 그때까지의 이론의 정리에 머물지 않는꽤 새로운 것을 내놓고 있다그것이 특이성의 주제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치바 토가와 씨의 도래할 정신분석의 프로그램(来るべき精神分析のプログラム), “사람 각각론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이번에마츠모토 씨의 책에도 그것과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도발적으로 여쭙습니다만정신분석 또는 정신과 의료 실천에 있어서특이성과 마주하는 것은 물론이고그 위에서뭔가 일반성 내지 규범의 틀을 끼우는 것의 의의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츠모토 라캉의 임상은 분석가의 강한 자아로의 동일화를 목표로 하는 자아심리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안티(anti)로서 나왔기에틀에 끼우는 방향이 아니라오히려 분석을 해서 자신의 향락에 충실해지고예를 들어 말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지향한다는 측면이 있네요그것은 확실히 사람 각각성의 긍정이라는 것이 되겠지만.

 

치바 : “사람 각각이 되었을 때뭔가 타자와 전혀 공생할 수 없는 폭력적인 것이 발로発露한다는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까그것이 있는 경우, “그런 것을 하지 않도록이라는 규범을 끼워 넣을 필요가 있지 않나요?

 

마츠모토 그것은 잘 하는 것” 속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현재의 정신과 임상에서 주류가 되고 있는 조작적 진단학은 도감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에 맞추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병자로부터 이쪽으로 향하게 해주는 벡터가 없다우리가 뭔가를 읽고임상가로서 촉발되는 것은그 논고가건너편에서 오는 것에 의해 변형된다고 느낄 때입니다오히려 병자에 의해 작성되고 있다고 할까이론이 삐걱거리고 있다고 할까그런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하며, “이것은 좋은 임상론이다라든가, “이것은 다르다라든가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치바 씨가 강렬도의 윤리로서 말한 것 ― 최저의 것을 긍정하는 것과 너무 설명하는 것” ― 은 임상가의 맥심[maxim, 금언]으로서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한 시기의 라캉파는 너무도 설명해버렸습니다마치 라캉을 대신한 듯한 주인의 담론에 의한 주장이라든가주인을 배경에 깐 대학의 담론으로 퇴색해버린 느낌이었습니다거기에 싱귤라리티를 갖고 옴으로써 너무 설명하지 않는’ 게 되어버린 것은 좋은 징후가 아닐까요?

 

마츠모토 세르주 르클레르(Serge Leclaire)가 말했듯이라캉파에서는이론을 점점 새롭게 갱신해가는 모티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실제로 분석할 때에는 이론을 전부 잊어버리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거든요.

    분석의 종결이 자신의 증상과 잘 지내는 것이라는 정식화에 대해서는기존의 노하우를 사용해 타협을 보다(savoir-faire)”와 “요령이 있다, 능란하다[빈틈없이 행동하다](savoir y faire)”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해야 합니다. “그 장소(y)”가 가진 현장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면접 현장의 세팅이나분석 주체의 삶의 방식 속에서그 장소 그 장소에서 어떻게 해가는가?

 

우츠미 그것이 본래의 정신요법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방금 말씀하신 인지 행동 요법 사이의 차이로군요. ‘y’가 하나 들어 있는가 아닌가이지만최근의 치료는 포뮬레숑(formulation) 대로 합니다그야말로 자구성이랄까그리고 그런 흔한 방식이 의외로 나쁘지 않은 곳도 있다(웃음). 다른 한편고전적인 정신요법가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해서모두 비슷한 것을 말하는데요, “오늘 내가 한 말을 잊어주세요라든가도이 타케오(土居健郎) 씨는 사사건건 항상 운수[임기응변]’이라고 말씀하셨고카와이 하야오(河合隼雄) 씨는 제 작업은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전력을 경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기억합니다.

 

마츠모토 라캉은 마지막에 그런 것을 이론화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치바 개별적으로 잘 하고 있다고 할 때뭔가 모종의 공통의 사회통념이나 뭔가가 개입한다고 생각합니다만 ― 그것을 저는 규범이라고 부릅니다 ― 그런 심급과 개개의 향락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마츠모토 그렇군요이념적으로 생각하면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 수 있겠지만분석의 섹션 속에서 행하고 있는 시점에서역시 틀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분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고모종의 행동요법적으로매주 같은 시간에 오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그런 외형적인 것의 효과도 아마 있겠네요.

 

우츠미 상당한 금액을 치르게 되니까요.

 

치바 뼈를 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규범이 작동하기 때문에, “잘 하는 것이 그래서 한정화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그러면모종의 사회론이랄까일반 인간론 같은 것으로서 특이한 생톰이라고 말한 경우개인의 정신분석 상황에서 작동하는 한정에 유비할 수 있는 것을 사회 일반 속에서 어떻게 위치지으면 좋을까이번에는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정기적으로 다니거나돈을 지불함으로써 체념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은일반론으로서 어떤 것인가?

 

우츠미 예를 들어 스키조프레니 임상이라면아까 말했듯이 관계의 싱귤라리티를 만들 수 있는가 여부이것이 치료자의 자질로서 요구됩니다그 안에서는환자 이상으로 치료자 쪽이 상대에게 의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것은 잊혀지고 있는 것 같고의국에서 젊은 무리들한테 정신분열증자와 만나고 있으면 한시름이 덜어지지 않니?라고 물었더니그렇다는 듯한 얼굴을 했습니다스키조프레니의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시간이 흐릅니다그런 싱귤라리티를 만드는 것은 조금 용기가 들지만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래서그 후에 어떻게 하니?”라는 단계에서사회와의 관계가 문제가 될 때뭔가 그들을 배신한다는 기분이 듭니다치바 씨의 말로 얘기한다면, “비의미적 절단에 의해 치료관계를 만들어 왔는데이번에는 의미적 절단을 하라고 말해야 한다사회에 이러저러한 제도가 있는 가운데스스로를 스스로가 지키라고 하게 된다면, 하루 돌봄[데이케어]를 부탁한다거나, SST(Social Skills Traing)를 하게 된다이때 자신도 기회주의적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지조는 없어도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二刀流でやるよりない자신이 담당하는 것은 관계의 싱귤라리티를 만드는 것어떤 안심할 수 있는 토포스를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만그러나 사회 복귀는 사회복귀로 할 수밖에 없다.

 

마츠모토 진찰실을 하나의 피난처로 삼는다고나 할까싱귤라리티를 공유할 수 있는 곳을 만든 뒤이로부터 일단 바깥을 향해 접속하기 위해의미 있는 절단을 하는 것이 필요해진다고.

 

우츠미 산뜻하게 나누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만그런 것이로군요.

 

치바 진료실이나 분석가의 오피스가 그런 형태에서의 아질[Asyl, (극빈자·부랑자 등의보호 시설, (범죄자 등의은신처피난 장소]이며신체를 다시 만들어가는 주형 같은 것으로서 기능한다그 기능은 일부러 다니는 것의 큰 의의이죠만약 그런 곳에 다니지 않고 사회 속의 어딘가에서 그것을 조달할 수 있다면누구든 의사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으니까요.

 

마츠모토 정신과 의사의 진찰실과 정신분석가의 오피스라면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정신과 임상의 경우예를 들어 정신분열증 환자에 대해서는, “선생과 만나니 안심한다” 같은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장을 우선 확보할 수 없으면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다른 한편분석의 장은 결코 그런 의미에서 안심하게 해주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죠.

 

우츠미 스키조프레니의 경우에는 직접 사회와 접속해버립니다예를 들어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알린다든가남에게서 생각이 들어온다든가이것들은 증상에 등록되어 버리지만그러나 사실입니다사실사회란 그런 거예요그것에 대해 우리는 무슨 까닭인지 셔터를 내리는데그들은 내리지 못한다그런 호소는 대체로는 [귀담아들어주지 못하며거칠게 말하면 병이기 때문에 약이” 된다病気だからとなる약은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좋다고 하더라도호소는 전혀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다그만큼 사회로부터의 벡터가 직접 들어오기 때문에관계의 싱귤라리티를 만드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다만거기서 일단 안전보장감을 얻고그 후 사회로 돌아온다고 할 때치료자로서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마츠모토 숨기고 있고그러면 어떻게 바깥으로 꺼낼 것인가라는 데 어려움이 있죠정신분석도캐비닛의 소파에 숨기고분석 주체에게 공상하기 위한 스페이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니까그런 의미에서는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다만 정신과 임상처럼 본인을 전인격적으로 숨기고 있다기보다는본인 속의 공상을 전개하는 스페이스를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죠.

 

***

마츠모토 제 책에서는 라캉 대 들뢰즈-가타리라캉 대 데리다 등 기존의 대립을 재고하고후기 라캉이 가진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에 대한 모종의 가까움을 강조한 것인데요이번의 간담을 통해그 가까움이 보다 명확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그 가까움을 인정한 다음에더 미묘한 차이나 대립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나, ‘y’의 현장성을 더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과제로서 전망됐습니다앞으로 그 작업은 임상과 사상의 양자의 교점에서 이뤄지지 않을까요오늘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우츠미 타케시정신의학/정신병리학)

(치바 마사야철학/표상문화론)

(마츠모토 타쿠야정신병리학)


스 재장전 또는 긍정과 도주

: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성 유물론 소묘

マルクス・リローデッドまたは肯定逃走

ドゥルーズ/ガタリの偶発性唯物論素描

마츠모토 준이치로(松本潤一郎)

情況第三期第四券第十一号, 150-179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서 사고되어야 한다.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10

 

 

모순에 의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서술

역사를 다시[고쳐] 쓰는 <역회전(revolution)> 

혁명적 잠재력이 어떻게 현행화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전의식적 상태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정확한 순간에 실제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절단>이다.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인과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다시 쓰기를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AO, pp.453-4).

* 한국어판 : 혁명적 잠재력의 현행화는 이 잠재력이 물론 포함되어 있는 전의식적 인과성의 상태보다는 어떤 정확한 순간에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에 의해, 즉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에 의해, 말하자면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을 생산하는 인과성의 단절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L'actualisation d'une potentialité révolutionnaire s'explique moins par l'état de causalité préconscient dans lequel elle est pourtant comprise, que par l'effectivité d'une coupure libidinale à un moment précis, schize dont la seule cause est le désir, c'est-à-dire la rupture de causalité qui force à réécrire l'histoire à même le réel et produit ce moment étrangement polyvoque où tout est possible.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인과관계로부터 단절순간이라는 혁명의 잠재력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이런 미증유의 <실험> 시도의 제1탄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근본적 주장 중 하나는 이것이리라. 그리고 이 기획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일관한다. 그렇다면, 그러나 이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다음의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혁명으로서의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모순을 체현하는 계급의 한 쪽이, 그 모순의 최고 단계에 도달했을 때 저절로 찾아오는 필연적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 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먼저 계급은 기성의 모든 신분제·계층으로부터 탈코드화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AO, p.303), 그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계급이 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AO, p.302), 그리고 그 이름은 부르주아”(AO, p.303)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계급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계급-바깥(hors-classe)”이어야 한다(AO, p.303)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혁명의 내실은 이렇게 될 것이다, “혁명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권탈취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로부터의 자본그리고 노동도주라고.

이리하여 혁명은 이 말이 기존에 품고 있던 필연사관에 의해 뒷받침되는 뜨거운(쓰라린) 코노테이션(connotation, 함의)나중의 천 개의 고원의 화법을 구사한다면 마이너스 1”(MP, p.31)하고 있다. 즉 여기서 채용되는 입론 구성은 기본적으로 모순혁명의 원동력을 맡기는 노동자 본체론적 구상, 더 나아가 묵시록적 내지 목적-종말론적인 혁명구상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이로부터 들뢰즈·가타리를 읽는 것에 있어서는 주지의 논의, 즉 기존의 균일화된 노동자상 또는 계급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오히려 이로부터의 일탈로 규정되는 마이너리티도주로서의 혁명의 잠재력 맡기는 논의 구성이 대척적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 앞에서 인용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라는 의미에서, 역사의 역회전(revolution)”의 뉘앙스를 전면화시키게 되며, 그렇기에, 거기에 있어서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고 얘기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위와 같은 논점을 감안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는 역사의 인과관계로부터 해방된 무수한 사건이 이것임 hecceite”에 기초하여 개체화”(MP, p.318)하는 양상이, 거꾸로 스스로를 확립한 상태가 고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MP. p.32). 그것은 역사를 구성하는 질료-소재로서 생성변화의 질료-소재를 사용하는 것(MP, p.428)에 의해 역사로부터 누출-일탈해가는 을 측량하기 위해, 질료에 형상을 덧씌우는 형상-질료도식으로부터 질료-소재의 연속적 변화에 순종하는 질료[소재]-도식으로의 논점의 이행이기도 하다(MP, pp.509-12).

이렇게 매우 중요한 물음, 모순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를 기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들뢰즈·가타리에게 혁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상의 벡터에 있어서 역사에로 사건적으로 출현하는 이상, 그런 사람들의 도래는 사회 내부의 모순에 의해 담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 [내부] 모순들에 의해 정의된다는 주장은 잘못됐다(특히 맑스주의의 경우). 그러나 거대한 척도로 볼 때에만  그것은 참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커다란 척도로 사물을 본 경우에 한정된다]. 미시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그 도주선에 의해 정의되는데 이 도주선은 분자적이다”(MP, pp.263-4) On dit à tort ( notamment dans le marxisme ) qu'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contradictions. Mais ce n'est vrai qu'à grande échelle. Du point de vue de la micro-politique, 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lignes de fuite, qui sont moléculaires.

그렇지만 이러한 맑스주의자에 대한 강한 비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맑스주의자가 동요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로부터 곧바로 도출되는 맑스주의자에 의한 반문은, “그러면 모순에서 유래하지 않는 자본주의(분석)란 무엇인가?”라는 대척적인 질문이어야 하며,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려고 하는 미증유의 <실험>을 시도하려 들기 때문이다. ,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는 모순이 아닌 우발성”이라는 어휘로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가 기술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재생-이전된[재장전된] 맑스(Ma[t]r[i]x reloaded)가 있다. 모순이 아니라 우연에 자리잡고 자본주의 분석을 <실천>하는 맑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흠뻑 빠진자라고 들뢰즈가 규정한 맑스가 있다. 또한 그렇다고 한다면, 앞의 가차 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나중에 또 다른 어떤 인터뷰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은 맑스와 맑스주의에 의해 완벽하게 가로질러진 작품입니다. 현재 저는 저를 완전히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혹은 또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고쳐 쓰기라는, 거기에 있어서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역사의 역회전-혁명(revolution)”을 향해서, 이런 우발성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 분석이, 맑스로부터 논리 필연적으로 계승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춰서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당하며맑스가 정식화한 규칙들을 정확하게 따른다는 조건에서,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 회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정당하다”(AO, p.163), 또한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체의 음화(陰畵)이다”(AO, p.180)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도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단절>”,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는 논점을 상기한다면, “인과관계의 단절<우연성>으로서의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자본주의 분석이 불가피해진다는 것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세계사는 우발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며, 절단들과 극한[경계선]들의 역사이지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기”(AO, p.163 et passim) 때문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자본주의 그 자체가 <우발성> 내지 <조우>라는 <사건>에 의해 생겼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AO, p.265 et passim). 혹은 초기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으며, 거기에 노동자가 선행하는 시스템으로부터의라는 형태에 있어서 합류한다.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이런 사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들뢰즈가 말할 때,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연-조우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양태의 기술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까의 역사 ()기술의 문제와 관련해,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고 서술됐다는 것도 상기한다면, “욕망은 마음속의 <우발>적인 것이라는 것도 거기에는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욕망의 교차점이며, 그 하부구조, 그 경제 자체가 얼마나 욕망이라는 현상과 밀접하고 불가분한가를 알려면, 자본주의의 기원에 있는 우연성의 총량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죠라고 들뢰즈가 말할 때,우연성욕망”,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점차 밝혀지게 된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에 의한 강제적인 역사의 다시 쓰기라는 역회전-혁명적인 사태가 발생하기 위한 평면이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에 맹아적으로나마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 또한 그 근저에 자본주의그 자체의 우발적인 탄생이 가로놓여 있으며, 이 우발성과 욕망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러한 우발적 조우가 발생하는 평면이 내재평면혹은 공립평면이라고 불리며, 더 나아가 이 조우가 이른바 사건론으로서, “이것임이나 개체화같은 개념을 열쇠로 하여 세련된다는 것이 대략의 그 흐름으로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전망 하에서 이 글에서는 모순의 어휘가 아니라 우발성그리고 조우에 의거한,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의 작동양태, 나아가 그것에 평행선을 그리는 우발적인 세계사의 기술을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전에,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실험>의 전단계로서, 실험에는 가설이 불가결한 이상, 그들이 세운 <가설> 혹은 <실험>에 대한 일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때, 미셸 푸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발과 허구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탈코드의 게임은 우연에 맡겨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을 겪기 이전에 있는, 정보 시스템의 변조[교란] 내지 오인이다.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돌연변이와 진화 과정은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생명은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결코 자기의 장소를 찾아낼 수 없는 생[명]체에 도달한다. 그것은 방황하고 잘못되도록 운명지어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특이하고 유전적인 이 잘못이다. 푸코, 생명 : 경험과 과학

Au centre de ces problèmes, il y a celui de l’erreur. Car, au niveau le plus fondamental de la vie, les jeux du code et du décodage laissent place à un aléa qui, avant d’être maladie, déficit ou monstruosité est quelque chose comme une perturbation dans le système informatif, quelque chose comme une < méprise >. À elle aussi qu’il faut demander compte des mutations et des processus évolutifs qu’elles induisent. Elle également qu’il faut interroger sur cette erreur singulière, mais héréditaire, qui fait que la vie a abouti avec l’homme à un vivant qui ne se trouve jamais tout à fait à sa place, à un vivant qui est voué à < errer > et à < se tromper >.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시도한 미증유의 <실험> 및 그 준비로서 세운 <가설> 내지 <허구>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선으로, 여기서 푸코가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인쇄 허가를 내주었다고 하는 생명 : 경험과 과학의 논의를 경유하자. , 이 시점에서의 푸코의 논의로부터 소급적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의 논의 쌍을 우발-조우및 그것에 밀접한 <실험-가설>허구라는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이라고 말해도 좋은 과학사가 조르주 캉길렘의 과학인식론의 동시대적 의의를 논한 이 논고의 끝 부근에서, 푸코는 이번 절의 서두에 인용한 대목에서, 삶이란 오인에 다름없다, 생명이란 잘못일 수도 있는 것, “오인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생체는 우발성에 의해 횡단되고, “오류의 역량을 부여받았다. 오류가 진리와 짝을 이룬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짝을 창조-발명하는 것을 우리 인간이라는 삶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우발성이라는 점의 이해가 긴요하다. 그래서 진리를 이 근원적 오류로부터의 파생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개념이란 생명 자신이 이 우발성에 대해 주는 해답이라고 인정한다면, 오류는 인간의 사고 및 역사를 형성하는 것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진위의 대립, 진위에 부여되는 가치, 사회들이나 제도들이 이 분할에 연결되어 고려하는 권력의 효과 같은 것은 모두, 생명에 고유한 잘못될 가능성에 대한 뒤쳐진 응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류는 약속된 완성의 망각이나 뒤늦음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나 종의 시간에 고유한 차원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오류로서의 우발성에서 진리의 원천을 발견하는 이러한 관점은, 물론 니체의 계보학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위치되어 있을 것이다. 푸코 자신이 이 텍스트에서 니체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니체에서 보이는 이러한 진리에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불식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란 더없이 깊은 거짓말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에 가까운 동시에 먼 캉길렘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란 생명의 긴 연대기에 있어서의 가장 새로운 오류라고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진위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하고 얻은 가장 특이한 삶의 양식을 형성하고 있다, 생명은 그 궁극적인 기원 이래, 오류의 가능성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캉길렘에게 오류는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오류-우발성을 겪고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생체가 지닌 역량이다. “인간은 오류-우발성에 의해 삶을 촉발되며, 이 삶의 특이성을 해방할 수 있도록, 오류-우발성으로부터 그 삶에 있어서의 진리혹은 개념을 생산하고 벼려나간다. “오류란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이 말을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에 대한 헌사로 고쳐 읽는다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감행한 <실험>을 준비하는 <가설> 혹은 <허구>의 필연성이 이해될 것이다. 삶은 마음속 오류-우발성에 흠뻑 젖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근저에서부터 진리-허구이다. 그리고 그 일을, 그것을 측량하는 개념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긍정해야 한다. 이 뜻을 잃어버리지 않고,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을 뒤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들뢰즈·가타리로 돌아가자.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조우의 문제계로서 초점화되는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에서의 조우, 사유재산상품생산”, 혹은 자본가가 소유하는 변환 가능한 재화의 몇 가지 흐름자신의 노동력밖에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하나의 흐름”(AO, p.164), “노동자자본”, “생산자들의 흐름화폐의 흐름”(AO, p.266) 등 다양하게 표현되는 두 가지의 조우에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 요소가 조우하는 역사적 조건으로 들뢰즈·가타리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열거하고 있다. , “생산내지 자유로운 노동의 흐름 쪽에서의, “전제군주(야만) 기계”(통사적으로는 이른바 봉건제 사회”)로부터 문명(자본주의) 기계”(이른바 자본주의 사회”)로의 누출의 과정에 있어서의, 사기업화에 의한 토지의 탈영토화, 사적 소유에 의한 생산수단들의 탈코드화, 가정과 조합의 분리에 의한 소비재의 사적 사용, 노동으로도 기계로도 사용 가능한 노동자의 탈코드화가 그것에 해당된다. 다른 한편 자본의 쪽에 있어서는, 추상적인 통화에 의한 재화의 탈영토화, 상인자본에 의한 생산의 다양한 흐름의 탈코드화, 금융자본과 공공부채에 의한 국가들의 탈코드화, 산업자본의 형성에 의한 생산수단의 탈코드화가 관찰될 것이다(AO, p.267).

최종적으로는 노동자본의 두 개의 계열로 정제할 수 있는, 이상의 다양한 흐름의 변화 탈코드화 및 그 조우에 의해 생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가, “전제군주와는 그 지위status를 달리 한다. 이 점을 들뢰즈·가타리는 전제군주 기계는 공시적이지만 자본주의 기계의 시간은 통시적이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역사를 창조적으로 구축해가는 일련의 과정에 속속 등장한다”(AO, p.264)고 표현하며, 이것은 이른바 시계열적인 역사, 즉 진보나 발전 같은 19세기적인 역사관이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났다고 하는, 그 자체로서는 항식에 속한다고 말해도 좋을 사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 있어서 제시한, 인간을 가로지르는 시간”, 유한성에 기초한 노동”, “생명”, “언어의 변용의 틀 안에, 즉 푸코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역사,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그 자체를 기입하려고 하는, 또는 고쳐 쓰려고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실험>의 사정거리가, 엿보이게 될 것이다.

, 푸코에게 <역사>는 결코 시계열적인 사태의 계기(繼起)-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표(tableau)[굳이 번역한다면 표-] 내지 공간에 있어서의 미세한 균열의 발생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서두에 인용한 들뢰즈·가타리의 역사의 고쳐 쓰기, 이른바 진화-발전의 시계열상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는, 목적론적 의미에서의 혁명을 가리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간 내지 평면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존립평면내지 내재평면 위에 있어서의 자본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적인 조우를 가리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는 푸코의 뜻을 계승하고 있을 것이다. 천 개의 고원에서 비판되는 이른바 역사와는 별도의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우발적인 <역사>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사건, 여기서 이미 문제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는 앞서 말한 자본주의 발생역사적 조건중 하나인 노동의 탈코드화를, 이른바 통역사적 구분에 있어서의 로마 시대에서 보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로마 시대에 있어서도, 재산의 사유화로 인한 부동산의 흐름의 탈코드화, 거대한 재산의 형성에 의한 통화의 흐름의 탈코드화, 상품생산의 발전에 의한 상업의 흐름의 탈코드화, 재산 상실이나 프롤레타리아화에 의한 생산자들의 탈코드화 등의 사태가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전제군주 기계의 체제화에 있기 때문에 노예제를 산출하는것에 불과했다(AO, p.264)는 논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논점에 대한 각주에는 명백히 맑스에 대한 참조가 제시되고 있다. 다른 한편 자본의 계열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조건은 통역사적 시대 구분에 있어서의 봉건제시기에 이미 갖춰져 있었다고 간주되고, 사유 재산, 상품 생산, 통화들의 합류, 시장의 확장, 도시의 진전, 금납 지대·계약 임금의 출현 등 사태가 열거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들도 또한, 오히려 봉건적 하중·연관의 강화, 더욱이 원시적인 봉건제 단계 내지 노예제의 재건조차 산출하고 있는 등 사정을 이유로서, 그 자체로서는 자본주의 기계의 등장과는 반대의 결과를 이끌고 있다고 여겨진다(AO, p.264). 이런 통역사적 원근법으로부터 이탈된 지점에 있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고원개념이 확립되는 것은 명백하며, 이런 의미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얘기되는 고쳐 써진 역사, 이른바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도 명백할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가타리가 계획하는 필연성의 역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절단과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비연속적인 여러 가지 우발적 사건의 역사로서의 세계사의 기술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을 준비하기 위한 <가설>적 틀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곧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편력하는 기관 없는 신체위에서의 야만기계”,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며, 천 개의 고원에서의 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의 한 쌍의 개념에 의해 기술되는, “추상기계의 기계적 및 집단적인 이중의 어레인지먼트에 의한, 정주/유목, 포획/도주, 국가장치/전쟁기계, 홈패임/매끈함 등등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다.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된 모델과 천 개의 고원의 그것 사이의 최대의 차이점을, 전자가 생산의 양태에 중점이 놓인 반면, 후자에서는 예술·인문과학적인 분야를 넘어선 사회·정치적인 분야, 더 나아가 광물이나 동식물, 생물의 분야도 관통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교통내지 번역의 양태로 역점이 이동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서 생산 측면에서부터 유통 측면으로 논점이 전면적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 하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이렇게 제시된 <가설>적 모델을, 그것이 이른바 역사<실험> 재료-소재(matériaux)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갖고서 다름 아닌 역사바깥혹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을 찾아내려고 하는 <실험>이다 라는 점에서, 오히려 <허구> 내지 우화 만들기(fabulation)”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역사는 허구따위라는 것이 아니라, <가설>로서의 <허구>를 세움으로써 이뤄지는 <실험>에 있어서, 역사 속에 무수한 조우-우발성, 혹은 고원이 발견된다는 것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 푸코에게 개념은 우발성에 의해 생기는 <허구>였지만, 들뢰즈·가타리에게 그것은 동시에, 우발성과 조우하기 위한 <허구>이기도 하다. 우발-오류에 의해 촉발되고 세워지는 가설-허구에 의해, 거꾸로 우발적인 세계사야말로 이른바 역사의 도처에서 스캔[주사]될 수 있다고 하는, 이 상호적 관계 속에서 허구와 우발은 포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자본주의가 그런 세계사를 가능케 하는, <조우>로서의 출신을 갖고 있게 될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조우 : 몇 가지 이론적 <가설>

방법론으로서의 질적 분할

그렇다면 이 노동과 자본의 <조우>에는, 어떤 우연성이 발견되는가? 그것에는 자본의 축적에 밀접하게 관련되며, 다음의 두 가지 시기의 존재, 즉 우선 재화가 가치를 갖지 않고 그것을 모으는 데 유리한 기회”, 구체적으로는 재산-토지의 권리증서의 축적이 이뤄지는 시기, 이어서 이러한 재화의 가격이 오르고,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재화를 매각하는시기의 존재가 언급되며,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으로서 “‘가격혁명’, 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 원료자원[]에 대한 접근성, 도구·기계적 생산에 대한 호조건등이 있었다고 여겨진다(AO. pp.267-268). 따라서 여기서는 명백하게 맑스의 자본에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에 관련하여 노동자의 상품화<역사>적 우연성의 양상에 밀접하게 논해지고 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의 말은 결정적이다. , “모든 우연적(contingentes) 요인이, 이러한 조우적 연결들(conjonctions)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런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조우(rencontres)가 있었는가, 이렇게 명명할 수 없는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게 미치는 통제이다”(AO, p.268).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근저에서부터 우발적이며, “그러나그 생산양식을 침투시켜간다. 이런 그러나라는 이상한 접속이야말로, 자본주의는 오작동에 의해만 만사가 순조롭게 작동한다(les choses ne marchent bien qu’condition de draquer)”(AO, p.274)라는 원리를 알고 있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의 저명한 정식의 ()작동 양태에 다름없다. 그러나 그런 지적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앞서 열거한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우발-조우>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런 논의는, 맑스가 자본에서 논한 산업자본주의에서의 노동력의 상품화를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의 정당성이라고 얘기될 때의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를 가리킨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혹은 그 절단의 정의, 즉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한 모든 흐름의 조우적 연결은, 상인 자본에 의해서도 금융 자본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고, 그것들은 탈코드화나 탈영토화와는 다른 흐름, 다른 요소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AO, p.268). 그러므로 앞의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이 미치는 통제이다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하는 역사적 <우연성-조우> “이른바 본원적 축적, “그러나필요-필연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세계규모에서 반복되는 자본축적의 양태가, 아시아 등의 논의를 감안하여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고 명쾌하게 말해지고 있으며(AO, p.275), 이 관점은 물론 천 개의 고원에도 일관하고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반복되는 본원적 축적이라는 논점은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이 두 가지 잉여가치가 코드가 아니라 흐름 flux’의 잉여가치를 구성한다 사이의 영원한 불일치 나중에 보는 끝없는 이윤율저하경향라는 관점에서 분석되며(AO, pp.270-6), 게다가 이러한 자본주의의 작동의 핵심에 이윤율 저하 경향을 영원화하는 반생산”(anti-production)이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반생산주의로서의 무위(des-paevrement)의 공동체”(Jean-Luc Nancy)의 비판적 재검토를 요청한다 라는 논의가 이뤄지며,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본원적 축적이라는 폭력이, “포획장치또는 국가에 의한 이중적 폭력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비가시의 전제-메타수준으로 밀어 올린다 의 기제와 밀접하게 논의되고 있다(MP, pp.558-9)이라는 점을 확인해두자.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대해서는 마지막 절에서 역사와의 관계에서 다시금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앞으로 더 나아가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여기서는 철학자질 들뢰즈의 18번이라고 해도 좋은, 본성상 상이한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질적으로 분할하는 기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서도 완전하게 발휘되고 있을 것이다. 마조흐와 사드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결합관계도 발견되지 않은 듯이, 혹은 스피노자 윤리학이 서술 체계에 있어서 개체 사이에 나쁜 조우가 발생하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 자명하다고 간주되는 노임(salaire)”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화폐-자본, “본성상의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발-조우하는 양태가 <실험>적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가진 우발성에 기생하는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자본을 떼어내고, 각각을 그것 자체로서 파악함으로써, 모순에 기대는 것 없는 질적 분할에 의해 자본의 맑스가 여기서 재장전되고 있다. 거기서의 맑스는 이른바 유물사관에서 해방되고, “우발성의 세계사에 있어서 자본주의를 기술하는, 나중의 천 개의 고원에서 얘기되는 의미에서의 <역사가>이다. 따라서 맑스가 어떻게 재장전되어 있는가를 보기 위해, 질적으로 분할되어 각각 독자적으로 논의되는, 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코드의 잉여가치가 아니라 흐름의 잉여가치에 정위하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한다고 여겨지는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화폐의 이원성의 논의를 경유한 자본-화폐”, ②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형상-질료도식이 아니라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재장전된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도식의 반복으로서의 노동력을 둘러싼 논의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점을 감안한 위에서, 우발성 유물론에 기초한 재장전된 유물사관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논의되는 비신체적 형상으로서의 어레인지먼트”, “명령어등의 논점을 경유하여, “내재평면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1. “자본주의의 공리계의 표현으로 해석된 이윤율저하경향과 화폐의 이원성

맑스가 빠져 있는 예언”?의 하나로서 저명한(악명높은)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제창한다 이 방침은 천 개의 고원에서도 일관하고 있다(MP, pp.578-9) . “공리계란 단적으로는 코드에 있어서의 잉여가치흐름에 있어서의 잉여가치로 변용사키는 장치, 다시 말하면 자본의 출신형태로서의 화폐의 이원성(dualité de l’argent)”이며(AO, p.273), “자본주의는 화폐가 화폐를 낳고,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출신-친자 자본이 된다”(AO, p.269). , 통념과는 반대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끝나지 않는[=일치-해소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AO, p.271). 왜냐하면 자본과 노동력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 척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런 척도는 만약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설>로서의 순수한 허구이다(AO, p.273). , 우선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허구> 혹은 오작동에 의한 만사형통의 기예를 속속들이 알고-이용했다는 점이, 나중에 말해지듯이 중요하다. 어쨌든 들뢰즈·가타리는 이 기괴한 사정 말하자면 영원한 이윤율 저하을 설명하기 위한 문자()”로서, 미분의 비(Dy/Dx)를 제시할 것이다. , ‘Dy’가 노동력 혹은 가변자본의 유동을, ‘Dx’가 자본 그 자체, 혹은 불변자본의 유동을 구성하고, 자본의 출신-친자 형식으로서의 <x+dx> 즉 잉여가치는, ‘Dy’‘Dx’조우적 연결(conjonction)”에 의해 생긴다고 간주된다(이상은 AO, p.270). 그래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우발성 및 그 생산양식을 침투시키는 공리계로서의 작동이, 미분의 비에 있어서 완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음의 인용이 결정적이다. “경향적 저하는 극한(terme)을 갖지 않는다. 문제가 생산고의 견지에서 하는 생산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limite)라면 미분의 몫은 계산 가능하지만, 문제가 잉여가치가 생기는 생산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잉여가치], difference de natur...”(AO. p.273 강조는 인용자). 이로부터 유명한 테제, 자본주의는 자신의 끝-극한을 갖지 않는다혹은 극한을 스스로 치환함으로써 이 극한을 재생산한다라는 주장이 맑스에 대한 참조를 촉구하면서 도출된다(AO, p.273)는 것은 주지의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그것의 확인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공리계의 작동으로까지 관철되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조우>, 맑스에 의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재장전시킨/에 있어서 읽어 들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의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한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바의 잘못된 만남을 하고 있다 . 문제는 지양이라는 공통척도, “‘모순이 아니라 우발성”, ‘본성의 차이에 준거한 위에서 이뤄지는 자본주의의 출신의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성의 차이에 근거함으로써, 생명으로부터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관철되는 소재-도식의 연속 변화로서의 노동자의 역사가 기술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논점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상에서 개괄한 공리계의 구체적 작동양태의 아주 짧게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포획장치로서의 화폐를 둘러싼 논의를 일별해야 한다.

노동가 자본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의 증거로서의 두 가지 요소의 우발적 조우가, 잉여가치의 [종말]없는 발생으로서의 저하경향에 있어서도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예상되고 있으며, 화폐도 또한 이러한 이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 탈코드화되고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자유로운노동자를 노임관계 즉, 앞에서 본 미분의 비의 하나의 항인 <Dy>에 체류시키겠다는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재영토화의 기능을 갖는 동시에 코드들의 잉여가치를 흐름(flux)”의 잉여가치로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탈영토화하는 기능을 가진다. , 잉여가치 내지 이윤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두 가지 흐름 사이의 통약 불가능성 그렇지만 서로에게 내재하는 이 두 가지 흐름을 표현하는 화폐(monnaie)의 두 측면 사이의 어긋남에 의해 정의된다(AO, p.283). 이러한 이원성을 들뢰즈·가타리는 한편으로는 교환가치의[/라는